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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곳/시간. 2006. 8/11~12.
미시령 출발 ; 4:00
~ 주능선 ; 4:05, 작은 공터.
~ 샘터 ; 4:35/4:40 야영터.
~ 전망바위 ; 4:55
~ 상봉 ; 5:10/5:15
~ 화암재 ; 5:45
~ 신선봉 ; 6:05/6:15
~ 헬기장 ; 7:05
~ 샛령 ; 7:27/8:07 대간령.
~ 암봉 ; 8:31
~ 안부 ; 8:42
~ 병풍바위 ; 9:05/9:20
~ 마산봉 ; 9:40/9:45
~ 스키장 리프트 ; 10:12
~ 산끝(리조트 뒤) ; 10:20/10:30
흘리령(屹里嶺) 지나서
~ 군부대 위병초소 ; 10:36
~ 시멘트 농로 ; 10:40
~ 임도(시멘트 농로 끝) ; 11:00
~ 진부령 농원 ; 11:06
~ 중계 안테나 ; 11:10
~ 진부령 ; 11:20 총 7시간 20분.
2. 이동 거리.
미시령 ~ 신선봉 ; 3.45 km.
~ 샛령 ; 2.85 km.
~ 마산봉 ; 3.55 km.
~ 진부령 ; 5.75 km 총 15.6 km. (포항 셀파산악회 자료)
3. 36회차. (최종 구간)
(미시령 ~신선봉) (4:00/ 6:05) 3.45km.
혹독했던 수해기간을 지나 한 동안 자숙한 후 마지막 대간길에 올랐다.
한계령과는 달리 미시령은 피해가 적어 빠른 복구가 이루어졌다.
새벽 졸린 눈을 비비고 미시령 굽이굽이 차는 올라 영마루에 올라 선다.
날은 맑아 저 아래 속초의 불빛이 살아 있는 듯 반짝인다.
고개 위에는 우리 대간꾼 말고는 차들만 서 있을 뿐 인적이 없다.
바람이 윙윙 몰아친다.
서울은 33도가 넘는 혹서임에도 이 곳의 바람은 곧 온 몸을 서늘하게 만든다.
바람 속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오늘이 대간길 졸업날이니 끝까지 몸 보존 잘 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종주항목이다.
문득 생각해 본다.
백두대간 ‘縱走’인가? ‘完登’ 아니면 ‘完走’인가? 아니면 겸허히 ‘踏山’이라 해야 할까?
단어들이 마뜩치가 않다.
아무튼 이제 이곳 미시령 떠나 진부령에 닿으면 대간의 남쪽길은 다 걷게 된다.
시작이 半이라더니 정말 반이다.
자 이제 출발이다. (4:00)
시인 황동규님은 이 곳 미시령 큰 바람 앞에서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없이
흔들렸다는데 우리 대간꾼들은 어느덧 650km를 걸어 온 튼튼한 다리로 흔들림 없는 출발이다.
/ “미시령 큰 바람” - 황동규.
아 바람
땅 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 포기 하나
경전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나는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미시령 큰 바람 중 제 1련 ) /
대간꾼이야 살다가 이렇게 흔들리거나 허덕이는 날이면 배낭 메고 대간 품으로 들면
씻기움 받고 돌아갈 수 있으련만 이 시인은 어떻게 풀었는가 모르겠다.
미시령 북녘 경사면으로 접어든다.
다행스럽게도 풀에는 이슬이 맺혀 있지 않다.
오늘은 지난 주 이미 이 길을 예습한 이천 이상만 선생이 선두를 선다.
다행히 바지와 등산화 적시지 않고 새벽 첫길을 낼 수 있다.
곧 경사면을 올라 주능선에 닿는다. 헬기장의 흔적인지 작은 공터가 있다.(4:05)
능선길 뒤쪽 아래로 차 한대가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인다.
어둠 산 속 가운데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무언지 외로움 같은 느낌을 준다.
그 곳은 첩첩 산중인 줄 일았는데 마을이 가까이 있었는가..
상봉으로 향하는 능선길은 돌이 많이 깔려 있는 길이다.
