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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현의 미담 일화
이원걸
(1화) 형의 다친 손을 보고 울었던 퇴계
둘째 형이 칼날에 손을 다치니 퇴계 선생이 (형을) 안고 울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 형은 손을 다쳐도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대답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 않지만, 피가 저와 같이 흐르는데 어떻게 손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퇴계 선생이 여덟 살 때의 일입니다. 둘째 형 해(瀣, 1496-1550)가 칼에 베어 손에서 피가 났다.
어린 퇴계 선생은 형 해의 손을 잡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가 기이하게 여겨 물으셨습니다.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이에 퇴계 선생은 양 볼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훔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형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 울지는 않습니다만,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형의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자신의 옷깃으로 감싸주는 것이었다.
그제야 형의 손가락에서 흐르던 피는 멈추었다.
퇴계 선생의 옷자락에는 형의 피가 묻어 얼룩이 져 있었다.
형은 어린 아우의 착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두 형제의 아름다운 행동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에도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가슴에 꼭 안아주었다.
문득 제 세상으로 떠난 남편이 그리워졌습니다.
“여보, 당신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기들이 이렇게 착하게 자라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곱고 바르게 자라도록 늘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세요.”
훗날, 위대한 인물로 성장한 퇴계는 어릴 때부터 이처럼 남의 아픔과 입장을 헤아려 살피는 착한 마음을 가졌다.
이러한 인품과 훌륭한 학문은 후세 사람들에게 큰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어려움을 살피는 착한 마음을 퇴계 선생은 어려서부터 지녔으며 이를 실천했다.
仲兄, 刃傷手, 先生抱泣. 母夫人曰, 汝兄, 則傷手不泣, 汝何泣耶. 對曰, 兄雖不泣, 豈有血流如彼, 而手不痛乎.
출처 : ≪퇴계집(退溪集)≫(李滉, 1501-1570)
* ≪퇴계집(退溪集)≫ : 조선 전기의 대유(大儒) 퇴계 이황(李滉)의 문 집으로, 목판본이다. 원집(原集) 49권, 별집(別集) 1권, 외집(外集) 1권, 속집(續集) 8권, 연보(年譜) 3권, 언행록(言行錄) 6권. 1598년(선조 31) 간행했다. 내용은 시(詩)·교(敎)·소(疏)·차(箚) 및 제문(祭文)과 행장(行狀) 등의 27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가운데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이라는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는 자신이 《도산십이곡》을 짓게 된 연유와 조선의 가요를 평한 글로, 퇴계의 문학관(文學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황(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다. 이름은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도옹(陶翁), 퇴계(退溪)이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 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이는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도산 서원을 설립,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작품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 등이 있다.
(2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이순신 장군
추격해서 남해 경계에 이르렀다.
이순신이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아오는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에서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이 말하였다.
“전투가 한창 급하니 삼가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마라.”
말을 마치고 운명했다.
追至南海界. 舜臣, 親犯矢石力戰, 有飛丸中其胸. 左右, 扶入帳中, 舜臣曰 : 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終.
출처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李舜臣, 1545-1598)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명장(名將)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유고(遺稿) 전집(全集)이다. 정조(正祖) 19년(1795), 교서관(校書館) 검서(檢書) 유득공(柳得恭)의 감독(監督) 하(下)에 편집(編輯), 간행(刊行)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의 전집(全集)으로, 윤행임(尹行恁)이 왕명(王命)으로 편집(編輯)했다. 시문(詩文) 외(外)에 『난중일기(亂中日記)』등이 실려 있다.
이순신(李舜臣)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3화)신부가 장님이라고 속여도 신의를 지켜 장가든 박서
판서(判書) 박서(朴遾, 1602-1653)가 어릴 때 어떤 집에 장가들기로 약속하였다.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나 처녀가 도중에 위중한 병에 결렸다.
사람들이 두 눈이 모두 멀었다고 말하였다.
