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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5장 1-6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유월절 전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이때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갔고,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격려 및 위로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근심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이 올라간다고 해서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어 너희와 함께 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참된 믿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고백했다는 것은 그들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왜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가? 그들의 모든 사역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조차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사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역을 해야 할 사도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더더욱 성령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즉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있어야지만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긴 사역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만 했던 겁니다.
특히 지난주에 확인했지만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그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부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성부의 가르침이 성자의 가르침인 것이고, 성자의 가르침이 성령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이 성부와 성자와 다른 독자적인 가르침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 중심이었다면 사도들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가야 하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함께 하심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오시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 것처럼 사도들 역시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환영이 아닌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심으로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위로의 말씀은 이어지는 15장과 16장을 통해서도 계속되는데, 요한복음 14장 31절 하반부에 보면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유월절 만찬이 있던 곳에서 14장의 말씀을 하셨다면 그 장소에서의 말씀은 끝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15장과 16장의 내용을 보면 14장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는 가르침을 계속해서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14장과 연속된 내용이 15장과 16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14장이 유월절 만찬이 있던 곳에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15장과 16장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했을 때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 15장 1절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후 내용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자신과 가지인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내시지만, 지금까지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 앞서 나는 참포도나무이지만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일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가 주체인 것처럼 성자도 주체이십니다. 성자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성령도 주체이십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성자 하나님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심지어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는 제2위격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을 취하셨다는 점에서, 또한 그가 중보자가 되신다는 점에서, 심지어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성부 하나님만을 높이는 분으로 계셨던 겁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분으로 계셨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성부 하나님만을 높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 자신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만을 높여드리는 것, 이것이 모든 성도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생을 보내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어지는 2절에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부터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시면서 가지를 제거하든지, 아니면 더욱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깨끗하게 하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열매의 있고 없음이 가지 자체에 달린 문제는 아닙니다. 2절 상반부에 있는 내용,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기 때문에 가지 스스로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쪽으로 가기가 쉽지만, 요한복음 15장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일단 3절에 의하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발 씻기신 사건에서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기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합니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기를 간청하게 됩니다(요13:9). 거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가 깨끗한 자인지, 누가 깨끗하지 않은 자인지 아십니다. 열 두 제자 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 진 자들임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셨는가? 신성으로는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지예정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미리 아시고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정하신 바를 아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것을 염두 해두고 다시 2절을 보시면 내게 붙어 있지만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단순히 불신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서 열매를 찾아 볼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농부이신 아버지는 그들을 제거해 버리신다는 겁니다. 반면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 다시 말해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대상은 누군가? 모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농부로, 모든 만물의 창조주로 모두가 하나님의 눈 밖에 있는 자들은 아니지만, 그들 가운데 돌보시는 대상은 결코 모두가 아니란 것입니다. 소위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6:26)라는 말씀처럼 일반은총을 따라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대상은 누군가? 모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 진 사람들, 그들만 하나님의 돌보심의 대상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오직 택자만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데,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연합 없이도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와 아주 흡사한 것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은 훈련을 통한 습득된 온갖 도덕적인 행위들이나, 형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리스도 안에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처럼 보일 뿐,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와 아주 흡사할 뿐,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는 아닙니다. 그래서 농부이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제하여 버리십니다. 한동안은 그대로 두시기도 하시지만, 때가 되면 제거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 주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게 된 가지로 여깁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께 붙여 있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한다면 그런 가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외식적인 행동의 목적은 자기 영광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허울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열매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 설명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성부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 분명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중보자로 계시기 때문에,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로부터 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부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뚜렷한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열매도 있어야 하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열매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전혀 이런 열매가 없다면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은 제하시는 방식과 관련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억제하시는 은혜를 거두시거나,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들을 보내셔서 거짓말들을 믿게 하시거나, 그들을 자신들의 상실한 마음과 사악한 욕심들과 육정들 속에 내버려 두시거나, 그들의 은사들을 거두어 가시거나, 그 밖의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을 잘라내 버리실 것이고, 그들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결코 갖지 못하게 된다.
