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 해방
요한복음 8:36
상동(尙洞)교회
1930. 10. 12.
脫罪而爲義之奴, 롬六章十八節.
聖神釋我. 仝八章二節.
被召者雖奴而實放. 고前七章二二節.
神在處有自由. 고後三章十七節.
基督賜自由勿負奴軛. 갈五章一節.
勿以自由爲機會. 仝 十三節.
察自由之法. 약一章二十五節.
言行由自由之法而受審. 仝二章十二節.
勿以自由掩惡. 벳젼 二章十二節.
人類之願解放不言可知也. 於二千年前爲解人類之束縛, 而主始誕生, 人皆不認, 反以釘殺者何也? 不知眞解放也. 束縛人皆自取, 自繩自縛, 如飛蛾拍燈走兎罹網也. 又不知束縛者果何物也? 主曰讎在爾家內. 太十章三六節. 束縛總不由他人, 總由爾自身也. 人類史上, 第以잉커언爲第一者, 解黑人之束縛故也. 又以摩西爲第一者, 解以色烈之束縛故也. 大於摩西, 大於잉커언之耶蘇, 解人類之束縛, 此非止一族, 非止一國, 解放全人類. 然人類以摩西及잉커언之史爲重, 而耶蘇之史則不甚重視, 止以敎祖視之, 不以解放者視之, 只知肉身之解放, 不知精神之解放也. 神解大於肉解, 神生者肉生也, 神不生而肉生者未之有也. 今日朝鮮人之生不在於肉生也. 先在於神生也. 試看丁抹國之生, 其指導者先欲活丁人之精神, 設立高等學校及會堂, 大大的宣傳丁人復活. 今吾人最弱之点在何處也? 其論區區, 或言敎育不足, 或言經濟不足, 或言政治不自由, 而皆有一理, 然最弱之点在精神也. 前日之失敗以此也. 後日之悲運亦以此也. 精神死滅, 肉身隨以死滅也.使精神死滅者果何物也? 有各種稱號, 而總稱以代名詞曰罪也. 罪之說人人不願聞之, 又不欲注意, 罪卽不法, 有罪卽死, 死不可免, 有不至死之罪, 不至死之罪, 始于束縛, 如蜘跦設網, 有虫羅之, 始則脫出甚易, 然縛之又縛, 虫乃不能動, 故始於不死之罪, 見如此之人, 則爲之祈禱可也云. 요一, 五章十六節. 故犯不死之罪, 此不可祈禱云. 仝十七節. 始則不知而犯, 終則知而故犯也. 始犯爲縛, 故犯又縛, 縛之又縛, 終乃如騎虎之勢, 欲卸不能, 有能捕虎之人, 使押虎不動則人可下走矣. 荷蘭有捕象者, 採牙致富, 將治任歸之, 更獵一圍, 故被象死故. 束縛始於喜快, 飮酒者始於甘, 拜金者始於貪, 所以甘所以貪, 乃利我之物耶, 卽害我之物耶? 束縛與解脫生焉. 物不能爲吾害而證然無事者大人也. 物來而順應之, 不計淸濁而受之者小人也. 以驕爲縛者敗於驕, 以淫爲縛者敗於淫, 以貪爲縛者敗於貪, 朝鮮以兩班爲縛而敗於兩班, 以迷信爲縛而敗於迷信, 所謂束縛者不一枚擧矣. 無非出於快好, 而其敗孼伏于門前. 鷰雀處堂, 棟宇將焚, 母子相哺, 嘔嘔焉相樂也. 樂極哀生豈非此耶? 由此觀之, 喜快所以亡明, 人之亡, 所以好待滿, 人餌其所好而亡之也. 古人曰生於憂患, 死於安樂, 至哉言乎! 亞力山大死於酒, 逸樂所以死物也. 希律醉斬요한, 羅馬之亡亦在於逸樂也. 故曰束縛始於喜快也. ◇然則此束縛何以解之? 本章眞理釋我. 保羅曰聖神釋我. 롬八章二節. 主曰縛力士者必大於力士也. 太二十章二十九節. 吾等多束縛. 以習慣爲縛, 以班閥爲縛, 以禮法爲縛, 以舊習爲縛. 非但朝鮮世界亦然, 中人以纏足爲縛, 和人以尊佛爲縛. 如是多縛不能自由, 主曰神在處有自由則, 고後三章十七節. 信而後有能解縛矣. 懷德宋氏家禮拜爲證. 非信無自由也. 中人之信者無纏足者. 美國之禁酒甚大云, 非信不能行, 黑人賣買非信不能禁, 今世界之人種差別非信不能廢, 今日論軍縮而非信不能行, 今世界之內偶像充滿非信亦不能禁. 今日靑年心理錯誤甚多, 隣家有巫覡盲人之經而有不知禁, 至於敎會反以偶像視之, 此等巫覡之弊非信亦不能禁, 故信而後有自由矣. ◇然聖書每言自由之法, 而深切注意於自由之事, 保羅曰勿以自由爲機會, 갈五章十三節. 人知喜自由而誤用自由者多矣. 手能動口能言皆自由, 而動與言皆有法度, 不守法度而放任, 是誤用自由也. 只知自由而不知者多矣. 自由而不知父子, 自由而不知男女, 自由而不知國家, 若誤用自由則人類滅矣. 故保羅曰脫罪之奴而爲義之奴, 롬六章十八節. 是爲眞放.