그의 형이 바꾸어 다른 혼처를 구하려고 하였더니,
판서가 말하기를,
“병이 나서 눈이 먼 것은 운명이지 그의 죄가 아닙니다.
눈이 먼 아내는 오히려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세상에 설 수 없습니다.”
형이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따랐다.
혼인을 하니 눈이 실제로는 멀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원수의 집에서 속임을 당한 것이다.
朴判書遾, 兒時約婿于某家. 未聘而處女中經危病, 人言兩目俱盲, 其兄 欲改求他婿, 判書曰, 病盲天也, 非其罪也. 盲妻, 猶可同居, 人無信不立, 不可改也. 兄奇其言, 從之. 及合巹, 目實不盲, 蓋爲仇家所誣也.
≪기문총화(記聞叢話)≫
≪기문총화(記聞叢話)≫ : 편저자 미상의 조선 후기 야담집이다.
박서(朴遾, 1602-1653)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호는 후계(後溪)이다.
(4화) 신분과 지위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고쳐 준 백광현
그는 병자를 만나면 신분이 귀하고 천하거나 사이가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부탁이 있으면 곧바로 갔다.
가면 반드시 마음과 능력을 다하여 병이 나은 것을 본 후에야 그만두었고 늙고 귀함을 핑계 삼지 않았다.
원래 말을 치료하던 백광현은 꾸준히 노력하여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어의로서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백성도 돌보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 정신을 생각한다.
정래교(鄭來僑) : 조선 후기의 여항 시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윤경(潤卿), 호는 완암(浣巖) 또는 현와(玄窩)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다가 인의(引儀)․찰방(察訪)․제술관(製述官)을 역임했다.
홍세태(洪世泰)에게 시를 배워 당대 문사들에게 홍세태를 잇는 시재(詩才)를 가졌다는 평을 받았다.
1722년에는 당화(黨禍)를 피해 계룡산 완암곡(浣巖谷)으로 피신하게 되어 완암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그의 시는 강개하다는 평을 들었고 중인층 가운데 뛰어난 예술가들의 전(傳)을 6편 남기고 있다.
시조가 3수 전하고 있으며, ≪청구영언 靑丘永言≫의 서문을 썼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은 조선 후기의 침의(鍼醫)이다. 처음에는 마의로 말의 병을 고쳤으나, 사람의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해 한의학에서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침을 써, 종기의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내 깊은 악성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렸다.
그 명성으로 그는 신의(神醫)으로 불리기도 했다.
(5화)처음 본 꽃 그림을 보고 향기 없음을 알았던 선덕여왕
왕이 꽃을 그린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뜰에 심도록 명하여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꽃은 그렸으나 나비가 없으니 그것이 향기가 없을 것임을 알았다.”
라고 하였다.
王見畫花曰, 此花定無香. 乃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其言. 群臣問於王曰, 何以知之. 曰畫花而無蝶, 知其無香.
출처 : ≪삼국유사(三國遺事)≫(一然, 1206-1289)
선덕여왕
신라 세 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가운데 한 분이다.
신라 제27대 여왕으로,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부친은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선덕여왕은 총명하여 개구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여근곡(女根谷)에 백제 군사들이 숨은 것을 알아냈다.