산은 큰 봉우리가 갈라져 내려 큰 바위 너덜이 되고, 다시 이것들이 세월과 風雪에
깨어져 이처럼 돌이 된다.
그런 산은 꽤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다.
잠시 개활지 같은 이 능선길이 끝나니 상봉으로 오르는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고
비로소 숲이 우거진다.
미시령 826m에서 상봉까지는 400m가 넘는 고도를 올라야 한다.
길은 북으로 향하니 우리의 우측으로는(동쪽) 숲 사이로 멀리 속초의 밤, 불빛이 반짝인다. 대행히 새벽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 일은 없다.
얼마 후, 시야 터진 바위를 지나 넓지는 않으나 평평한 지형이 잠시 나타나고
이 곳에는 샘물이, 박아 놓은 파이프관으로 졸졸 흘러 내린다. (4:35/4:40)
잠시 숨고르며 컾에 물 한 잔 받는다.
물은 그다지 차거나 달지는 않다.
그러나 비박하는 이들에게는 물과 야영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일 것 같다.
길은 계속 오른다.
전망바위가 나타난다.(4:50) 일부러 바위로 다가가 오르지는 않는다.
아직은 시야가 캄캄한 상태이니 달리 전망 있을 리 없다.
곧 이어 너덜이 나타나는데 지나 온 구간 황철봉과 다를 바 없다.(4:55)
큰 바위들이 예리하게 깨어져 角을 세웠으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미시령에 불던 큰바람은 이 곳에서 더욱 거세다.
날카로운 바위각 위에 섰는데 바람까지 부니 중심이 자꾸 무너진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네 발로 균형유지한다.
표지 리본도 매어 있지 않은 너덜에서 발 아래만 신경쓰다 보니 기어코 길을 잃고
알바를 하고 만다.
이렇게 헤매다가 간신히 바위 위에 그려진 화살표를 찾아 상봉(1239m)에 오른다.(5:10/5:15)
모처럼 시야가 시원스레 틔인다.
정상에 세워 놓은 작은 돌탑에 바람은 세차게 부딪친다.
표지석은 없고 누군가 붉은 페인트로 조그맣게 ‘상봉’이라고 써 놓았다.
백중 지나 일그러지기 시작한 하얀 달이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져 걸려 있다.
寒氣가 느껴지려 하니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봉우리 뒤로 이어진 가파른 하산길을 로프를 의지하여 내려 온다.
꽤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암봉들과 만난다.
동해가 손바닥인 양 가까이 보인다.
대간길을 걸어 오면서 東海가 보이는 많은 봉우리나 능선길을 걸었건만 새벽 안개로 제대로 동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윽고 길이 완만해지는데 동자꽃과, 오리방풀인가 산박하인가 키가 훌쩍 커 버린 연보라빛 꽃들이 가는 길을 막는다.
꽃 몇 개 따서 코에 대니 박하향이 은은하다.
8월, 여름의 한 가운데라 온갖 풀들이 깊이 우거져 있다.
우거진 풀 사이 길의 흔적도 가려진 안부 고개길에 도착한다.
화암재(禾巖재)이다.(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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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재.
좌로는 내설악 용대리 쪽 마장터로 이어지고 우로는 미시령 아래 화암사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라 화암재라 했다.
마장터로 이어지는 좌측길은 완전 풀에 뭍혀 버렸고, 그나마 오른쪽 화암사로 내려가는 길은 형태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에는 세 개의 샛길에 해당하는 고갯길이 있다.
제일 남쪽이 화암재, 중간이 샛령(사이령, 대간령), 제일 북쪽이 알프스 스키장 옆
흘리령이다.
화암재는 화암사와 마장(馬場)터를 잇는 민초의 길로서 역사의 어느 한 구석에도 그 흔적이 없다.
다만 이 고개 이름을 있게 한 화암사의 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다
우선, 화암사는 ‘설악산 화암사’가 아니라 ‘금강산 화암사’라 부른다.
화암사의 본래 이름은 華嚴寺이다.
신라적 진표율사가 華嚴經을 說했기에 화엄사인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화암사가 되었다.
