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悟道頌)
一太空間無盡藏일태공간무진장 仄仄平平平仄仄
寂知無臭又無聲적지무취우무성 仄平平仄仄平平
只今聽說何煩問지금청설하번문 平平平仄平平仄
雲在靑天水在甁운재청천수재병 平仄平平仄仄平
<四溟大師>
이 게송(偈頌)은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장(藏)은 거성(去聲) 양통(漾統) 운족(韻族) 이고, 성(聲)은 하평성(下平聲) 경통(庚統) 운족(韻族)이고, 병(甁)은 하평성(下平聲) 청통(靑統) 운족(韻族)이다. 이 오도송(悟道頌)은 압운(押韻)도 측성(仄聲)인 거성(去聲) 운(韻)과 하평성(下平聲) 중에 두 운통(韻統) 운족(韻族)으로 작게(作偈)를 하였고, 평측(平仄)도 근체시(近體詩) 작법에는 안 맞는다.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법제자(法弟子)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승병(僧兵)을 이끌고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국난(國難)을 막아 호국불교(護國佛敎)를 한 산 증인이시다. 밀양표충사(密陽表忠寺) 송운대사영당비문(松雲大師影堂碑文)에 보면 선조(宣祖)27년 4월과 7월, 12월에 세 차례로 일본총사령관(日本總司令官)인 가요마사(加籐淸正)을 진중(陣中)에서 만나 조선침략(朝鮮侵掠)의 부당성(不當性)을 말하자, 가요사마가 사명대사께 뭉렀다. 조선에는 보배가 있습니까? 사명대사께서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습니다.
조선의 보배는 일본에 있지요, 어찌하여 조선의 보배가 일본에 있단 말이요? 조선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장군의 머리를 베고자 합니다. 장군의 머리가 그러니, 보배가 아닙니까? 사명대사의 당당한 말을 듣는 가요마사는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손으로 칼 자루를 잡았으나 사명대사의 기개에 감탄하고 손으로 자기 목을 만지면서 껄껄 웃고 휘하 장수들에게 사명대사를 가리키면서 조선의 고승(高僧) 이시다. 잘 모셔라. 라고 경의를 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밀양(密陽) 무안면 고라리에서 1544년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양친 부모(兩親父母)님을 잃고, 김천(金川)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했다.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선조 8년(1575) 32세 나이로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서 가르침 받아 각성(覺性)했다. 이 일화에 설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 사명대사가 자기 재주를 과시하다가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을 벌인 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586년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은 게송이 위 오도송(悟道頌)이다.
사명대사는 오대산(五臺山) 영감사(靈鑑寺)에 잠시 머물다가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逆謀事件)에 연루(連累)가 되어서 옥고(獄苦)를 당했다. 다행인 것은 유생(儒生)들이 무죄항소(無罪抗疏)로 풀려나서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서 수행정진(修行精進) 하다가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을 백성들을 구출하고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서산대사(西山大師) 격문(檄文)을 받고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스승 서산대사와 합류하여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서 승병(僧兵) 2,000명으로 평양성(平壤城)을 탈환(奪還)하게 된다. 선조대왕은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사명대사(四溟大師)를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임명한다. 1594년 4월에는 서생포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가등청정과 회담을 하고 적장(敵將)의 전의(戰意)를 꺾는다. 그 후로 7월과 12월과 3월에 다시 적장과 만나 잘못된 조약(條約) 낱낱이 열거하고 침략국의 죄상을 열거 척파 했다. 대사의 공로가 크자, 선조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종이품(從二品) 벼슬을 내렸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수행하던 중에 스승이신 서산대사(西山大師) 입적(入寂) 부음(訃音)을 받고, 묘향산(妙香山)으로 가던 중에 선조 대왕이 사명대사를 일본사신(日本使臣)으로 국명(國命)을 받고 일본으로 가서 8개월간 협상과 설득을 통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전란(戰亂) 중에 잡혀온 조선인 포로(捕虜) 3,000명을 데리고 귀국(歸國)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승병(僧兵)의 구국일념(救國一念)의 활약상(活躍像)은 공(功)이 너무 많고 크다. 책으로도 만들면 수십 권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연구 자료를 발췌하여 기록으로 남겨 학교 교육 호국 교재로 활용할 것을, 차제에 건의하여 본다. 대사께서는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산내(山內) 암자(庵子) 홍제암(弘濟庵)에서 노병(老病)의 몸으로 노년을 보내셨는데, 광해군은 조정에서 약을 지어 보냈고, 세수(歲數) 67세 법랍(法臘) 53세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신 뒤로 열반에 들었다. 대사께서 입적(入寂) 소식을 듣고 광해군은 실록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인(山人) 유정(惟政)은 선조 때 몸을 잊어버리고 난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니 참으로 의승(義僧)이라고 할 만한데, 지금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 장례에 필요한 목포(木布) 등의 물건을 적당히 헤아려 제급(題給)토록 하라. 고명했다. 홍제암에는 사명대사 부도비(浮圖碑)가 200년 만에 세워졌다. 숭유배불(崇儒拜佛) 시대지만 대사(大師)의 공이 워낙 컸음을 알 수가 있다. 오늘은 사명대사 오도송을 평측운(平仄韻)에 맞추어 반추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