후일, 자신이 죽을 날짜와 시간을 미리 예견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高麗) 25대 충렬왕(忠烈王) 11년(1285)에 보각 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지은 역사책(歷史冊)이다.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삼국(三國)의 사적과 신화(神話), 전설(傳說), 설화(說話) 등(等)이 수록(收錄)된 5권 3책이다. 단군(檀君) 조선(朝鮮)에서 통일신라(統一新羅)까지의 사실(史實)을 다루었는데, 주(主)로 불교적(佛敎的)인 내용(內容)이 많다. 시대(時代)순으로 기술(記述)된 일관(一貫)된 저서(著書)가 아니고 단편적(斷片的)인 사실(史實)을 수집(蒐集)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빠진 古記(고기)의 기록(記錄)들을 원형(原形)대로 모아 놓았다. 단군(檀君), 주몽(朱蒙), 혁거세(赫居世), 탈해(脫解), 수로(首露) 등(等)의 건국(建國) 신화(神話)와 함께 향가(鄕歌) 14수가 수록(收錄)되어 있어 국어국문학(國語國文學)ㆍ민속학(民俗學) 연구(硏究)에 귀중(貴重)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일연(一然) : 고려 후기의 승려로 경주(慶州) 김씨이다.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이다. 법명은 일연(一然)으로,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6화) 어진 어머니 좋은 아내 신사임당
사임당 신씨는 기묘명현인 신명화의 따님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덕성이 있었는데 시집갈 나이가 들어 이원수에게 시집을 갔다.
어느 날 검은 용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문성공 율곡 이이를 강릉 오죽헌에서 낳았다.
신씨 부인은 문성공을 임신했을 때 태교로서 오로지 예절의 법도를 따랐다.
공이 도학을 성취한 것은 모두 부인의 가르침대로였다.
또한 신씨 부인은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뛰어난 산수화나 새와 짐승과 벌레의 그림이 지금까지 여전히 세상에 전해진다.
師任堂申氏, 己卯名賢命和之女也. 生而端雅有德性, 及笄, 嫁李公元秀. 夢黑龍入懷, 生栗谷李文成公珥於江陵烏竹軒. 夫人娠公時, 動以胎敎, 一循禮度. 公之道學成就, 皆夫人所敎也. 又善書畵, 其山水翎毛, 只今尙傳于世.
출처 : ≪금계필담(錦溪筆談)≫(徐有英, 1801-1874)
(신사임당 : 1504-1551)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 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 시대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화조·어죽·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이다.
마치 생동하듯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
≪금계필담(錦溪筆談)≫
서유영(徐有英)이 1873년(고종 10)에 저술한 문헌설화집으로, 총 141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전한다. 2권 2책으로 한문필사본이다. 이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한문유인본(漢文油印本) 2책, 서울대학교 상백문고(想百文庫)에 한문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문필사본 2책 중 1책의 낙질본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는 이 책을 쓴다고 했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영(徐有英)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호는 운고(雲皐)이다.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6대손으로, 아버지 격수(格修)와 어머니 안씨(安氏)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 옥수(沃修)의 양자로 들어갔다. 『금계필담(錦溪筆談)』을 편찬했다. 이 책은 서유영(徐有英)이 1873년(고종 10)에 저술한 문헌설화집으로, 총 141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전한다. 2권2책. 한문필사본. 이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한문유인본(漢文油印本) 2책, 서울대학교 상백문고(想百文庫)에 한문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문필사본 2책 중 1책의 낙질본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는 이 책을 쓴다고 했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7화) 솔거가 그린 그림을 고치자 새가 날아오지 않음
솔거는 신라 때 스님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에서 오래 묵은 소나무를 벽에 그렸는데 가지와 줄기에 비늘 같은 주름이 져서 까마귀와 솔개 같은 새가 그것을 바라보고 가끔 날아들어 어정거리다가 부딪혀 땅에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지나 색깔이 바래지자, 한 스님이 단청하여 이것을 보수했다.
까마귀와 솔개들이 다시는 날아들지 않았다.
率居, 新羅僧也, 善畫. 嘗於皇龍寺, 畫老松於壁, 枝幹鱗皺, 烏鳶望之, 往往飛入. 蹬蹭墜之. 歲久色暗, 居僧以丹靑補之, 烏鳶不復至.
출처 : ≪금계필담(錦溪筆談)≫(徐有英, 1801-1874)
솔거
신라 때의 화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 밖에도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거사상》 등이 있어 신화(神畵)라고 했다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8화) 어린 퇴지가 아버지 배 위에 올라간 뱀을 쫓음
영상공(부친 : 홍언필)이 여름에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뱀이 공의 배 위로 올라왔다.