이 절 뒤 신선봉 쪽으로는 수암(秀:빼어날 수/ 穗: 이삭 수)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옛적 이 화암사에는 도를 닦는 두 스님이 공부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공부한 나머지 양식을 동냥하러 마을로 내려가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래서, 두 스님은 간곡히 기도드렸다.
그날밤 꿈 속에서 보살님인가 허연 수염 기르신 분인가가 나타나 수암(穗岩:이삭바위?)에 있는 작은 구멍을 세 번 두드리면 두 사람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쌀이 나올 터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일러 주셨다.
덕분에 열심히 공부해서 이 스님들은 득도 하였다 하는데..
(한편, 또 어느 욕심 많은 스님이 이를 냄새 맡고는 욕심껏 두드려서 망쳐 놓는 異說 수암바위 전설도 있다.)
이렇게 해서 수암은 쌀과 관련이 있기에 수(穗) 字 대신 벼 화(禾) 字 禾岩이 되었다는데 그런 연유로 화엄사는 수암사가 되었다가 다시 화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분명 ‘화엄사’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 ‘화암재’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화엄재(수암재)였을 것이다.
최근 자료에는 穗岩도 내력을 잊은 이들이 바위가 멋있어서 그랬는가 빼어날 수(秀)로 탈바꿈시켜 秀岩으로 쓰고 있으니 조만간 그렇게 굳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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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봉으로 오르는 길도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다.
잔 나무가 많아 가는 길 다리를 자주 찌른다.
숲길 나무들은 크지 않으나 빽빽하다.
나무가 끝날 즈음 심한 너덜이 나타나고 그 끝으로 빼어난 폼을 자랑하는 암봉들이 있다. 그 곳이 신선봉이다.
지난 겨울 눈과 얼음 쌓였을 때 이 너덜을 지나느라고 깜깜한 밤, 헤드 랜턴 아래서 기듯이 신선봉에 올랐던 생각이 난다.
모서리마다 얼어 붙었던 얼음은 얼마나 미끄러웠던지.. 쌩쌩한 한 겨울 바람은..
그 때에 비하면 오늘은 거저 먹기다.
바람에 흔들리는 몸 균형을 잡으며 드디어 신선봉 위에 선다.(6:05/6:15)
모자가 대책없이 날아간다.
그래도 정상에 서서 동해를 바라 본다.
이미 해도 아침 안개 사이로 많이 떠 올랐다.
달도 아직 서남쪽 하늘에 하얗게 보인다.
신선이 따로 계신가? 이 봉우리에 앉아 해와 달을 함께 보면 신선이지.
이 곳에서는 울산바위도 바로 발아래 보인다는데 아침안개에 뭍혀 보이지를 않는다.
일행이 모여 대간 졸업사진을 찍는다.
구름이 날려 사람 모습이 안 잡힌다고 우리의 성실한 찍士 재용님과 바람소리님이
힘들어 한다.
얼굴은 안 나오면 어떠리. 신선들 定座하신 실루엩만 잡히면 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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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산줄기.
흔히들 신선봉은 금강산 12,000 봉 중에서 최남쪽 봉우리라 한다.
뒤집어 보면 이 곳부터 금강산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선봉 아래 화암사는 ‘금강산 화암사’라고 일컫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소백산 부석사’일 것 같은데 영주 부석사도 ‘태백산 부석사’로 부른다.
고치령 지나면 태백산이라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이 곳 또한 그런 느낌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선봉에서 비롯하여 칠절봉, 둥글봉(동굴봉), 향로봉도 모두 금강산의 봉우리로 보고 있기도 하다.
설악산 산신령님이 들으시면 얼마나 섭섭하실까?
향로봉 서쪽 양구 펀치볼 위 加七峰(홍천 갈전곡봉 옆 가칠봉은 加漆峰임)도 금강산
12,000 봉 중 7개는 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가칠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옛 노인네들이 한국의 명산은 금강산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요즈음 학생들 수학여행을 설악산이나 경주로 가듯이 80대, 90대 우리 부모님 세대
수학여행 사진을 보면 금강산 만폭동 아래에서 찍은 사진을 보게 된다.
그만큼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는 금강산이 그 때 사람들 생활과 가까웠다.