반면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이미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더욱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만 특별한 은총으로 돌보신다는 것인데, 어떻게 돌보시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그 사람의 양심에 계속해서 뿌리심으로써(히10:22), 자신의 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서 불로 역사하여 그 사람의 찌꺼기들을 정화하게 하심으로써, 혹은 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서 물로 역사하여 그 사람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게 하심으로써, 또한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벧전1:22), 믿음을 통해서(행15:9), 때로는 십자가와 환난을 통해서(사1:25, 27:9)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로 세우십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는 것은 2절 하반부 말씀이 너희와 관련된 내용임을 알리시는 겁니다. 열 두 제자 모두가 아니라 가룟 유다를 제외한 ‘너희’라는 겁니다. 예정론으로 하자면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그러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하여 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복음 15장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제거하거나 놔두시기 때문에 열매를 맺자는 쪽의 내용이 아닙니다. 너희는 3절의 말씀처럼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된 자이기에 2절의 말씀,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일하신다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3절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의 깨끗함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깨끗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함께 성령 하나님도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디도서 3장 5절에서는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으로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무엇을 도구로 하시는가? 말씀을 도구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 더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죄인인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것입니다(롬10:17). 그런데 말씀을 듣고 믿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고전12:3).
결국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가 일러준 말로 말미암아 깨끗하여졌다는 것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시진 않았지만 말씀의 헛되지 않음이 성령을 통하여 분명히 적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 구약 백성들은 어떻게 사함을 받습니까? 동물의 피로 사함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동물의 피를 통해 예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확실성은 믿음 없이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성령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피 흘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헛되지 않음이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은 이미 깨끗해 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해서 더 이상 씻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해졌다는 것인가? 요한복음 13장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깨끗하여졌지만 더 많은 열매,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더욱 깨끗하게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여전히 더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죄책은 제거하셨지만 여전히 부패가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패함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누가 그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가 이미 깨끗하여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달리 말하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여졌지만 완전히 깨끗하여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내 안에,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계속해서 내 안에 거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여 너희 안에서 역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먼저 이루어야지만 나도 너희 안에 거하여 역사하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어디 있습니까?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시작도 우리가 할 수 있고, 구원 받은 자로서 열매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시작은 우리가 할 수 없지만, 구원 받은 자로서 열매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시작도, 구원 받은 자로서 열매를 맺는 일도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그때만 죄 사함도 있고, 열매까지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엄밀하게는 내 안에 거하라고 할 때도 우리 스스로는 거할 수 있는 실력이 없지만, 그래서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분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거하게 되지만, 명령을 통해 이미 깨끗해 진 자의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심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십니다. 즉 내 말로 인하여 깨끗함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자리는 내 안에 거하도록 하는 것, 내 말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란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가? 거하지 않으면 마치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떨어진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 말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하고 있는 자들에게 거하라고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그 일에 참여토록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로 오시면 바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절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시면서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고 난 뒤 이제 성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데, 그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에게 붙어 있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론으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이고, 그런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본래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것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 무능력까지 말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능력을 발휘하는 곳은 죄만을 향해 있습니다. 로마서가 표현하는 것처럼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 자로 있을 뿐이니다(롬3:13-15). 그런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구원 받은 이후에도 부패함이 남아 있어 늘 선과 악이 싸우게 됩니다. 선과 악이 싸우게 될 때 선이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그런 우리에게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더러워질 수밖에 없기에 말씀으로 씻고 또 씻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너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내 안에, 나의 말 안에, 또한 내 말을 사용하는 성령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실 때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의 지혜요, 그가 우리의 의로움이요, 그가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가 우리의 구원함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고전1:30). 그러나 그가 우리의 거룩함이지만, 거룩함이기 때문에 의로움처럼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열매는 죄에 대한 죽임, 그리고 의에 합당한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방편으로 주시는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효력이 없습니다.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친히 가르쳐 생각나게 하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요14:26).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씀으로 역사되도록 하셔서 말씀하신 바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 5절이 전체 비유의 결론과 적용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있는 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선한 일을 할 자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전적 타락이요, 전적 부패요, 전적 무능력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이 사실을 늘 부정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가톨릭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이 말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 말씀을 약화시킵니다. 