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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2024. 10. 31(목) 라방 성모발현지(미사) - 후에 왕궁 - 후에 대성당 - 투언 추기경 생가 |
아침에 일찍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된다. 하늘은 찌푸리기는 하나 어제와 같이 비는 없을 듯하다.
전날과 같이 06시 30분 아침식사, 08시 출발이다. 오늘 첫 일정은 라방 성모발현지. 라방 성모발혀현지는 후에(Hue) 북쪽 약 60km 지점에 있어 버스로 1시간 남짓 소요된다.
도로변 넓은 논들에는 모심기를 하려는 논처럼 듯 물이 잡혀져 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이드의 베트남 역사 강의는 오늘도 이어진다. 그리고 고려시대 베트남의 왕족한 사람이 반란군에 쫓겨 고려로 망명하여 화산군(花山君)이라는 봉작을 받고 화산이씨로 살아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베트남에는 성모발현 성지가 5군데가 있는데 이중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발현지는 짜께우와 라방이다. 짜께우는 지역성지이며 라방은 국가 성지라고 한다. 흔히 라방 성지를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성모발현지라고 하나 가이드에 의하면 이는 잘못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교황청에서 인준하는 성모 발현지는 16곳뿐으로 라방은 물론 여기 들어가지 않는다. 라방 성지가 교황청 인준 성모 발현지라고 알려진 것은 교황청이 라방 성지 대성당에 바실리카(대성전) 칭호를 내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라방 성모발현지
라방 성모님이 발현한 1800년 전후의 배경은 농민항쟁으로 후기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선 왕조(西山朝, 1778-1802)의 3대 깐틴느 왕(Canh Thinh, 1793-1802)의 통치 기간이었다. 깐틴느 왕은 후에(Hue) 남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응우엔 아인(Nguyen Thinh, 응우엔 왕조의 시조)이 프랑스 주교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베트남 교우들을 프랑스의 앞잡이로 몰아세우며 가혹한 박해를 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박해의 시기였다.
일부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피해서 수도인 후에(Hue) 북쪽 작은 마을 라방의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라방의 숲에 모인 신자들은 무서운 박해의 위험과 질병,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매일 저녁 함께 모여 기도를 드렸다.
1798년 어느 날, 신자들이 함께 모여 반얀 나무(보리수) 아래서 묵주기도를 드리던 날 밤,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은 한 여인이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면서 어린이를 품에 안고 밝은 빛에 둘러싸여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나의 자녀들아! 용기를 잃지 말아라. 너희가 무엇을 청하여도 나는 너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겠으며, 앞으로도 누구든지 나에게 청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는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질병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야생 허브(향초)를 이용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라방 성모님의 발현은 박해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신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이 사건 이후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했고, 1820년에는 작은 경당이 세워졌다.
박해시기가 끝난 후 1901년 베트남 주교단에서는 에는 꼬뷰 성당의 본당신부이며 라방 성지를 담당했던 닌 신부로 하여금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교회 공식적인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1928년에 라방 대성당을 새로이 건축하여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1974년 월남이 북쪽 월맹에 의해서 공산화가 된 이후로 라방 성모님 성지 방문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성지의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으나 가톨릭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의열정은 공산주의의 새로운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방 성지를 아끼고 지켜왔다.
1998년 “라방성모님 발현 200주년 기념행사”에는 하노이 대교구장이신 추기경과 교황청 특별사절단과 많은 주교들, 베트남 각지에서 모인 20만명의 많은 신자들이 거대하고 장엄한 기념미사를 행했다.
라방의 성모님은 오늘날까지 성지를 순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 중에서도 신앙의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위로하며 영적, 육적으로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고 계신다.
09시가 조금 지나 라방 성모 발현지에 도착했다. 성지가 매우 넓었다.
순례 순서는 먼저 가이드와 함께 라방 성모님상을 모신 야외 제대, 베트남 전쟁으로 파괴된 바실리카 대성당, 그리고 피에타와 베트남 117위 성인 조각상을 모신 야외성당을 돌며 설명을 들은 후 미사를 드린다. 그 후에는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자유시간을 조금 갖고 마지막으로 성물방을 갔다가 버스에 오르기로 한다.
▲라방 성모님 제대
1798년 라방에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은 반얀나무(Banyan tree, 뱅골 보리수나무)였는데 이곳에 반얀나무를 형상화하여 발현하신 성모님을 모셨다. 성모상 앞에 제대가 있고 좌우에 두 천사가 경배하고 있다.