아, 금강산.
빨리 길이 열려 대간길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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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봉~ 진부령) (6:15/11:20) 12.15km.
신선으로 살기도 잠시, 바람과 한기를 피해 다시 너덜을 밟으며 신선봉을 내려 온다.
산오이풀들이 훌쩍 자라 올랐는데 붉은 자주빛 꽃술들이 늘어졌다.
모싯대도 연보랏빛으로 부끄럽게 고개 숙이고 있다.
제법 위용을 뽐내는 길가 암봉을 지나 길은 고도를 낮춘다.
심히 험하지 않은 암릉길이 오히려 신선봉의 품위를 지키는 듯하다.
내리막의 끝, 이제부터는 거의 고도 변화 없는 능선길이 시작된다.
능선길은 자그마한 키의 철죽, 싸리, 참나무, 소나무..
시야가 틔여 있어 구릉과 계곡 산의 모습이 시원스럽게 모두 눈에 들어 온다.
이제 곧 도착할 샛령(대간령)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의 낮은 지형이 녹색의 선으로 길고 선명하게 이어져 있다.
흙길의 능선은 편안하게 우리를 인도한다.
능선도 끝나갈 즈음 헬기장이 있다.(7:05)
이제 길은 더 고도를 낮춘다.
길가에는 마타리들이 노란 꽃을 피우고 훌쩍 키가 자라 있다.
숲과 풀이 우거진 안부에 옛 고개길이 있다. 샛령이다.(7:27/8:07)
풀은 우거졌으나 고갯길의 흔적은 완연하다.
고갯마루 무너진 성벽 같은 돌무더기에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돌무더기. 아마도 서낭당의 흔적이든지 (혹은 주막터의)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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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령.
1. 이제 대간의 고갯길 중에서 이만큼 옛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고갯길도 없을 것이다.
어느새 대간령(大間嶺)이라고 국적없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이 고개 이름은
샛령(사이령, 새이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교’를 ‘핵교’라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아마도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고개라고 그리 부르지 않았나 한다.
샛령(사이령)에서 내륙쪽 용대리로 내려 가는 길에 작은 고개가 하나 더 있다.
옛날 ‘된박재’라 부르던 고개라는데 일제 때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創地改名되어
된박재는 小間嶺(작은 사이령)이 되고, 본디 사이령(샛령)은 大間嶺(큰 사이령)이
되었다 한다.
얼마나 이뿐 이름들인가?
무엇이 그리 되었기에 ‘된박재’이며 높은 놈들 보기 싫어 민초들이 살짝 사잇길로 넘어 다니던 샛령. 소간령, 대간령이라니..
대간꾼만이라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험한 세상 살다 보니 우리는 돈 되는 일 아니면 너무 버려 두는 것 아닌지..)
2.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고개 이름이 소파령(所破嶺), 일명 석파령(石破嶺)으로
간성현 서쪽 50리에 있다고 했다.(在郡西五十里)
고개 이름 石破에서 알 수 있듯이 바위 부서진 너덜이 근처에 많았음을 감잡을 수 있다.
한편 간성의 역사 지리를 적은 水城誌에는(간성의 옛지명이 수성-水城/穗城) 고개 이름을원기령(院基嶺)이라 하였다 한다.
이 고개의 동쪽 (간성쪽)에는 도원리가 있는데 이 마을에 예전에는 사자원(獅子院)이라는
공공여관이 있었기에 여기서 비롯된 고개 이름이었다.
(여지승람에는 사자원이 간성군 서쪽 4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보면 사자원에서
샛령은 10리가 되는 셈이다.)
한편 흥미로운 일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미시령(미시파령/여수파령..) 사이령(소파령/석파령)은 기록되어 있는데 큰 고개인 진부령은 기록이 없다.
이 때(여지승람은 1530년-중종 25년)까지 진부령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 쪽 고갯길은 公路는 미시령, 민초의 길은 사이령이었다.
3. 민초들의 길 사이령은 어떤 고개였을까?
사이령의 고개 아래 양쪽 마을은 동쪽은 도원리 서쪽은 마장터이다.