공이 마음 속으로는 그것을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뱀이 놀라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서 목석처럼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들인 퇴지가 바야흐로 여섯 살이었는데 아버지의 처소에 갔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즉시 풀숲의 연못으로 가서 개구리 서너 마리를 잡아와 그것을 던지니 뱀이 사람을 놔두고 개구리를 쫓아가니 이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퇴지는 어려서부터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이와 같더니 장성해서 과연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領相公, 夏日午睡, 有蛇上公腹上. 公心欲逐之, 而恐蛇驚傷人, 木石然不敢動. 子退之, 方六歲, 適父所, 見之. 卽往草澤中, 取三四蛙投之, 蛇, 捨人從蛙而去, 乃得起身. 退之, 自幼, 機智如此, 及長, 果爲名相.
출처 : ≪인물고(人物考)≫
≪인물고(人物考)≫ : 조선 정조 때 심진현(沈晉賢)이 왕명에 의해 만든 인물지이다. 26권 26책. 필사본으로 조선 건국 초기부터 숙종 때까지의 중요 인물 1,821인에 대해 그 성명·자·호·생몰·가계·관력·특징·사업·업적 등을 서술체로 수록하였다. 이 책은 총목 1권, 본고 23권, 속고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진현(沈晉賢)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인(羲人)이다. 생원시에 합격했다.
퇴지(홍섬)의 임기응변하는 지혜와 효심
홍섬(洪暹1504-1585)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퇴지(退之) , 호는 인재(忍齊)로 영의정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수찬 · 부제학 ·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 7) 청백리(清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당하였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 ·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南袞)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9화) 헤진 돗자리와 베를 재활용한 윤현
윤 현은 파평 윤씨로 자는 자용, 호는 국간이라 했다.
중종 신묘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정유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호조판서까지 지냈는데 재임 당시 해어진 돗자리와 청록색 베를 버리지 않고 모두 창고에 보관해 두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해어진 자리를 조지서에 보내어 그것을 섞어 종이를 만들게 했는데 종이 품질이 매우 좋아졌다.
또 푸른 베로는 야인들의 옷 단추를 만들었다.
청렴과 근실하다고 소문이 이름이 났다.
尹鉉, 坡平人, 字子用, 號菊磵. 辛酉進士, 丁酉文科壯元, 官至戶判, 弊席地衣靑緣布, 悉藏之庫中, 人咸笑之, 其後弊席, 付造紙署作紙, 紙品甚佳, 靑布, 作野人衣軸. 以廉謹稱.
출처 : ≪목민심서(牧民心書)≫(丁若鏞, 1762-1836)
윤현(尹鉉 : 1514-1578)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용(子用)ㆍ국간(菊磵)이다.중종 32년(1537)에 식년 문과에 장원이 되었다. 명종 5년(1550) 장악원정으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호조에 있을 때 국가의 지출을 절약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문집으로 ≪국간집≫이 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정약용(丁若鏞)이 지방(地方) 관리(官吏)들의 폐해(弊害)를 없애고 지방(地方) 행정(行政)을 쇄신(刷新)하려고 사례(事例)를 들어 풀이해 펴낸 책(冊)으로, 총 48권 16책이다.
정약용(丁若鏞) :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이다.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0화)도포를 잘라 거지 아이에게 옷을 해 입힌 이지함
이지함은 한산 이씨로 자는 형중, 호는 토정이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후에 형인 이지번으로부터 공부를 배우고 자라나서는 모산 성랑의 사위로 들어갔다.
혼례를 치른 다음날, 외출했다가 저물녘에 들어오는데 집안 사람들이 보니 명주로 지은 새 도포가 없기에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홍제원 다리를 지나다 거지 아이들이 추위에 벌벌 떨며 앓는 소리를
하기에 도포를 잘라 세 아이의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라고 하였다.