▲ 파괴된 바실리카 성전
1798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후 1820년에는 작은 경당이 세워졌다. 그후 박해가 끝난 1928년에 바실리카 대성전을 신축하여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월남전으로 인해 크게 파괴되어 종탑만 달랑 남게 되었다.
▲117위 순교성인 조각 광장
성모님 모신 반얀 트리 제대 뒤편에 야외미사를 드릴 수 있는 넓은 광장이 있다. 가운데는 피에타상이 있고 그 뒤에 1988년 6월에 시성된 117위 순교성인 조각상을 새긴 벽이 있다. 그리고 좌우 벽에는 순교 성인 해설판이 있다. 그리고 해설판 앞에는 십자가의 길이 7처씩 배치되어 있다.
베트남 순교성인 117위는 96위의 베트남인과 에스파냐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 선교사 11위 그리고 10위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주교들과 50위의 사제들(13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과 37위의 베트남 출신) 그리고 59위의 베트남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 하면 사지를 각각 말에 묶고 채찍을 가하여 사지를 떼어내어 죽이는 형벌이라고 하나 이는 거열형(車裂刑)이다. 능지처참이란 죄인을 묶어 세워놓고 살점을 시간을 두고 조금씩 칼로 도려내어 극도의 고통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이다. 위의 왼쪽 그림이 바로 이 형벌이다.
베트남이나 우리나라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이기에 모두 중국의 형옥 제도를 모델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라는 오형(五刑)이라는 공식적인 형벌 이외에도 장살, 항쇄 교살, 백지사, 생매장, 얼려죽 이기, 자리개질 등 각가지 형벌을 자행했지만 베트남에서도 이에 못지 않는 잔인한 형벌이 가해졌음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라방 성지 미사
미사는 반얀나무 형상의 라방 성모상 부근 간이 미사용 제대를 이용했다. 아직 새로 지은 대성당이 외관은 완성이 되었지만 내부가 갖추어지지 않아 입장이 허용되지 않아 딱히 미사 드릴 실내 공간이 없는 것 같다. 모든 단체들이 다 이곳을 이용한다.
제1독서에서는 악마의 간계에 맞서기 위해서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라고 권한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의 세계의 악령들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하여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라고 권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할로윈데이, 곧 악령의 날인 10월 31일이다. 이열치열이라 했듯 악령의 모습을 가장하여 악령을 물리치는 날인 것이다. 오늘로 이태원 참사도 2주기를 맞는데 진정한 애도와 대책 마련은 없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한다. 다들 악령에 씌워진 것 같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 마귀를 쫒아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은 죽으리라는 암시를 하신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나의 길’을 가겠다고 하셨다. 강론에서도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에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고 했다. 순교성지에 와 보면 평상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순교 성인들을 결코 영광과 공경이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복음과 강론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
제대 뒤에는 ‘영원한 사랑’이 꽃말인 부겐베리아가 화분 속에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약 30분 간 자유시간이라 성지 경내를 더 다녔다.
▲새로 지은 대성당
파괴된 바실리카 성당 뒤로는 새로 지은 라방 성지 대성당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3,000명을 수용할 수가 있을 정도로 넓다고 한다. 아직 준공이 되지 않아 들어갈 수는 없다.
▲조각 광장
▲성모동산
▲성모상 거리
▲라방 향초 - 라방 교우의 병을 고친 허브
11시 30분. 성물방을 마지막으로 라방 성지를 떠났다. 12시 40분 다시 후에(Hue)로와서 점심식사. 비지테리언 식당 식물성 코스 요리 전문식당이다.
점심을 먹고 후에(Hue) 황궁으로 향했다. 오후 2시 30분 도착.
후에 - 마지막 왕조의 도읍지
안남산맥 기슭의 안남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고도(古都)이며 호찌민과 하노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인구 21만. 남중국해 연안에서 8㎞ 정도 떨어져 있으며 얕고 넓은 흐엉 강(香江)이 가로질러 흐른다.
기원전 200년경 남비엣(南越)의 중국군사령부가 주둔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서기 200년경에는 참족(族)이 지배하였다. 이후 중국에 정복당하기를 반복하다가 후기 레왕조 시기였던 1635년 중부 및 남부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엔 가(阮家, 일명 구엔家)의 수도가 되었으며, 1802년 베트남 통일 후 응우엔 왕조( 阮王朝, Nguyen Dynasty)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1883년부터는 아시아에 진출하려는 프랑스에 점령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점령 하에 있었으며 1949년 새로 수립된 베트남공화국이 수도를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으로 정하면서 예로부터 중심지 역할을 하던 이곳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때 공습으로 심한 피해를 당했다. 이때 많은 옛 왕족의 건물과 불교사원 등이 파괴되어 그 후 재건사업을 추진하고 일부가 복구되었다.