동해(간성)의 해산물과 인제 원통 場의 농산물과 임산물은 마꾼들의 말짐에 실리고, 선질꾼들의 등짐에 얹혀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사람들이 들끓는 곳에는 마을이 커지고 주막이 들어서고 북적거린다. 말을 먹이는 마방도 생긴다.
이 고갯마루 서낭당에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그 때는 간성이 양양군에 속했음) 소잡아 祭를 올렸다 한다.
마을들은 얼마나 번성했는지 도원리는 언제나 흥청거리고 알부자들이 많았다 한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개로 오르는 길에 민가들이 남아 있었다 하는데 미역과 생선과
소금을 지고 넘는 선질꾼의 구수한 소리 한마디 없고 우거진 풀 사이 길의 흔적만이
마음 쓸쓸하게 한다.
문득 바람결에 한가락 들려오길 상상해 본다.
‘ 돌산령 달산령 선질꾼 떴다.
재작년 애기 갈보야 술 걸러 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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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대가리 없는 대간꾼들은 도시락에 맹물 마시고 또 길을 나선다.(8:07)
더구나 고개 아랫마을 도원리에는 그 나마 소득원이었던 송이밭을 고성산불이
모두 걷어 갔으니 대간꾼 마음에도 찬바람이 분다.
이제 이 고개에는 넉넉한 삶은 없고 우거진 풀과 생활에 쫒기는 아래 마을만 남았을 뿐이다.
어느 날 늦가을이나 이른 봄 용대리에서 황태국으로 몸 덥히고, 마방터 지나 사이령
넘어 도원리로 내려가 보아야겠다.
사실 대간길 지나며 아쉬웠던 것은 민초들이 넘나들었을 고갯길을 매양 가로 질러 가는 일이었다.
그 때마다 소위 feel이 오는 고개는 얼마나 넘어 보고 싶었던지..
사이령을 경계로 설악산 국립공원을 벗어나 다시 오르막길을 치고 간다.
암봉이다 보니 정상부에 가까울수록 나무 수는 줄어들고 키도 작다.
봉우리의 경사면에는 두어 군데의 너덜지역이 원형탈모 부위처럼 자리잡고 있다.
능선길에 닿는다.
돌아보이는 신선봉과 그 너머의 봉우리들.. 사이령으로 이어진 골의 線이 완연하다.
잠시 너덜길 지나 암봉에 닿는다.(8:31)
길은 좌로90도를 꺾여 서쪽으로 향한다.
완만한 내리막이다.
편안한 안부를 지나(8:42) 만만치 않은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경사는 가파르지 않으나 길게 오른다. 땀과 인내를 요구한다.
역시나 그냥 돌려 보내지 않는, 대간길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訓育時間이다.
가르침의 끝은 있는 법, 드디어 시야가 훤히 트인 병풍바위(1058m)에 도착한다.(9:05/9:20)
병풍바위는 동쪽이나 남쪽은 그저 평범한 육산인데 서쪽과 북쪽은 바위가 병풍을 세운 듯 가파르다. 주위 깊게 살피거나 마산봉쯤 가서 뛰돌아 보지 않으면 이 봉우리 이름에 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 아래로 알프스리죠트와 흘리(屹里) 마을이 자리 잡고, 바로 앞쪽으로는 마산봉,
그 뒤 진부령 너머로는 향로봉의 긴 산줄기가 보인다.
이제 오늘의 대간길에는 달리 더 오를 곳도 없다.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과일도 한 쪽씩 먹고 바람도 맘껏 들이 마신다.
올랐던 길을 뒤로 10m쯤 빽하여 내려 와 방향을 북으로 잡는다.(9:20)
내려 오기를 잠시, 평탄한 능선길을 지나 마산봉으로 향한다.
능선길에는 주홍빛 동자꽃과 연보라 모싯대가 간간히 보인다.
이윽고, 병풍바위보다 고도가 조금 낮으니 힘 한 번 쓸 일 없이 마산봉(1052m)에 닿는다.(9:40/9:45)
작은 돌무더기 탑이 있고, 마산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목이 서 있다.