그 의미를 완전히 배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있으면 우리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인협력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이런 이해가 있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성화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화만큼은 하나님도 일하시지만 동시에 인간도 일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습니다. 내가 열매를 맺어야 하고,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화를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애써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 그리고 성경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사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인협력과 같은 사고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생각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즉 구원의 주체가 인간일 수 없고, 성화의 주체도 인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부름을 받고 회개하게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그런 성격뿐만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전 내용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데만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열매까지도 하나님 은혜 없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본래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라는 직분까지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난 뒤 그가 행한 것도 말합니다. 그 삶을 한 마디로 다른 사도보다 더한 열심으로 주께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을 다한 것이 내 열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열심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고백합니다. 그래서 강조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비록 외적으로 다른 사도들보다 열심을 냈을지라도 그 열심 자체도 돌아보면 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분의 은혜 없이는 존재 자체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행하는 어떤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를 통해서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듯 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도 모든 생활을 넉넉히 해 나가는 불신자들을 봅니다. 심지어 우리가 볼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행, 마치 성령의 열매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 또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맺고 있는 열매는 죽은 자의 열매일 뿐이요, 그런 의미에서 썩은 열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열매라 함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죽음을 의미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죽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의미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맺는 열매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열매입니다. 그럼 그들의 선행은 무엇인가? 비록 인간이 볼 때는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요, 살아서 어떤 행동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어떤 행동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성경의 표현처럼 죄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다시 산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스스로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살려주셨으면 우리가 스스로 맺을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외적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그 말씀을 조명하시고 깨닫도록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사실은 우리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되는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5절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특별히 주의해서 봐야 될 부분은 22절과 23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없이 그리스도만으로는 불완전한 존재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주님 역시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몸 된 우리와 떨어져서는 완전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때문에 충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만큼 우리를 붙들어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23절 하반부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도 충만하시고, 충만 자체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 없이는 충만을 포기하겠다는 식으로 자신을 머리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결국 충만이요 충만 자체 되시는 그분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듯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충만케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너희가 아무리 나를 떠나려고 발버둥 쳐도 내가 너희를 택한 이상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너희를 충만의 자리로 이끌고야 말 것이다. 당연히 우리가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거나,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산다면 주님은 결코 가만히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매를 드시고, 징계를 하시고,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충만의 자리로 오게 하고야 마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충만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영광으로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그분이 충만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충만해 지는 수밖에는 없는데,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겁니다.
내 안에 거하라. 거하지 않으니까 버리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에,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자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위해 일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셔서 열매를 맺기까지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충만할 수 없는 존재요, 충만을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충만해 지길 원하는 것은 열매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부, 세상적인 가치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충만의 자리로 이끌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할 수 없고, 너희는 하지 않지만 내가 하겠다는 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늘 확인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위한 삶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도록 하시는 길로서의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확인함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달리 말하면 그분의 영광은 그분 스스로가 책임지신다는 것을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해 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인생과 달리 오늘 본문 6절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 버려진다는 것은 더더욱 어떤 열매도 그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르게 될 것이고, 그런 가지는 불을 지피는 용도 외에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코 택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미 깨끗해진 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하게 될 자들에게 돌아갈 내용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으로도 5절의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기에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고 있는 너희는 더더욱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열매 자체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런 자들 중에 그리스도와 분리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유기자기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결국 하나님이 실패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서는 마치 자신이 택자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 가룟 유다처럼 그리스도를 따라다니고 있으니까 안전지대에 들어온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열매가 없다면 결코 안전지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이 말씀으로 교훈 받아야 합니다. 열매 없는 주의 백성은 없기에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잘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때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 때문에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나는 사라져도 괜찮은지 자신을 살피셔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또한 동일한 의미로 그의 말씀이 내 안에, 내가 그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를 따라 이러한 열매를 맺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