후에(Hue)는 1993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시 전체가 지정된 곳은 전 세계에 그리스 아테네와 후에(Hue)뿐이라고 한다. 경주도 1995년 불국사, 석굴암이 등재되었고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 도시로 지정되었지만 경주 전체가 아니라 남산 지구, 황룡사 지구, 월성 지구, 산성 지구, 대릉원 지구의 5지역이다. 따라서 후에(Hue)는 경주보다 더 빨리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베트남의 경주라고 할 만한다.
후에(Hue)는 유적지로서 많은 볼거리가 있다.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흐엉강(香江)을 중심으로 황궁과, 카이틴 황릉 등 황제들의 능묘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베트남 불교의 중심지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 靈姥寺)도 볼거리이다.
후에(Hue) 황궁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의 황궁
후에 황궁은 다이노이(大內)라고도 부르는데 19세기 초 중국식으로 지어진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궁궐이다. 곧 1802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응우엔 왕조의 역대 황제가 머물렀던 곳이다.
1789년 응우엔 푹 아인(阮福暎)은 분열되어있던 베트남을 통일하고 등극했다. 이가 초대 황제 지롱제(嘉隆帝)다. 도읍을 어디로 정할까 숙고 끝에 이곳 후에(Hue)에 황궁을 지었다. 180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32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어 10km에 달하는 해자, 거대한 성벽을 축조했다.
후에 황궁은 북경의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 방향은 흐엉 강이 있는 동남쪽을 향했다. 황궁에는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궁전의 많은 건물, 정원, 누각들이 있었다. 하지만 1945년 왕정제가 폐지되어 주인이 사라지자, 황궁은 수많은 약탈, 자연재해로 훼손되었다. 가장 큰 피해는 두 차례나 있었던 베트남 전쟁이었다.
1947년 반군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스와 격전이 벌어져 폭격으로 주요 전각들이 불타고 말았다. 격전을 벌였던 흔적은 아직까지도 궁전의 벽들에 남아있는 총탄 자국들이다.
1968년 북베트남 군대가 후에를 점령하기 위해 이곳에 화력을 퍼부었고,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던 후에 황궁은 거의 반파 상태로 전락했다. 황궁에서 남북 군대가 충돌하였으며, 군대가 서로에게 공습을 가하며 160개가 넘던 건물들 중 겨우 10개만이 살아남았다. 그나마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복구, 복원 작업이 이 정도로마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역대 응우엔 왕조의 황제들】
1.세조(世祖)고황제(高皇帝)-지롱[嘉隆] 1802~1820
2.성조(聖祖)인황제(仁皇帝)-민 망[明命]1820~1841
3.헌조(憲祖)장황제(章皇帝)-티에우 티[紹治] 1841~1847
4.익종(翼宗)영황제(英皇帝)-트 득[嗣德] 1847~1883
5.공종(恭宗)혜황제(惠皇帝)- 1883년 즉위하자마자 요절
6.히엡호아[協和]황제 - 1883
7.간종(簡宗)의황제(毅皇帝)->키엔 푹[建福] 1883~1884
8.선종(宣宗)출황제(出皇帝)->함 응이[咸宜] 1884~1885
9.경종(景宗)순황제(純皇帝)->동 카인[同慶] 1885~1889
10.트안 티[成泰]황제 1889~1907
11.주이 턴[維新]황제 1907~1916
12.홍종(弘宗)선황제(宣皇帝)->카이 딘[啓定] 1916~1925
13.바오 다이[保大]황제 1926~1945
황궁은 3부분으로 나뉜다. 맨 바깥 먼저 흐엉 강(香江)의 물을 끌여들여 만든 해자(垓字)로 둘러싸 외성인 경성(京城), 궁궐 건물을 둘러싼 내성인 황성(皇城), 그리고 왕의 거주공간인 자금성(紫金城)이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을 그대로 모방한 성이요, 이름이다.
후에 황궁을 관람하자면 7인승 전동차를 타고 경내를 이동한다. 오늘 황궁 관람은 리노 가이드가 동행하지 않는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황궁 담당 현지가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황궁 가이드를 극찬함으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 마디로 끝내주는 가이드라는 것이다. 우리끼리 전동차를 타고 이동했다. 리노 가이드로서는 조금 쉴 틈이 생긴 것이다.
