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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17. 예수님께서 시험을 극복하신 비결 (눅 4:1-13)
◆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다
(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다. 인간이 된 이상 마귀의 시험을 피하지 못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러할진대 우리가 예외가 될 순 없다. 우리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세례받으시고, 성령 받으시고 시험에서 이기신 이 모든 과정은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본이다. 우리가 자세히 살펴서 우리 주님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귀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고, 꽤 부지런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시험의 내용은 참으로 많은 교훈을 담고 있지만, 나는 그 시험의 내용보다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험을 극복하셨는지 그것을 배우길 원한다. 우리가 받는 시험은 수천 가지나 될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학생 때, 주초고사,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끊임없이 시험에 시달렸다. 시험이 없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했지만, 졸업하기 전에는 그런 행운은 없었다. 우리도 죽기 전에는 시험을 피할 길이 없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은 시험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받은 마당에 어떻게 시험이 없겠는가? 그 기도는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잘 이기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다.
◆ 시험을 이기는 방법 1
시험을 이기는 첫 단계는 시험을 시험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2)라는 말씀은 마귀의 시험임을 알아차리셨음을 의미한다. 마귀는 꼭 '나는 마귀요'라고 소개하며 다가오지 않는다. 혹은 친한 친구를 통해서, 혹은 배우자를 통해서, 혹은 자식을 통해서 다가온다. 예수님에게는 베드로를 통해서 다가온 적도 있다(마 16:23). 광명의 천사로 다가올 수도 있고(고후 11:14), 하와에게 뱀으로 다가왔듯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다가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이상한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괴로워한다. 그 생각을 안 하려고 머리를 흔들고 몸부림을 치지만 더 강력하게 떠오른다. 본래 강박관념을 가지면 오히려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이상한 생각이 평소에는 잘 안 떠오르는데 묘하게도 기도할 때만 되면 꼭 떠올라서 기도를 못 하게 한다. 그게 시험이다. 내가 주님의 온유함에 큰 은혜를 받아서 내 마음에 온유함이 풍성해질 즈음에 갑자기 배우자가 내 속을 긁는다면 그게 바로 시험이다. 벌컥 화를 내면 마귀는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시험으로 알고 대처하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시험을 시험으로 인식해야 할 때 우리는 환경과 나를 분리할 수 있으며,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다. 시험일 뿐이다. 그것을 염려하고 없애려는 강박관념이 더 위험하다. 오만가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가 들리는 지옥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니다. 나만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고요하고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연습할 좋은 기회다.
◆ 시험을 이기는 방법 2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주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실 때, 제일 먼저 사용하신 방법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주님은 천재조차 상상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마귀와 싸울 때는 자기 지혜로 물리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신 본이다.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심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심은 곧 성경의 기록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계셨다. 우리도 동일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믿음부터 확고해야 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믿음을 깨버리려고 안달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신학교 신학 교수에게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믿음이 깨진 자들은 반드시 신앙이 무너진다. 물론 가면을 쓰고 여전히 교회에서 목회도 하고 상담도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안을 다 잃은 자다.
또한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심은 예수님조차도 마귀를 대항할 때 자기 지혜나 권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실수하는 것은 내 지혜로 마귀와 토론해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마귀는 토론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 자체가 헛점 허점투성인데게 영적인 존재를 이길 수 있겠는가? 나는 마귀와 토론하다가 나이 육십이 넘도록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았다. '기록되었으되'라고 대처하는 것이 최고다.
과거에 내가 마귀의 미혹에 마음이 혼란해진 적이 있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심히 불안해졌다. 그때 그때 지푸라기라고 잡으려는 심정으로 시도한 것은 말씀을 외운 것이었다. 그냥 무조건 외웠다. 산상수훈(마태복음 5, 6, 7장)을 통째로 외웠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마치 깨끗한 물로 몸을 씻은 것처럼 내 영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경험이다. 이게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다. 내친김에 로마서도 마지막 장만 빼고 다 외웠다. 빌립보서도 외우고, 성경의 중요장이라고 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외웠다. 실제로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소리 내서 외웠다. 그때처럼 충만한 적이 없다.
어떤 문제집 이름이 '닥공'이라고 해서 무슨 뜻인가 했다. 알고 보니 ‘닥치고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닥암'이다. ‘닥치고 암송해라’.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는 생각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고 닥치고 암송해라. 강박증, 염려증, 낙심, 좌절, 심지어 정신병 모두에서 건지는 방법은 닥치고 외우는 것이다.