李之菡, 韓山人, 字馨仲, 號土亭. 少孤, 從其兄之蕃學, 及長, 爲婿于毛山星琅, 樵之翌日, 出而暮返, 家人覺其袍亡, 聞之則, 曰過弘濟院橋, 見乞兒呻吟, 割而分之衣三兒矣.
출처 : ≪대동기문(大東奇聞)≫ : (姜斅錫, ?-?)
이지함(李之菡, 1517-1578)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기인(奇人)이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 해박하였다.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다.
《대동기문(大東奇聞)》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한 조선조 역대 인물들의 전기·일화들을 뽑아 엮은 책으로, 4권 1책이다. 윤영구(尹寗求)와 이종일(李鐘一)이 교정하여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태조대 배극렴(裵克廉)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종대 민영환(閔泳煥)에 이르기까지 총 716항이 실려 있다. 이어 부록으로 ‘고려말 수절제신(高麗末守節諸臣)’편에 정몽주(鄭夢周) 이하 98항이 덧붙어 있어 총 814항목이 실려 있다.
강효석(姜斅錫)
일제 강점기 학자로 본관은 진주이다. 호는 치당(痴堂)으로 시에 능하였다. 1920년대 한양서원(漢陽書院)을 직접 경영하면서 자신의 여러 저서를 펴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인물 상식을 넓혀 주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저서에 《전고대방(典故大方)》,《대동기문(大東奇聞)》,《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 《진주강씨세보(晋州姜氏世譜)》가 있다.
(11화) 자신을 반성하는 ≪근사록≫을 늘 들고 다닌 권벌
권벌은 안동 권씨로 자는 중허, 호는 충재이다.
중종 병인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정묘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별나게 ≪근사록≫을 읽어 소매 속에 늘 품고 다녔다.
하루는 임금이 재상들을 불러 후원에서 연회를 열고 꽃놀이를 했는데, 왕의 명에 따라 모두들 즐겁게 실컷 마시고 취해 부축을 받고나서야 대궐을 나섰다.
그 자리에서 한 내시가 ≪근사록≫을 주웠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를 본 임금은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니 돌려주라’고 하셨다.
權橃, 安東人, 字仲虛, 號冲齋. 中宗丙辰進士, 丁卯文科. 尤好近思錄, 不去袖間, 上召宰執, 宴後苑賞花, 命各盡歡醉, 携手而出, 有內臣, 拾得近思冊子, 不知爲誰某之物, 上曰 : 落自權橃矣, 命還之.
출처 : ≪대동기문(大東奇聞)≫(姜斅錫, ?-?)
권벌(權橃:1478-1548)
조선 시대의 문신,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 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 경기도 관찰사ㆍ형조 참판ㆍ한성부 판윤 따위를 지냈다.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근사록≫
송나라 주자(朱子)와 그의 제자 여조겸(呂祖謙)이 지 은 책으로, 선현들의 책 속에서 일상 수양에 꼭 필요한 622가지 조 목을 정리했다.
권벌이 성리 학자나 일반 선비들의 몸가짐과 마음을 바르게 하 기 위해 만든 ≪근사록≫을 늘 들고 다니며 자신을 반성하고 바 른 선비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점 고취(선비 정신 함양)
《대동기문(大東奇聞)》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한 조선조 역대 인물들의 전기·일화들을 뽑아 엮은 책으로, 4권 1책이다. 윤영구(尹寗求)와 이종일(李鐘一)이 교정하여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태조대 배극렴(裵克廉)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종대 민영환(閔泳煥)에 이르기까지 총 716항이 실려 있다. 이어 부록으로 ‘고려말 수절제신(高麗末守節諸臣)’편에 정몽주(鄭夢周) 이하 98항이 덧붙어 있어 총 814항목이 실려 있다.
(12화) 썩은 고기를 모두 사서 땅에 묻은 홍서봉의 어머니
홍서봉(洪瑞鳳) 재상의 어머니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나물밥과 나물국도 매번 먹지 못할 때가 있었다.