황궁에 다가가자 해자 건너 외성벽이 보인다.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金星紅旗)가 펄럭인다. 외성은 한 변이 2,235m, 정방형이며 성벽의 높이 5m, 해자의 깊이 4m, 폭 30m라고 한다. 해자와 성벽의 둘레는 모두 2,500여 m, 남북 길이 604m, 동서 길이 620m라고 한다.
깃발 걸린 건물 깃탑(旗塔)은 1807년 지롱 황제 때 3단으로 쌓은 16m 높이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40m 높이의 깃대를 세웠다. 베트남 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1969년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황궁의 정문인 오문(午門) 앞에 이르러 가이드와 만났다. 작달만한 아가씨로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나중 알고 보니 5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만난 그 가이드였다. 대학 한국어과를 나왔고 가이드 생활 6년째라고 하니 당시는 신출 가이드였던 것이다. 물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번에는 자신을 ‘영미’라고 소개한다. 19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컬링 선수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미, 영미! 자신을 그 선수에 갖다 붙인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당시는 한국어가 좀 서툴렀는데 지금은 한국인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유창하다.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못 했다 면서도 어쩌면 한국인의 감성에 파고드는 말을 하는지 놀랄 정도다,
▲오문(午門) · 오봉루(五鳳樓)
바로 궁성의 정문이자 남문인 오문(午門)은 정오에 태양을 바라보는 남문이라는 뜻을 가진 문으로 정면에 셋, 양쪽 누각 아래로 둘,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중앙문은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양쪽 문은 만조백관들이, 그리고 맨 바깥의 문은 병사들이나 코끼리 말 등이 드나들었다 한다.
문 위의 누각 오봉루(五鳳樓)는 황제가 중요 행사나 의식을 거행했던 누대로,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1945년 8월 호찌민 임시 혁명정부에 자리를 내주며 응우웬 왕조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2대 민망 황제 때 창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2대 카이딘 황제 때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먼저 가이드는 오봉루로 안내했는데 그 안에는 황실 어좌와 어보가 전시되어 있고 전망이 매우 좋다.
다시 오봉루를 내려와서 오문 안으로 들어오니 연지(蓮池) 위에 중도교(中道橋)라는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삼문형식의 패방이 나타난다. 패방 위쪽 정면에 ‘正直蕩平(정직탕평)’이라는 구절이 걸려있다. 당시 베트남에도 당쟁이 심했던 것일까? 영조 때 탕평책이 연상된다. 패방 사이로 정전(正殿)인 태화전이 보인다.
▲세조묘(世祖廟)
중도교를 건너지 않고 전동차를 타고 바로 세조묘로 간다. 세조는 응우엔 왕조의 시조 가륭제이다. 우리나라 조선으로 말하면 태조 이성계이다. 세조묘는 세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데 세조만 모시지 않고 응우엔 왕조의 역대 황제들 모두 여기 한 곳에 모시기에 우리나라로 말하면 종묘에 해당된다.
응우엔 왕조의 황제는 모두 13명인데 여기 모셔진 황제는 모두 10명이라고 한다. 빠진 5대 혜황제(惠皇帝)와 6대 히엡호아(協和)황제는 둘 다 1883년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급서하거나 폐위 당하는 바람에 황제다운 황제가 되지 못했고, 다른 한 황제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다. 그는 1945년 고딘디엠에 의해 공화정이 수립되자 퇴위하여 프랑스에 가서 귀국하지 않고 1997년 까지 50여년을 잘 살다가 죽어 국민들은 그를 민족을 배신한 자로 여기고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 황제 중 세조 지롱황제의 위패는 가운데 모셔져 있다.
2층 지붕으로 된 길다란 세조묘 건물 앞쪽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건너편에는 세조묘의 정문이기도 한 현림각(顯臨門)이라는 높은 3층 건물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세 발 달린 솥이 있다. 이를 구정(九鼎)이라한다. 옛날 우왕이 하(夏) 왕조를 세울 때 아홉 주에서 청동을 보내왔는데 이를 녹여 9개의 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써 후에 황궁 답사를 끝낸다. 실제 황궁을 볼려면 한 나절 정도가 소요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 시간 남짓 시간을 소비했다. 오늘 일정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넓은 황궁 중 단지 세조묘만 보았을 뿐, 황궁 정전인 태화전도 못보고 나왔다. 마치 서울 가서 경복궁을 보지 못하고 종묘만 보고 왔다는 뜻이다. 이 점은 아쉽다. 물론 이번은 성지순례가 주메뉴이고 일반 관광지나 유적지는 양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사적지 답사를 왔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에 푸캄 대성당
푸캄(Phu Cam) 성당(영원한 도움의 성모 교회)은 후에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푹 꽈(Phuoc Qua)라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주교좌 성당은 주교(主敎)를 두고 있는, 교구 전체의 모성당(母聖堂)이며 교구 통할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다. 푸캄이란 응우엔 왕이 통치하던 17세기에 황태자가 거처하는 관저의 의미라고 한다.