선행한 대간 종주자들이 감격에 겨워 두드리던 포탄껍데기를 종삼아 매달아 놓았던 쇠鐘은 누군가 떼어 버렸다.
650km 거리와 일 년 반이 넘는 시간을 걸어 와 종착점 진부령을 내려다 보며 두드리는
종소리, 이 또한 멋진 이벤트인데 아쉽다.
대간 마지막 峰에서 사진 한 장 찍어 둔다.
올라 온 길 잠시 되돌아 내려가 우향우 리죠트쪽 대간길로 접어든다.
갈림길에는 무슨 의미인지 ‘물굽이’라고 써 붙여 대간길 방향을 가리키게 해 놓았다.
가파르게 알프스스키장 절개지를 향해 내려 간다.
절개지를 힘들게 내려 가 스키장 리프트를 지나 간다.(10:12)
이 곳에서 대간길은 스키장공사로 깎여져 버렸다.
백두대간이 산꾼들의 관심에 떠오른 것이 10 수년밖에 안 되니 그 소중함을 모르고
그동안 파헤쳐진 대간길이 너무 많아 아쉽기 그지 없다.
택리지를 쓰신 이중환 선생이나, 산경표를 정리한 신경준 선생 같은 분들이 이미 조선시대에 백두대간의 중요성을 알렸건만 배고프고 무지한 이 땅의 후배들이 마구 망쳐 놓았으니 이 일을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모르겠다.
리죠트 뒤 조그만 (토끼?)사육장을 지나 산을 내려 온다.(10:10/10:20)
이제 더 오를 산은 없다.
이 곳은 리죠트의 뒷마당이다.
리죠트는 부도가 나서 그런지 콘도는 괴괴하다.
20년 전 몇 년간은 여름휴가 때면 이 곳에 와서 2~3일 씩 지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스키대여점과 가게, 펜션들이 자리 잡은 곳은 대부분 고랭지 채소밭이었다.
그 배추 한 포기 구해다가 멸치에 된장 풀어 국 끓이고, 배추쌈 싸 먹으면 정말 맛이 좋았다. 그 때 무지한 나는 이렇게 망가진 뒷산이 백두대간인지 알 지를 못했다.
백두대간이란 말도 그 때는 들어 보기 전이었을 것이다.
無知의 동의어는 勇敢인가 보다.
시멘트를 씌어 논 넓은 뒷마당을 지나 길로 접어든다.
포장길이 간성쪽을 향해 구불구불 내려 간다.
이 길로 간성 간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끝까지는 내려 가지 못하고 아마도 중간에 막혀 있을 것 같다.
이 길이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 기록된 ‘흘리령’일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흘리령의 동쪽끝은 간성으로 이어지고, 서쪽은 창바위 지나 용대로 이어지고 이어서 남교리, 원통, 인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제는 잊혀진 흘리령을 건너 논밭 사이로 들어 간다.
따가운 햇볕 아래 연병장에서 군인들이 축구를 한다.
군부대 위병소 앞을 지난다.(10:36)
다시 대간길은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右로 넘는다.
작은 둔덕 하나 넘으니 뜨겁게 달아 오른 시멘트 농로길이다.(10:40)
이 길에서 우향우. 달구어진 시멘트 농로를 따라 끝없이 간다.
길이 끝날 즈음, 비닐하우스들이 나타나는데 탐스런 피망이 오뉴월 거시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농가 앞마당에 멍멍이가 낯선 이들을 향해 맹렬히 짖어댄다.
그래 짖거라. 이제 삼복도 다 넘겼으니 네 세상 아니겠느냐.
농가를 지나니 끔직한 시멘트 농로도 끝나고 길은 임도로 접어든다.(11:00)
아래에서 올라 오는 열기는 없으나, 햇볕 내려 꽂기는 별 차이가 없다.
잠시 후 잘 지은 연수원 건물 같은 벽돌색 건물과 만난다.
비워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입구에는 ‘진부령 농원’이라고 씌여 있다.(11:06)
임도의 끝 무렵에는 중계소와 같은 철탑이 서 있다.(11:10)
이제 마지막 풀숲에서 산딸기 따 먹고 아스팔트 포장길을 향해 절개지를 내려 간다.