하루는 계집 종을 보내어 고기를 사오게 했는데 고기 빛깔을 보니 부패되어 있는 상태임을 보았다.
이에 머리 장식품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계집종을 시켜 그 고기를 모두 사오게 해서 담장 아래 묻게 하였다.
洪相國瑞鳳之母夫人, 家甚貧, 菜食菜羹, 每至空乏. 一日, 遣婢買肉而來, 見肉色有毒. 乃賣首飾得錢, 使婢盡買其肉而埋于墻下.
≪동언당법(東言當法)≫ : 편저자 미상.
홍서봉(洪瑞鳳 : 1572-1645)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영의정까지 지냈다.
홍서봉 어머니가 고기가 상해서 변질된 것을 알고 자신의 재물을 팔아 나머지 고기를 모두 사오게 해서 묻었던 미담이다.
어머니는 썩은 고기를 남들이 모르고 사서 먹고 탈이 날까 염려되 어 자신의 돈으로 썩은 고기를 모두 사들였다.
홍서봉 어머니의 남을 생각하는 착한 마음을 고취(선행)
(13화) 방울을 차고 다니며 자신을 경계한 이상의
이상의(李尙毅,1560-1624)가 아이었을 때에 성품이 몹시 경솔하여 앉아서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말만하면 빈번이 망령되이 말했다.
부모가 그것을 걱정하여 자주 책망하는 말을 하니, 공은 작은 방울을 허리에 차서 스스로를 경계하여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앉거나 눕거나 할 때 일찍이 방울을 때어낸 적이 없었다.
그랬더니 실수를 오늘 조금 줄이고 내일 조금 줄여 중년이 지난 뒤에 온전히 타고날 때부터 그런 것처럼 되었다.
후세 사람들 가운데 경박한 자제(子弟)를 경계하려는 사람은 꼭 이공(李公)을 들어서 모범을 삼았다.
李尙毅, 兒時, 性甚輕率, 坐不耐久, 言輒妄發, 父母憂之, 頻有責言, 公 佩少鈴以自戒, 每聞鈴聲, 猛加警飭, 出入坐臥, 未嘗捨鈴. 今日感一分, 明日感一分, 及至中年之後, 渾然天成, 後人之戒輕薄子弟者, 必擧李公, 以爲則云.
출처 :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조선(朝鮮) 시대(時代) 효종(孝宗)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였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저술(著述)로, 일명 ≪동평견문록(東平見聞錄)≫, ≪견한록(遣閑錄)≫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변화가 극심했던 역대 왕조의 정국을 직접 듣고 보면서 세태에 따라 변천하는 인심이나, 풍속에 따라 무너지는 교화(敎化)를 염려했으며, 어려운 상황에 임했을 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임금이나 재상(宰相)들의 일들을 기록하여 후세의 본보기가 되게 했다.
정재륜(鄭載崙)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태화(太和)이며, 어머니는 민선철(閔宣哲)의 딸이다. 좌의정 치화(致和)에게 입양되었다. 1656년(효종 7)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하여 동평위(東平尉)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 사은정사로, 1705년에는 동지정사로, 1711년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세 차례나 다녀왔다. 1716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를 증보, 간행하였다. 또한, 저서로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한거만록(閑居漫錄)』 등 수필 형식의 기록이 있다.
(14화) 그림 그리는데 푹 빠졌던 이징
이징이 어렸을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모르다가 사흘이 지나서 찾았다.
아버지가 노(怒)하여 그에게 회초리로 때렸더니 이징은 울다가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렸다.
이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영욕(榮辱)을 잊은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李澄, 幼登樓而習畵, 家失其所在, 三日乃得. 父怒而笞之, 泣,. 引淚而成鳥. 此可謂忘榮辱於畵者也.
출처 : 《연암집(燕巖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징(李澄, 1581-?)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다.