죄에서 벗어나 의의 종이 됨 | 로마서 6:18. |
하나님의 영이 나를 해방시키심 | 로마서 8:2. |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나 실로 자유인이다 | 고린도전서 7:22. |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 고린도후서 3:17. |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셨으니,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 갈라디아서 5:1. |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 갈라디아서 5:13. |
자유하는 법을 살피라 | 야고보서 1:25. |
말과 행동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으리라 | 야고보서 2:12. |
자유로써 악을 가리지 말 것 | 베드로전서 2:12. |
인류가 해방을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인류의 속박을 풀어주기 위하여 주님께서 탄생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도리어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참된 해방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속박을 당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니 마치 자기가 포승줄을 가지고 스스로를 묶는 자승자박(自繩自縛)과 같습니다. 날아다니는 나비가 등불에 부딪쳐 죽는 것과 같고, 달리는 토끼가 그물에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속박을 모르는 자는 과연 무엇입니까? 주께서 ‘원수는 너의 집안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36). 속박은 다 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아브라함 링컨을 그 첫째로 삼는 것은 흑인의 속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를 제일로 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속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보다 더 크고 링컨보다 더 큰 예수는 인류의 속박을 풀어주셨습니다. 한 겨레만이 아니고, 한 국가만도 아니고, 전 인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모세나 링컨의 역사를 중히 여기고, 예수의 역사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교조(敎祖)로서 바라보는 데 그치고 해방자로서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육신의 해방만을 알고, 정신의 해방은 모릅니다. 정신의 해방이 육신의 해방보다 큽니다. 정신이 산 자는 육신도 살지만 정신이 못 살고 육신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조선인의 삶은 육신의 생명에 있지 않고 먼저 정신의 생명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생활을 살펴보십시다.