포장길 한 구비 도니 진부령이다.(11:20)
무덤덤하다.
가슴도 뛰고 눈물도 난다는데 도시 알 수가 없다.
- 대간길 종주는 진부령 도착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 온 길 그 시간 시간에
서려 있는 느낌과 땀과 함께 한 이들의 끈끈한 나눔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간 샛된 모습으로 나와 대간길에 나섰던 내 배낭 배낭자는 어느덧 나와 수많은 밤을
지냈으니 차마 낭자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고, 생생하던 등산화도 늙은이 뱃가죽처럼
늘어졌다.
배낭과 스틱을 진부령표지석에 기대어 놓고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드린다.
배여사, 그 동안 수고 많으셨오. 어느새 情도 많이 들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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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령(陳富嶺)
1. 진부령은 이제 關西와 關東을 넘는 고개 중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이 고개 북쪽부터는 민통선으로 이어지니 민족의 가슴 아픈 고개이다.
이 고개는 1632년(인조 10년) 役僧들의 울력으로 뚫은 비교적 최근에 개통된 고갯길이다.
아마 이 고개를 뚫으면서 고개 아래 절집 건봉사의 승려들을 혹사시켰을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國師나 王師 등, 나라의 최고위층에 속하던 승려의 지위가 성리학을 국시로 하던 조선시대에는(신돈을 요승으로 몰아 반란의 당위성을 내세웠으므로) 천민의 신세로 전락했으니 이렇게 부역에 끌려 다니게 되었다.
진부령은 넓고 편안한 고개이다. 간성의 해산물과 인제, 원통의 농산물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장터였다.
새벽마다 물물교환의 場이 열리니 朝場(아침장)-> 조장이-> 조쟁이라 불리던 곳이다.
아마도 고개이름은 아랫마을 진부리에서 비롯된 것같다.
옛자료에는 珍富嶺인데 요즈음에는 슬그머니 陳富嶺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 연유는 알 수가 없다. (국립지리원 발행 1/50,000 지도에 보면 실무진의 실수가 그대로 남아 엉뚱하게 둔갑한 지명이나 글자가 많은데 이 곳 또한 그리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
2. 진부령을 사이에 두고 옛자료에 보이는 산과 고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대동여지도 기록은 마기라산(麻耆羅山)-> 珍富嶺-> 흘리령-> 연수파령(미시령)이며,
산경표 기록은 珍富嶺-> 磨耆羅山-> 흘리령-> 미시파령(彌時坡嶺 또는 麗水坡嶺)이다.
산경표의 기록대로 해석하면 마기라산은 현재의 마산봉이 되며, 흘리령은 사이령(대간령)이 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마기라산은 한결 같이 간성의 鎭山이라 했다.
간성의 진산은 현재의 ‘향로봉’이다.
따라서 향로봉의 옛이름은 마기라산이 되며, 안타깝게도
산경표는 이 부분에서 miss를 범하고 있다.
3. 고성과 간성.
간성에 가면 고성이라 하고, 고성에 가면 간성이라 하고..
진부령 넘어 가면 누구는 고성이라 하고 누구는 간성이라 한다.
도시 뭔 말씀인지 알기 어렵다.
결론은 고성군 간성읍이다.
옛지도에 보면 양양군 위에 간성군이 있고, 간성 위에 고성군이 있다.
한국전쟁 후 고성군은 둘로 나뉘어졌다.
정작 고성군의 군소재지 고성읍은 북쪽 땅으로 남았고 고성군의 남쪽부분은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과 북에 각각 고성군이 있다.
옛 간성군의 대부분 땅은 속초시가 되어 간성군은 없어지고 간성읍을 포함한 진부령 주변(흘리)은 남녘 고성군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간성군이 없어진 간성읍은 (남녘) 고성군에 속하다 보니 외지인은 계속 헷갈리는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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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길 수고하셨습니다.
2. 졸업식날 소중한 먹거리와 곡주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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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감사드립니다.
책걸이 떡을 해서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요... 대간길을 읽고 나니 졸업이라는 말이 생생해 지네요.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