읽고 외워야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라고 할 것 아닌가? 그냥 머리로만 대강 알고 있으면 마귀가 덤빌 때 '기록되었으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싸우는 자를 마귀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내 지혜, 내 명철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와 지혜로 싸우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말자. 내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 싸우려면 성경을 읽고 암송해야 한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암송하자.
주님, 내가 기력이 다 떨어져서 내 머리가 멈추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놓지 않겠습니다. 암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18.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다 (눅 4:14-21)
◆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다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세례받고, 시험을 모두 이기신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었다. 갈릴리에서 사역이 시작된 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다.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사 9:1-2)
이사야는 '큰 빛'이라고 표현했고, 사도 요한은 '참 빛'(요 1:9)이라고 표현했다. 빛 되신 그분께서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공적 사역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기간은 3년이 채 안 된다.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우리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 예언의 성취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 2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셨다. 오늘 예언을 살펴보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이 말씀은 정말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할까? 아니면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할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신 적은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문자적 성취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척 갈급할 때 예수님을 만나서 만족을 얻은 사람들은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 문자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감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죄에 포로되었다가 자유를 체험한 자들은 이 말씀이 확실히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고백할 것이다. 이것이 예언의 신비다. 사이비 교주들처럼 자기 상황에 맞게 궤변으로 꿰맞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성취란 말이다.
비유적이면서 문자적인 이 오묘한 성취를 어떻게 설명할까? 많은 사람이 엉터리 풍유적(allegoric)해석을 감히 '영적'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하며 정당화한다. 그러나 영적(spritual)성취란 물질세계만큼이나 분명히 실재하고 있는 영적 세계에서의 문자적인 성취를 의미한다.
모든 예언을 비유적으로만 해석하는 자들은 성경을 자기만 해석할 수 있는 이상한 책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자기 입만 쳐다보게 만든다. 결국 그가 스스로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는 거짓 선지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모든 예언을 가시적 세계의 문자적 성취로만 해석하는 자들은 예언을 메마르고 감동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생각해보라 오늘 본문의 예언이 단순히 눈 먼 자가 고침을 받게 된 것이라면 신체적 장애인들에게는 은혜며 우리의 눈에는 신기하겠지만, 여기에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모든 거듭난 신자들이 '내가 소경이었지만, 이제는 본다 (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면서 깊이 공감함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자신이 정말로 보게된 것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토록 예언은 가시적 세계에서는 비유적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완전히 문자적이다.
예언이 비유적이면서 문자적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이사야의 예언 중에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20)란 말씀이 있다. 문자적인 성취만을 고집하는 자들은 이것을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라고 말한다.
광야에 물을 내는 것이 단순히 문자적인 성취라고 하면 우리에게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그것은 수천 년 전에서나 기적이었지, 지금은 과학으로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사야가 언급한 광야가 그냥 가데스 광야와 같은 곳이 아니라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방을 의미한다면 이 예언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며, 얼마나 감동이며, 은혜가 되는가? 또한 광야의 물을 냄으로써 들짐승이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이 문자적으로 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들짐승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예배하는 존귀한 자들이 된다면 그것은 감동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막 7:27)라고 하신 것이 단순히 그 여자에게 모욕을 주신 것이라거나 그를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들짐승이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드디어 광야에 물이 터지고, 들짐승 같았던 우리들도 예배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다고 하셨다. 목마르지 않다는 말씀은 분명히 비유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정말로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음을 체험한다. 예언은 비유적인데, 성취를 체험한 자는 문자적으로 느끼는 이 오묘한 조화는 실로 감탄이다.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어두워진 세상 길을 주님 없이 걸어가다 나의 영혼 어두워졌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네.