허균은 그를 산수, 인물, 초충에 모두 뛰어난 당대 최고 기량의 화 가로 평가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이징이 다락방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일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징이 없어져 보이지 않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온 집안 식구들 이 애타게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징은 사흘째 돼서야 발견되었고, 가슴이 타들어 가던 아버지는 어린 이징을 심하게 꾸짖었다.
호된 꾸중에 이징은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그 눈물을 손으로 끌어 다가 새를 그렸던 것이다.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 예술 정신 고취(집중)
이징(李澄, 1581-?) : 조선 중기의 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함(子涵), 호는 허주(虛舟). 16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이경윤(李慶胤)의 서자(庶子)이다. 화원으로 벼슬은 주부를 지냈다. 1609년 원접사(遠接使)의 수행 화원으로 동행하였으며, 1623년 위항 문인 유희경(劉希慶)의 요청에 의하여 그의 별서(別墅)의 실경 산수화인 <임장도 林莊圖>를 그렸다. 1628년 태조의 진영(眞影)을 개수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6품직을 제수받았다. 1627년 <소현세자가례반차도 昭顯世子嘉禮班次圖>를, 1638년 <인조장렬후가례반차도 仁祖莊烈后嘉禮班次圖>를 제작하는 데 이기룡(李起龍)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왔다가 3년간 머무르고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허균(許筠)은 그를 가리켜,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배워서 화가가 되었고, 산수·인물·영모(翎毛)·초충(草蟲)에 모두 능하며, 이정(李楨) 사망 후의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고 하는 등, 당시에 가장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의 남태응(南泰膺)은 “각체(各體)를 모두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대가였다. 그러나 고법(古法)을 넓게 구사하되 웅혼한 맛이 없고 정밀하나 오묘하지 못하며 기교에 능하되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평한 바 있다. 산수화에서는 조선 초기의 안견파(安堅派)와 중기의 절파계(浙派系)를 융합한 화풍을 즐겨 구사하였는데, 초기의 화풍에 더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리고 수묵 산수화와 함께 장식적인 취향이 짙은 이금 산수화(泥金山水畫)도 잘 그려 이 방면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영모화에서는 절파풍의 강조된 묵법(墨法)을 토대로 간일하게 도안화되었으면서도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말·기러기·원앙새 등을 많이 그리고, 이 분야의 한국적 화풍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작으로 <연사모종도 煙寺暮鐘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이금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소장), <노안도 蘆雁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연암집(燕巖集)》: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실학자(實學者) 박지원(朴趾源)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박지원의 자(字)는 중미(仲美), 호(號)는 연암(燕巖)이다. 그의 아들 박종간(朴宗侃)이 편집(編輯)해 놓은 57권 18책의 필사본(筆寫本)을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일부(一部)만 발췌(拔萃)하여 9권 3책으로 간행(刊行)하였고,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17권 6책으로 인간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실학파(實學派) 가운데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學派)의 대표적 인물인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선비의 각성(覺醒)과 실학 정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허생전(許生傳’은 『열하일기(熱河日記)』 속의 '玉匣夜話(옥갑야화)'에 실려 있는 데, 박지원의 포부와 지성이 생생하게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이 책에는 18세기에 와서 패사소품류(稗史小品類)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기 시작한 한문단편이 다수 실려 당대 인간들의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면서, 친구와 사귐에 있어 잘못된 도리와 타락한 양반의 실상을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과농소초(課農小抄)』등을 비롯하여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등의 한문소설이 실려 있어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15화) 굶주린 백성을 구한 김만덕
만덕(萬德)의 성은 김씨로 제주도 양가(良家)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가 의의할 곳이 없어 기녀에게 의탁해 생활하였다.…
그의 재화를 늘리는 재주가 있어서 능히 물건 값이 귀하고 천한 때를 맞추어 내다 팔고 사다 두니 수십 년에 이르러 자못 (돈을) 모은 것으로써 이름이 났다.
1795년(정조 19)에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베고 죽었다(중략)
이에 만덕이 천금(千金)을 내어 육지와 쌀을 무역하니 여러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추어 이르렀다.
