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적으로 볼 때 칭의와 성화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칭의가 시작점을 알리는 것이라면 성화는 그 완성을 위해서 전 생애가 요구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칭의는 누구에게나 차이가 없겠지만, 성화는 질적 양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칼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시간적인 구원질서”가 아니라 “내용적인 질서”로 보았다. 칭의와 성화는 어느 것이 선행하느냐 뒤따르느냐를 다룰 문제가 아니다. 칭의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의미라면, 성화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칭의와 성화는 다른 동기를 가지지만 “하나의”(unitary) 사건이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humiliation)과 높이심(exaltation)이 동일한 것은 아니면서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칭의와 성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칭의는 상대적인 변화를 포함하지만, 성화는 참된 변화를 포함한다. 칭의는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변화지만, 성화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변화다. 칭의는 죄책으로부터 해방하지만, 성화는 죄의 세력과 죄의 뿌리로부터 해방한다.”
사실 웨슬리의 경우, 칭의와 성화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심과 성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화의 사건이 점진적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임한다고 보았으며, 회개 또한 이중적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회개와 성화의 과정을 모두 네 단계로 설명했다. 첫 번째. 칭의 전에 일어나는 회개가 있다. 이 회개는 “성령에 의해 각성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며, “율법적인 회개”에 속한다. 이 때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죄와 관계”한다. 두 번째는 회개를 경함한 사람이 “자기 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칭의에 이른다. 칭의는 일종의 “관계적 성화”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하는 것이지만, 아직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지는 못한다. 세 번째는 “성화의 부분이며 성화의 입구”인 중생의 사건이다. 이는 “모든 선한 기질을 마음에 심는 것”이며 “내적인 변화” 혹은 “내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마지막은 칭의 후의 회개다. 웨슬리는 이 회개를 “복음적인 회개”라 불렀고, “심령이 온통 죄에서 온전한 거룩함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내면적 죄와 관계”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회개의 사건이 칭의 후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구원”으로서 성령침례를 의미한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5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