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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 기도했다.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 오후 3시는 해가 저물기 전 기도시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다고 한다. 다니엘 역시 하루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을 향하여 기도함으로써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혔었다.
초대 교회는 아직 기독교만의 예배당이 있기 전이었고,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유대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눈 장소는 성전의 한 장소였던 솔로몬 행각이었다.
성전에 올라간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이 높은 지대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은 신을 만나기 위해서 올라간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높이 쌓았고 바벨론에서는 바벨탑을 높이 쌓았다. 우리는 하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한다. 하늘과 가까울수록 하나님과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간다, 지방으로 내려온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서울이 지방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행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4장 22절에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여세였다. 40년 이상 걸어보지 못한 사람의 다리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약하다. 발에 깁스를 하고 한 두 달만 있어도 다리가 가늘어지고, 깁스를 띠면 걷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메고 와서 구걸을 시켜서 밥벌이를 시켰다. 번 돈은 나누어 가졌을 것이다.
구걸을 하는 장소는 성전만큼 좋은 곳이 없다. 전 세계로부터 예배하고자 찾아온 사람들은 성전 입구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선한 마음으로 예배를 하러 왔기 때문에 구제해야 할 사람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성전 입구는 구걸하는 데 최적의 장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마다 앉은뱅이를 성전 입구로 메고 와서 구걸을 시켰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예수님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하신 것도 알았을 것이다. 당시에 TV, 라디오, 인터넷도 없었지만, 소문은 화살처럼 빠르게 나돌아 다니는 것이고, 정보의 바다였던 성전 입구에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전 청소하신 일과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일 등을 다 보고 들었을 것이다.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평소에 하던 대로 구걸을 했다.
(행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의미 있게 바라보았다. 베드로와 요한도 역시 이 사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우리를 보라’라고 말한다.
(행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줄 것이고 생각하여 쳐다보았다. 돈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신선한 기대감이 그에게 밀려들었을 것이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얼굴은 동전 던져주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확실히 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들의 청렴성이 드러난다. 어떤 목사는 ‘저는 굶어 죽으려고 목회합니다.’라고 선언하고 목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목회자는 금과 은으로, 돈으로 구제할 만큼 돈을 모으면 안 된다. 가난과 청빈은 목회자의 기본 자세이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모든 교회 사역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성장하신 본 마을이었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사역의 직분명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오늘 날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이름 자체가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누구의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경찰서에서 일하는 김 아무개 경사와 친구이다.”라고 말하면 교통 경찰도 함부로 딱지를 떼지 않는 것이다.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효력 있는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남의 도장 함부로 찍는 것이 아니다. 도장을 쓸 사람이 도장을 써야 한다. 남의 도장 함부로 쓰면 도용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썼다가 망신을 당했다.
(행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행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면 기적도 일어나는 것이다.
황제가 도장을 찍은 조서는 황제의 말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황제의 이름으로 조서에 쓴 내용이 이루어진다.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기독교와 성경에는 자연이라는 말은 없다. 자연이라는 말은 과학자들이 쓰는 말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스스로 이렇게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연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수로 계산할 수 있는 법칙이 있다. 별들도 항상 그 법칙대로 움직인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치화 시키고 공식화 시키지만, 왜 그런 법칙이 있는지는 철학적인 문제이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법칙은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연의 이치, 공식화된 이치를 거슬러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연에게 있어서는 큰 스트레스이다. 성경에 보면 하늘의 해가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든지, 바다가 갈라져서 길이 되었다든지, 불이 붙은 나무가 타지 않았다든지,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다든지, 도끼가 호수 위로 떠올랐다든지, 빵과 고기가 바구니 안에서 밖으로 끊임없이 쏟아져나와서 남자만 5천명이 먹었다든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들로서는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자연으로서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역시 공부 안한 자녀가 좋은 대학에 붙게 해 달라든지, 암에 걸려도 죽지 않게 해 달라든지, 수련회 기간 동안에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든지 하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공부를 안한 자녀는 시험을 잘 못보는 것이 자연 이치고 심각한 암이 발견되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이치고, 수련회 기간이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 이치가 망가졌을 때 자연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40년 이상 앉은뱅이로 살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단번에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는 것은 자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다. 자연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연의 이치를 어그러뜨리시면서까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부활도 자연의 이치는 아니다. 자연의 이치를 망가 뜨리는 것이 부활이다. 자연을 공부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두개인들이나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자 그들은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들은 아프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었고, 죽으면 천국이고 지옥이고 없고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공부 못하는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식의 기도도 안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증인들이 증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초자연적인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활은 자연에 속한 일은 아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된다. 자연 공부의 역사가 다시 써져야 했던 것이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야지 왼손을 잡아 일으키면 안 된다. 왼손은 똥 닦을 때 쓰는 손이다. 악수를 할 때도 왼손으로는 절대 하지 않는다. 오른 손은 중동 지역 사람들에게 존중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오른 편에 계시다고 말한다. 오른 편은 그런 의미가 있다. 베드로는 오른 손을 내밀었고, 앉은뱅이는 그 손을 잡았다. 모종의 믿음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었어도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눈에서 믿음을 보았을 것이다.
발은 발목을 말하고 발목은 복숭아 뼈를 의미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했다. 옛날부터 의사들은 존경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의사들은 존경을 받았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의학 용어가 이것이다.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는 기적적으로 다리가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족이 있는 집으로 뛰어가지 않았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40년을 성전 앞에서 구걸하면서 그는 자신도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다리가 낫자마자 곧장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외국인과 장애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은 여러 영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 바깥뜰이 있었지만, 성전의 영역은 아니었다. 외국인의 영역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여인들은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성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그 안으로 더 들어가면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그리고 성소 건물이 나온다. 성소 건물은 제사장만 들어간다. 성소 건물 안에 가장 거룩한 장소가 있다. 그곳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찢어졌다고 기록된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런 영역들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신분, 성별, 혈통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침을 받은 거지는 이제는 당당하게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깊은 영역까지 자신 있게 들어갔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행 3: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유대인들은 그리스 사람들처럼 논리적으로 맞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말을 믿는다. 모세 때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기적으로 통해서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다. 엘리야, 엘리사를 믿은 것도 그들이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옳게 여기신다는 것과 동일하다. 제 아무리 장황하게 썰을 풀어도 기적 한 가지를 일으킨 것보다 인정을 못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