주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 실패와 좌절뿐이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 영혼 눈을 보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보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보게 하소서. (CCM '에바다')
19.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시다 (눅 4:22-30)
◆ 나사렛 사람들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자라셨지만, 세례 받고 나서는 가버나움에서 사셨다(마 4:13). 그리고 얼마 후에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성경을 읽으시고 말씀을 전하시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란 이유는 자기 동네에서 평범하게 살던 청년이 갑자기 놀라운 사람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랍비로 살던가, 아니면 공부하러 오랫동안 동네를 비웠다가 나타났다면 몰라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자가 예루살렘을 한번 다녀오더니 수 개월만에 나타나서 예언이 응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자처하니 얼마나 놀라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힘 있고, 지혜로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마 13:54 표준새번역) 진리를 진리로 받고, 은혜를 은혜로 받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관심 외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만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씀을 트집 잡고, 배격하는 짓을 저지른다. 나와 다를 바가 없던 친구가 갑자기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그를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깎아내려야 위로가 된다. 주님, 제가 이런 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선생이 아니라, 판단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 - 백부장의 하인(마 8:5), 귀신들린 사람(막 1:21), 친구들에 의해 들려온 중풍병자(막 2:1-5) 등을 치료하심 - 을 나사렛 고향에서도 행해보라고 요구했다. 고쳐달라가 아니라, 고쳐보라는 요청이다. 배우려는 겸손이 아니라, 판단하려는 건방짐이다. 인간의 교만의 극치가 바로 이것이다.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 그 순간부터 인간은 은혜와 멀어진다.
예배에 대해 공부하고 나면 예배를 더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들을 판단한다. 찬양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나면 찬양을 더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자들을 판단한다.
교사 시절에 학생 전도집회에 초청받아서 갔다. 학생들 여러 명이 나와서 율동하면서 찬양을 인도했는데,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는 그들의 순수한 태도에 감동했다. 나도 마음을 다해서 함께 찬양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말씀이 끝나자 그 교회 전도사라는 분이 나와서 찬양팀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들을 했다.
자기는 찬양이란 이런 것으로 생각하며, 찬양팀이 지나치게 감정에 흐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둥.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전도 집회인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찬양하는 내내 팔짱 끼고 저렇게 판단하고만 있었단 말인가? 그 뜨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냉각되었고, 찬양 인도하던 아이들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전도사는 불 끄는 능력이 탁월했다.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 자신이 높여지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진리의 지식조차도 자신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자들이다. 그 알량한 지식으로 이것저것 판단하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판단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판단 받는 것을 거절하신다(롬 3:4).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건방짐이란 역겨운 것이다. 욥은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극심한 고난을 겪자 친구들의 미혹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을 판단하는 큰 죄를 범하였다. 그의 고난은 아마도 그의 깊은 속에 감추어진 자만을 드러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을 포함함을 기억하자.
◆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과 아무런 별 차이도 없는 자가 감히 자기들을 책망했다는 생각에 분노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갔다. 죽이려고 한 것이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진리보다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한 자들이 이렇다. 성도들은 진리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회개할 줄 아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남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전 4:3)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아무리 내가 볼 때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책망이 옳으면 회개할 줄 아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다. 너나 잘하라고 발끈하는 것은 성도답지 못하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발끈하다 못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고,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몰아갔다. 나사렛은 해발 375m 산에 있는 동네다(아래 사진 참조). 감히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다니 얼마나 무지막지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지나쳐서 나오셨다. 아마도 능력을 사용하신 듯하다. 천군을 12군단도 더 동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시면 누구도 못 건드린다.
주님, 제가 진리보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시기와 질투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십자가에 내 옛사람이 죽었음을 인정하고, 어떤 책망도 수용할 줄 아는 겸손함을 갖게 해주십시오.
20.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 (눅 4:31-37)
◆ 권위 있는 말씀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임을 의미한다. 권위 있는 말씀은 굴복하든지 반발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요구한다. 그러나 권위 없는 말씀은 사람들을 웃기고, 제법 감동도 줄 수는 있지만, 사람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십 대 청년 시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었다. 내 메시지는 제법 유창했지만, 아이들이 변화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집중력을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재미있는 예화를 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변화는 미미했다. 그런데 그 수련회에 어떤 형제가 와서 말씀을 전했는데, 천천히 말하는 그의 메시지가 졸릴만하고, 예화 하나 없어서 지루해할 만함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경청했다. 그리고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은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영적 분위기와 성령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재미도, 지식도, 성령의 권위도 없는데 주절거리며 오래 끄는 설교는 최악이다. 그것은 형제들을 고문하는 것과 같다. 메신저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고 듣는 자들의 분위기도 냉랭하면 50분 준비한 설교일지라도 10분만 하고 내려와라. 중간에 끊었다고 아무도 항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님께서도 그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자기 체면 때문에 길게 하는 것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겸손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옛 습관들은 종종 장황하게 한다.
주 예수님, 도와주소서! 제가 성령에 민감하게 해주십시오. 제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 귀신들을 쫓아내심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워낙 권세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기들을 멸할 힘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상대방이 워낙 힘이 세면 눈을 똑바로 치켜뜨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면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다.
