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8. 잊을 수 없는 김해지역장 시절
1 얼마 후 1962년 6월 4일, 축복을 받고 그다음 해 2월 15일 축복가정 임지인 김해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김해지역 역시 방 하나 식구 한 명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가정 임지는 영원한 임지로서 그 지역의 조상으로 뼈를 묻고 승리하라는 말씀이 계셨기에 제일 멋지고 참된 조상이 되리라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2 그러나 혼자의 몸도 아닌 신혼부부이고 보니 마을회관이나 향교를 찾을 수도 없었다. 생각한 끝에 읍에서 12km 떨어진 이북면 낙산 부락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백구섭 씨가 몇 년 전에 계몽 나왔던 곳이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3 우리 부부는 각자 임지에 있다가 이곳 김해에서 처음 살림을 시작하였다. 서로 임지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살림 준비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김해의 영원한 조상이 되어 산 역사를 이룩하려는 멋진 출발이 시골 사랑방 한 칸에서 이루어졌다.
4 혹시 지역장 회의가 부산에서 있게 되면 교통비가 없어서 자전거로 왕복 200여 리 길을 오가야 했다. 몸살감기 때문에 드러눕게 되는 날이면 약을 사 먹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인(박한희)이 임신 중일 때 며칠씩 굶주리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정말 미안스럽고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5 우리는 김해지역을 복귀하기 위해 김해읍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당장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우리 부부는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팔기로 했다. 결혼반지, 책, 시계, 옷 등 모조리 내다 팔았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하늘도 역사를 하여 우리를 도우셨다.
6 진영읍에 전도 나가있던 조수자 씨(120가정)가 찾아와서 이 말을 듣고 자기의 결혼 혼숫감을 몽땅 가지고 다니며 팔아서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해읍 부원동 750번지에 방을 얻어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방은 하나였지만 강당으로 사용할 마루가 있는 큰 집이었다. 2천5백 원 보증금에 매월 500원씩 세를 든 셈이다.
7 어느 날, 영세민을 위한 도로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고 보리쌀 다섯 되를 사다가 밥을 지어 소금물을 반찬 대신 먹으면서 끼니를 이어갔다. 어쩌다가 돈 10원이 생기면 건빵 한 봉지를 사다가 물 한 그릇에 몇 개씩 띄워서 건빵이 부풀면 사카린을 넣고 아침 식사를 대신하곤 했다.
8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생활이 계속되자 산모가 너무 굶주려 몸이 퉁퉁하게 붓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선교 역사에 굶어죽고 얼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런 생활을 계속했다.
9 우리는 이렇게 굶주림에 쓰러져 몸을 가눌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저녁이면 매일 강의를 하였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해 가며 전도하는 것이 생활 대책이었다.
10 그래서 어느 날은 보다 못해 ‘여보, 너무 고생스럽고 굶주려 힘겨우면 우리의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당분간 집에 가서 있다 오구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으면 편지하겠소’ 하였더니, 부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하는 말이 ‘수고도 고생도 같이 하다가 죽더라도 같이 죽어야지오. 고생과 수고는 당신이 더 하시면서요’ 하고는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만 통곡이라도 하여 가슴에 맺힌 심회를 풀고 싶었다.
11 1963년 4월 5일, 당시 이진태 경기지구장의 인솔로 120여 명의 경기도 원정대원들이 부산까지 천리 길을 걸어가는 도중 김해에 들렸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면서 교회에 들린 것이다.
12 따뜻한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연료도 없어 그저 멍청히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면목없는 죄송한 마음이 불현듯 일곤 한다.
13 이튿날 김해 지역에도 7명이 배치되어 오게 됐다. 그들의 발은 부르터서 피가 흐르고 굶주린 얼굴로 누렇게 떠있었다. 각 구역으로 임지를 배정받아 나갔던 대원들 중엔 자리를 못 잡고 지역본부로 되돌아와 며칠씩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솔잎으로 만든 미숫가루로 며칠간 연명을 하기도 했다.
14 이렇게 어려운 때에 순복음교회 임시 전도사로 있던 이기재 씨가 입교하여 김해지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집에 가서 대학 입학금을 가져와 월세로 살던 교회를 1만 6천 원의 전세로 바꾸게 되었다.
15 이 청년이 지역본부에 기거하면서 나와 함께 열심히 전도에 임하게 되자 학생들과 청년들이 많이 입교하였다. 그러나 교회 살림은 여전히 어려워 도로 공사장에 나가 일한 대가로 밀가루를 타다가 3개월 동안 소금만 넣고 밀가루를 풀어 만든 국물로 살아갔다. 얼굴은 누렇게 부어오르고 다리는 휘청거려 쓰러질 지경이었다.
16 1963년 7월, 전국적으로 이동 부흥회를 할 때 그간 입교한 학생과 청년 식구들이 시계, 반지, 스웨터 등을 전당포에 맡겨 경비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 부흥회 강사는 황인태 씨였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