경남 고성군 대가면 유흥리 들녘. 제법 누렇게 익은 벼가 수확이 임박했음을 알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고, 논 주변으로는 백로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논 가장자리엔 10m 정도 간격으로 1m 높이 막대 중간에 매달려 있는 페트병들이 눈길을 끌었다. 페트병 가운데 부분은 'U'자(字) 형태로 잘라져 있다. 강극(65) 이장은 "막걸리에 쑥 미나리 등을 섞어 만든 천혜녹즙을 넣은 유인살충액"이라며 "이화명충 혹명나방 같은 해충들이 냄새를 맡고 들어갔다 빠져 죽게 된다"고 말했다.
논 가운데로 들어가자 벼와 벼 사이 거미줄에 멸구와 나방 등이 걸려 죽어 있고, 바지는 거미줄로 엉망이 돼버렸다. 송정욱(52) 대가면장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생명환경농법을 유흥리 들녘에서는 올해 처음 도입했다"며 "농약에 가장 약한 거미가 벼 포기 사이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것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흥리 들녘의 벼는 달랐다. 볏대는 갈대처럼 굵고 튼튼했으며, 이삭은 많이 달렸고 수수같이 컸다. 벼알은 굵고 개수도 많았다. 고성군 농업기술센터 이수열(54) 농업정책과장은 "관행적 농법의 경우 이삭당 벼알 수가 120개 안팎이었지만 생명환경농법으로 재배한 벼의 이삭당 낱알 수는 180~200개로 조사됐다"며 "생명환경농법은 모내기 때 3.3㎡당 75~80포기의 모를 심는 관행농법과 달리 45~50포기를 심은 만큼 올해 관행농법에 비해 10% 정도 증수(增收)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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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수를 20여일 앞둔 경남 고성군 대가면 들녘에서 농부와 고성군 농업기술센터 관계 자들이 생명환경농법으로 재배한 누렇게 익은 벼를 살펴보며 활짝 웃고 있다./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고성군이 생명환경농법을 도입한 첫해인 작년 10a(300평)당 평균생산량은 정곡 504㎏으로, 관행농업 경남도 3년치 평균 473㎏에 비해 6.6% 증가했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수확량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마을 농민 최용대(55)씨는 "30여년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기는 처음이어서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며 "10월 중순 수확해봐야 알겠지만 현재 작황을 보면 초기 불안감은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고성군은 작년 처음 생명환경농법을 도입했다. 화학비료 등 남용으로 인한 토양오염, 농축산물에 대한 소비자 불신 등 한계상황에 달한 농업과 농촌을 회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도입에 앞선 2007년 충북 괴산 자연농업생활학교에 농민 130여명을 보내 위탁교육을 했고, 작년과 올해에는 600여명이 위탁교육을 수료했다. 고성읍 덕선리에는 천연제초제·비료 등의 연구와 생산을 위한 생명환경농업연구소를 설치했다.
생명환경농법은 관행농법과 확연히 다르다. 기존 농법은 3.3㎡당 75~80포기의 모를 심는 반면 생명환경농법에서는 45~50포기의 모를 심는다. 포기당 줄기 수는 관행농법이 8~10개인 데 반해 2~3개에 불과하다. 밀식(密植)으로 기존 농법의 논에는 벼 줄기가 거의 똑바로 서 있으나 생명환경농법단지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다.
고성군 농업기술센터 이문찬(51) 생명환경농업정책팀장은 "벼 줄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햇볕 바람 공기가 뿌리까지 잘 통해 생육상태가 좋아지고 병해충 발생도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고 말했다.
발아시키기 위한 볍씨를 농약으로 소독하는 대신 섭씨 64도의 따뜻한 물에 10분간 담근 뒤 다시 찬물에 담가 곰팡이균을 제거하는 냉수온탕침법을 사용한다. 생명환경농법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지역에서 채취한 토착미생물(1000㎡당 150㎏)과 가축분뇨, 톱밥, 왕겨 등을 이용한 퇴비를 사용해 땅심을 살린다. 또 당귀 계피 감초 등을 발효시켜 만든 한방영양제와 천혜녹즙 등을 수시로 공급해 생명력 있는 쌀을 생산한다.
농약과 화학비료 등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메뚜기 미꾸라지 등은 물론 긴꼬리투구새우도 발견되는 등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 긴꼬리투구새우는 화학비료 등의 사용 증가로 거의 자취를 감춰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동물 Ⅱ급으로 지정된 보호종이다. 또 농약과 비료를 구입하지 않고 천연비료 등을 직접 만들어 쓰는 만큼 비용도 적게 들 뿐 아니라 농민 건강증진에도 도움이 된다. 이수열 농업정책과장은 "관행농법에서는 660㎡당 7만~8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생명환경농법으로는 3만원 정도 들어 관행농법에 비해 60% 정도의 생산비 절감 효과가 있다"며 "돈도 적게 들고, 땅도 살아나고, 수확량도 늘어나는 '농업혁명'"이라고 밝혔다.
고성발(發) 농업혁명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뜨겁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지난 7월 31일 고성군을 방문, 생명환경농법 현장을 관심 있게 지켜본 뒤 "생명환경농법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수행한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또 한승수 국무총리는 지난달 29일 고성생명환경농업연구소를 방문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규슈 지역 환경보존형농업연구회원 등 20여명이 지난달 24~25일 고성군의 생명환경농법현장을 둘러보는 등 외국인들 방문도 잇따랐다. 이문찬 생명환경농업정책담당은 "주당 5개 팀 정도가 고성군을 찾고 있다"며 "올해 2000여명이 고성군을 찾았으며, 수확시까지는 3000명이 넘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작년 163㏊였던 생명환경농법 벼 재배단지는 올해 388㏊로 늘어났다. 또 단감 참다래 등 25㏊의 과수와 파프리카 등 원예 29㏊도 추가됐다. 무항생제 가축 사육을 통해 고성생명환경농업연구소에 생명환경 복합형 축사를 설치, 농민에게 보급하기로 하는 등 축산 분야로도 확대된다. 생명환경 복합형 축사는 돼지 축사 바닥을 1m 정도 판 뒤 버섯폐목을 분쇄해 넣고 그 위에 톱밥 황토 토착미생물 등을 깔아 토착미생물이 가축분뇨 등을 분해해 축산폐수 등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 축사다. 햇볕이 잘 들고 공기 순환도 원활해 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다.
이학렬 고성군수는 "당초 목표대로 2012년까지 지역 내 1만㏊의 전체 농경지를 화학비료와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생명환경농법으로 전환하고,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