만덕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서 친족들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아에 실어 보냈다.
부황(浮黃)에 걸린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관아의 뜰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관아에서 그 완급을 조절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 차등이 있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모두 나를 살려 준 사람이 만덕이라고 여겼다.
萬德者, 姓金, 耽羅良家女也. 幼失母無所歸依. 托妓女爲生.…其才長於殖貨, 能時物之貴賤, 以廢以居, 至數十年, 頗以積著名, 聖上十九年乙卯 耽羅大饑, 民相枕死.…於是, 萬德, 捐千金, 貿米陸地, 諸郡縣棹夫以時至. 萬德取十之一, 以活親族, 其餘盡輸之官. 浮黃者聞之, 集官庭如雲 . 官劑其緩急, 分與之有差, 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 咸以爲活我者萬德.
출처 : ≪번암집(樊巖集)≫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제주도 사람 김만덕(金萬德, 1739-1812) 일화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 가다 기녀의 수 양딸이 된다.
하지만 본래 양인이었던 그녀는 관가에 자신의 신분을 회복시켜 줄 것을 꾸준하게 요청해서 다시 양인으로 풀려난다.
양인이 된 만덕은 장사를 시작해 큰 재산을 모으게 된다.
그런데 1793년 제주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어 죽게 되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제주도 백성의 목 숨을 구한다.
이 소식은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선행을 가상히 여긴 정조가 만덕의 소원을 들어 주라고 명하자 그녀는 임 금님을 뵙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다고 한다.
정조는 제주도민은 섬을 벗어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만덕의 소 원을 들어 주었으며, 아울러 그녀에게 내의원에 속한 의녀 가운데 최고의 벼슬을 내렸다.
만덕은 죽기 직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누 어 주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였다.
그녀는 장사하는 재능이 뛰어났고, 시기에 따라 물건의 귀하고 천 한 것을 잘 알아, 수십 년 동안 장사에 힘을 쏟아 유명한 재산가가 되었다
좌의정 채제공은 당시 남성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그녀의 선행 을 아름답게 여겨, 전(傳)을 짓고 후세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였다.
김만덕(金萬德 : 1739-1812)
본관은 김해이며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 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퇴기에게 맡겨져 기생 수업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관부의 기생(관기)이었으나 양인으로 풀려난 후 객주를 꾸려 큰 재산을 모았다. 1795년 제주도에 몰아친 폭풍과 폭우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재산의 대부분을 구휼미로 내놓아 제주도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였다. 구휼 선행이 중앙에 알려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를 가까이 에서 알현하였으며 왕에게 청한 소원대로 제주도를 벗어나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조수삼, 김정희 등의 명사와 시인들이 만덕의 선행을 기리는 많은 글과 시를 남겼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죽기 직전 가난한 이들에게 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은 재산만을 남겼다고 전한다. 1812년 10월 22일 74세를 일기로 제주도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만덕 기념사업회'와 '만덕상'이 제정되어 그녀의 자선을 기리고 있다.
≪번암집(樊巖集)≫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인 채제공(蔡濟恭)의 시문집으로 목판본이다. 61권 27책, 규장각 도서이다. 1824년(순조 24)에 아들 홍원(弘遠)이 이정운(李鼎運)·최헌중(崔獻重) 등의 협력을 얻어 편집·간행하였다. 내용은 시(詩)·소(疏)·차(箚)·서계(書啓)·헌의(獻議)·계사(啓辭)·서(序)·기(記)·서(書)·제문(祭文)·애책(哀冊)·애사(哀辭)·지장(誌狀)·전(傳)·발(跋)·비탑문(碑塔文)·명(銘)·찬(贊)·교문(敎文)·전(箋)·장문(狀文)·상량문(上樑文)·설(說)·잡저(雜著) 등이 수록되었다. 책머리에 정조의 어제어필제영(御製御筆題詠)·어정범례(御定凡例) 등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