호기심 많던 청년 시절에는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 여러 가지로 물어보곤 했다. '부처를 아니?' '내 친구다.' / '예수님을 아니?' '나와 상관없어' 신기했다. 성경 그대로 아닌가? 또는 귀신의 정체를 물어보곤 했다. 여러 귀신이 자기가 몇 년 전에 죽은 사람 누구누구라고 했다. 그럴싸했다. 그러나 어떤 귀신은 전혀 사람이 아닌 존재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 여러 경험과 성경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은 귀신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영을 표방하는 귀신들은 단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귀신들의 말을 토대로 신학을 세운 어떤 집단은 결국 사이비 이단이 되었다. 귀신에게는 말 시키지 말고, 어떤 말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그냥 더러운 똥파리나 개구리처럼 생각하라. 예수님은 귀신을 사람의 영으로 대하신 적이 없다. 명백하게 사단이라고 말씀하셨다(막 3:23). 그리고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지 귀신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귀신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매우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창고나 무덤 등지에 귀신이 있다고 상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라.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간 귀신들은 모두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구했다. 귀신들의 목적은 사람과 동물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그렇게 한가하게 폐가에 머물러서 휴가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인간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기억해야 할 일은 이 귀신이 꼭 미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을 지배할 순 없어도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성도들에게도 악한 생각을 넣어주고, 진리에 대한 트집 잡는 마음, 엉뚱한 강박이나 자살 충동, 음란한 생각이나 각종 두려움 등에 휩싸이게 한다. 베드로도 당했다(마 16:23). 누구도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격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는 귀신과 사단을 이기신 예수의 이름을 받은 자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서 담대히 귀신을 대적하고 억압받는 형제들을 해방시키고 승리하는 삶을 살자.
왕이신 주 예수님, 어두운 영의 공격을 잘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대적하고, 눌린 형제들을 도우며 날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21.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눅 4:38-44)
◆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숙소를 정하시고, 그 부근의 제자들을 모으셨을 때였다. 아마도 시몬 베드로의 집도 가버나움에 있었던 듯하다. 마침 거기에 와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당시에는 여자들의 경제 능력이 거의 제로였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가 예수님을 만나서 직업을 다 버리고 따르기 시작했다는 말은 장모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사건일 수 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렸는데, 예수님께서 한마디하시니까 나았다. 사위가 따르는 예수님은 정말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맞다.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39)라는 말씀은 장모의 마음이 예수님을 완전히 믿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아내와 함께 다니면서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 9:5).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서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 일일이 손을 얹으사 고치심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는 말씀은 감동이다. 본래 일반인들은 병자를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피부병 환자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터치는 환자들에게 충격이며 깊은 감동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문둥병자들에게도 손을 대시며 고치셨다(마 8:2-3).
병자를 위해 일일이 기도해주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젊었을 때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 기도했더니 병자가 낫는 것을 보고 본인도, 병이 나은 사람도 놀랬다. 처음에는 신이 났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점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분은 학교 교사였다. 퇴근하면 저녁에 집에서 할 일도 많은데, 툭하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는 것에 질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분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감당하기 어려우니 이 능력 거두어가시기를 구했다. 그 후에 신유의 능력이 없어졌다고 했다.
의사가 병자를 고치는 것이야 돈 버는 재미로도 할 수 있겠지만, 성도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문이 나면 밥 먹을 시간도, 개인적으로 쉴 시간도 없어진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그러했다(막 3:20). 긍휼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 그리스도임을 말하지 못하게 하심.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예수님은 몇 가지 점에서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단 귀신들의 입으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귀신의 더러운 입까지 빌릴 만큼 궁색하신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후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 들린 여자 점쟁이가 계속 쫓아다니면서 자기들을 편드는 것을 괴로워했다. 결국 참다못해 귀신을 쫓아냈다. 이 일로 무수히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감옥에서 간수와 그 가정을 전도할 수 있었다(행 16:16-31).
또한 예수님께서는 귀신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하셨는데(마 16:20), 이는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 이것이 병자를 고치시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측근들에게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셨지만, 대적들에게는 함구하셨다. 공개적으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질문해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 26:63). 이 마을 저 마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면 막상 그리스도임을 밝히지 말라고 하시니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병자를 고치심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임을 드러내신 것이며(요 14:11)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다(마 12:28).
승천하신 후에는 모든 성도에게 온 세계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다(행 1:8).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주님, 저를 복음 전하는 자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특권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영광스럽게 여기겠습니다. 저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