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29-30
추녀의 국적 2.
특수수사과는 연일 문닫힐 틈도 없이 분주했다. 그러나 수사는 연일 원점에서 원점으로 무에서 무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장과장의 신경질은 날로 늘어가고 있었고 남형사와 윤형사는 이상하리만큼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세 건의 사건에 의기소침해져갔고, 급기야는 사건이 영원히 미궁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리가 특수수사과 내에 팽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윤보혜의 독살은 연성철 박사가 뚜렷한 용의자로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파라티온을 탓을 거라는 심증만으로는 수갑을 채울 수도 없었다. 더욱이 파라티온이라는 농약은 독성이 워낙 강해서 고도의 살인을 가능게 해주기 때문에 섣불리 연박사가 범인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성급한 면이 있었다.
성주라양의 실종은 여전히 "실종" 그 자체였다. 이제는 시민의 제보밖에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비록 Y의 살인 때문에 연박사와 김진건 아나운서에 대한 알리바이 수사가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성과가 있을지는 의문시된다. Y의 살인은 사건 발생 닷새가 지나도록 Y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시무라 다니구찌는 정말 일본인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긴 했지만 Y의 신원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백약이 무효라는 듯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감식반이 찍은 Y의 사진은 성형외과 병원에서도, 일본 경시청의 협조를 얻은 일본에서도 효과가 없었다. 니시무라 다니구찌의 몽타즈도 별 소용이 없었다. Y나 니시무라 나니구찌를 알고 있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특수수사과는 초상집을 연상케할만큼 동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침체 분위기였다. 국장으로부터 경찰복을 벗을 각오하라는, 국장의 시퍼렇게 뜬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국장실을 나온 장과장은 청심환을 힘없이 입에 넣으며 낡은 소파에 앉아있는 남형사를 바라보았다.
"한 개 줘?"
"아, 아닙니다."
남형사는 무심결에 내밀었던 손바닥을 얼른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요즘 윤형사가 잘 안 보이는군."
장과장은 안주머니에 꺼냈던 청심환을 도로 집어넣으며 윤형사를 찾았다.
"연박사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그러는 자네는 왜 여기 죽 때리고 앉아있나?"
장과장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형사를 보았다. 남형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하고 있었다.
"윤형사를 봐, 얼마나 부지런해. 이게 뭔지 알아? 김진건 아나운서를 만나고 온 보고서야.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책상 위에 놓고 나갔어."
장과장은 보고서를 남형사 앞에 흔들면서 언성을 높였다.
남형사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읽어봐."
남형사는 성형외과 병원을 돌아다니느라고 알이 배긴 종아리를 한 손으로 맛사지하면서 보고서를 받았다.
-김진건 아나운서는 23일 오후에 명동을 산책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매우 울적한 기분이었다.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일년 열 두달 방송 스케줄에 묶여 20년 동안 내 시간을 제대로 가진 적이 없었다. 아나운서직을 그만두고 조그만 사업이라도 운영한다면 나만의 자유시간이 생길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20년 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한 위치에 오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 많은 거리를 걸어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씻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방송국으로 귀환회로 할수밖에 없었다. 방송국 아나운서실은 역시 내 바다였던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마이크를 떠나 살수 없다는 것을 느낀 나는 오히려 아나운서직에 회의를 느끼는 후배 아나운서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후배와 같이 술을 마시면서 따뜻한 말로 내 경험과 직업관을 얘기해주었다.
-김진건 아나운서가 명동길을 걸은 것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진사와, 김아나운서가 밝힌 코스를 따라가면서 상점 주인들과 행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여러 사람이 김아나운서를 목격했다고 증언해 주었음. 특히 사진사의 카메라에 잡힌 김아나운서의 모습은 23일의 의상과 똑같았음.
"결국 연박사만이 용의자로 남게 되는 셈이군요."
보고서를 읽고난 남형사가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윤보혜양의 독살과 성주라양의 실종에서도 연박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어."
장과장은 자기 책상으로 가서 앉으면서 또 한 장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2과의 손형사의 박만하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 내용이었다.
-박만하는 지하실의 사무실을 폐쇄하고 최근에 아파트 한 채를 사서 대부분의 시간을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음. 태이프와 필름은 처분해버렸는지 아니면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음. 그는 요즘 B회사에서 주최하는 사진 콘테스트 공모에 응모하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음. 23일의 그의 알리바이는 쉽게 확인되었음. 경마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음. 그리고 저녁 5시 이후부터는 청량리에 있는 C당구장에서 밤 9시까지 당구를 쳤고 그 이후로부터는 당구를 같이 쳤던 사람들과 밤새도록 포커를 했음. 당구장 주인과 노름 친구들의 증언이 일치함. 화장실에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는 당구와 포커에 광적으로 열중했음.
"마지막 용의자가 연박사인 것만 확인시켜준 셈이군......"
장과장은 부하 형사들의 보고서를 취합해서 한데 모으고는 서류함에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연박사에 대한 알리바이 깨뜨리기 수사에 들어가는군. 그걸 윤형사게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었어......"
남형사가 들을만큼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장과장은 소파로 다시 걸어오면서 느닷없이 실눈을 치켜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남형사의 폼이 영락없이 추리를 빙자한 졸음이라고 단정지었는지 장과장은 세월의 훈장인 이마의 주름살을 깊게 잡았다.
"이봐, 남형사."
장과장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남형사의 어깨를 툭 치자 그는 눈을 번쩍 뜨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보았다.
"과장님!"
"어이쿠, 깜짝이야."
"Y말입니다. Y이요!"
"Y가 뭘 어쨌다구?"
"가능성..., 가능성이 생겨났습니다."
남형사가 솟구치듯 소파에서 일어나며 흥분된 동공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또 뭘 갖고 그래?"
"Y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체를?"
"그렇습니다, 과장님."
"남형사, 흥분 좀 그만하고 차근차근 얘기해 봐. 이거안 되겠군."
장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청심환을 꺼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남형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자, 이거 먹고 진정 좀 하게."
"아, 고맙습니다, 과장님."
남형사는 청심환을 얼른 입에 집어넣으며 소파에 앉았다.
"Y의 정체를 벗겨낼려면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 아니라는데서 출발하면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뭐야?"
장과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실망한 낯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위장과 변장을 했다면 Y의 정체는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어이구, 내 청심환......"
장과장은 남형사의 불거진 한쪽 뺨을 보면서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Y의 신원이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 아닐 것이라는 가설이 통용될수 없다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니시무라 나니구찌는 가공의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즉, 외국인을 가장한 내국인의 소행일 수 있는 것입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그것만으로 Y의 정체를 벗겨낼수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Y의 손가락 지문을 없앤 이유는 Y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도 지문 하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었다면 Y는 오히려 한국 여성으로 둔갑시켜놓는 게 유리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당체 헷갈려서."
"신발부터 속옷까지 모두 벗겨갔다는 건 역으로 말해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경찰에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육체를 폭행한 것도 아니고, 이것은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