그 지도자는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고등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덴마크 사람들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약한 점은 어디 있습니까? 그 의논은 구구합니다. 어떤 이는 교육의 부족을 말하고, 어떤 이는 경제의 부족을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정치의 부자유를 말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취약한 점은 영적인 일에 있습니다. 지난날의 실패도 여기에 있습니다. 후일의 비운도 역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어 없어지면 육신도 따라 죽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을 죽어 없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명칭으로 말하겠으나, 총괄하여 말하자면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사람들은 듣기를 싫어하며, 또한 생각을 기우려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죄는 바로 불법입니다. 죄가 있으면 바로 죽습니다.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면 벌레들이 걸리는 것과 같이 처음에는 탈출하기가 매우 쉽지만 묶이고 또 묶이면 벌레가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요한1서 5:16). 죽지 않는 죄라고 일부러 범한 자가 있으면 ‘이런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요한1서 5:17).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지만 끝에 가서는 알면서 일부러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 범죄를 해도 속박이 되는데 일부러 범죄를 하는 고범죄(故犯罪)는 속박이 됩니다. 속박된 위에 또 속박이 되면 마침내 호랑이에게 업혀가는 기호지세(騎虎之勢)가 되어 내리려야 내릴 수 없이 됩니다. 누군가 호랑이를 잡는 사람이 있어서 호랑이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여야 업혔던 사람이 비로소 호랑이 등에서 내려올 수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에 코끼리 잡는 사람이 있어서 그는 상아(象牙)를 뽑아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행장을 정리하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사냥을 나갔다가 코끼리에게 받혀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속박은 처음에는 기쁨을 누리려고 시작되고, 술을 마시는 자는 달콤한 술맛에 끌려 시작되고, 돈을 벌려는 자는 탐내는 데서부터 시작되니, 달다는 것과 탐내는 것 등은 다 나를 이롭게 하는 물질입니까, 나를 해롭게 하는 물질입니까? 속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이 나에게 해를 줄 수 없이 아무런 일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대인(大人)입니다. 물건이 다가오면 이치에 순종하여 반응해야 하는데 청탁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소인(小人)입니다. 교만 때문에 속박된 자는 교만으로 실패하고, 음탕으로써 속박된 자는 음탕으로써 실패하고, 탐냄으로써 속박된 자는 탐내는 일 때문에 실패합니다.
조선은 양반 때문에 속박되어서 양반 때문에 실패하였고, 미신에 속박되어서 미신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속박이라고 이를 수 있는 것들은 낱낱이 다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기쁨과 즐거움에서 나왔으나 그 실패의 씨는 기쁨의 문 앞에 숨어 있습니다.
제비가 마루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데 그 집이 장차 불타려고 하지만 어미 제비는 새끼제비에게 먹이를 열심히 날라다 먹입니다. 이 때 그들은 다정스레 서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쁨이 지극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두고 본다면 기쁨과 즐거움은 망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만족하기를 바라고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주어 그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우환으로 살다가 안락으로 죽는다’(生於憂患 死於安樂)라고 하였으니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알렉산더는 술 때문에 죽었으니, 편하고 즐거운 것이 죽음으로 이끈 것입니다. 헤롯도 술에 취하여 요한을 베어 죽였으니 로마가 망한 것도 일락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속박은 기쁨과 즐거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속박을 어떻게 하여야 풀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로마서 8:2). 주님은 ‘힘 있는 자를 결박시키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 보다 힘이 더 센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0:29).
우리에게는 속박이 많습니다. 습관이 속박이 되기도 하고, 양반의 문벌이 속박이 되기도 하고, 예법이 속박이 되기도 하고, 옛 풍습이 속박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 그러합니다. 중국 사람은 전족(纏足)으로 속박이 되고, 일본 사람은 불교를 존숭하는 것이 속박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속박이 많으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3:17). 그렇다면 신앙이 있은 뒤에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회덕 송씨(懷德宋氏) 집안에서는 예배로써 그것을 증거를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중국의 신자들에게는 전족을 한 자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금주(禁酒)가 가장 큰 일이라고 하는데, 신앙이 아니면 실행될 수가 없습니다. 흑인을 매매하는 일도 신앙이 없으면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종차별도 신앙이 아니면 폐지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군인들을 줄이자는 군축(軍縮)에 대한 의논도 신앙이 아니면 실행될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 안에는 우상이 가득한데 이것도 역시 신앙이 아니면 금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청년의 심리상태는 착오된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웃집에 무당이나 맹인들의 독경이 있어도 금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도리어 우상으로 취급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무당(巫堂) 신앙의 폐단도 믿음이 아니면 역시 금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은 뒤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늘 자유의 법을 말하지만 자유에 대한 일을 매우 절실하게 주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5:13).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하면서 자유를 잘못 이용하는 자가 많습니다. 손을 쓰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다 자유인데 움직이고 말하는 것에는 다 법도가 있습니다. 법도를 지키지 않고 방임하는 것이 바로 자유를 오용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안다고 하면서 모르는 자가 많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부자도 모르고, 자유는 남녀도 모르고, 자유는 국가도 모릅니다. 자유를 오용하게 되면 인류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義)의 종이 되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6:18). 이것이 바로 참된 해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