이 성당은 역대 3분 주교의 관리를 받았다. 첫번째는 응오 딘 툭(Ngo Dinh Thuc), 다음에 응우엔 킴 디엔(Nguyen Kim Dien), 마지막은 응우엔 누 테(Nguyen Nhu The)였다.
후에 대성당의 역사는 1925년 10월 14일 교황청에서 파견한 3명의 캐나다 출신 선교사인 휴 버트 쿠지노, 외젠 로슈 , 세인트 피에르를 파견 하면서 시작 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 축일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7년 9월 13일 수도원을 건축할 토지를 구입하고 1929년 3월 18일 수도원과 이어서 성당을 지었다.
1963년 건축가 응우엔 비엣 투(Ngo Viet Thu)의 프로젝트에 따라 오래된 교회를 허물고 지금의 푸캄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전쟁이 발발되어 공사는 완공이 되지 않은 채로 몇 십 년이 더 흘러 2005년 5월 설계대로 실제로 완공 되었다.
성당의 전면은 중앙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첨탑이 솟은, 펼쳐놓은 성경을 형상화하였다고 하는데 언뜻 보면 새가 양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다.
53m 높이의 탑, 지붕 높이 32m, 길이 70m, 종탑에는 1.5 톤의 무게의 청동종을 설치했다. 성당 전면에는 베드로 사도의 상이 서 있다.
성당 경내에 들어서니 언덕진 곳에 성모동굴이 조성되어 있고 성당으로 가는 길 따라 성당과 관련이 있는 순교 성인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 내부는 2500 명을 수용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천장에는 거울을 두 줄로 배열하여 외부의 햇빛이 성당 내부를 비출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중심 제단에는 십자고상 감실 위에 마치 하늘을 나는 듯 팔을 벌리고 축복하는 예수님 상체 상이 있고 제대 좌우에는 성모상과 성 요셉상이 있다. 그리고 왼쪽 옆에는 총주교 기념 제단이 있다.
중심제대 이외에 제단이 더 있다 하나는 순교자 기념 제단인데. 제단 뒤 벽면에 117위 베트남 순교 성인화가 걸렸고 그 아래 피에타 상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투언 추기경 사진과 오른쪽에 이 성당 출신인 성 통 비엣 브옹 순교자의 상이 모셔져 있다.
바오로 통 비엣 부옹(Paulus Tong Buong) 성인은 베트남 민 망(Minh Mang) 황제의 근위경비대 고위 장교였다. 성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복음 전하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를 적극 도와주었다. 그의 이런 활동이 적발되면서 1832년 마침내 체포되어 계급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여러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33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그는 처형 전 유언으로 고향이 보이는 곳에 가서 죽고 싶다고 하여 후에 근교에서 순교했다. 그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동시 고향을 사랑한 성인이었다.
또 하나는 성모님을 모신 제단이다.
후에 대성당은 주교좌 성당에 어울릴 만큼 품격을 갖춘 엄청나게 큰 성당이었다. 투안 추기경과 여러 순교 성인을 배출한 성당으로서 교우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느껴졌다.
오후 3시 40분 대성당 순례를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투언 추기경의 생가로 간다. 투언 추기경의 생가는 걸어서 10분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후에 시 좀 후미진 외곽 마을에 들어서니 입구에 생가를 알려주는 아치문이 있다. 문 양쪽에는 베트남 국기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드려져 있어 섬뜩하다. 조금 안쪽에 들어가면 성모님을 모신 미니 성모당이 있다. 가이드는 이것은 이 마을의 구역 표시라고 한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생가이다.
투안 추기경 생가
웅우엔 반투안 추기경은 1928년 베트남 후에의 외곽 푸캄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쪽으로도 초대 대통령 고딘디엠이 그의 외삼촌이었고, 베트남 천주교 첫 주교인 응오 딘 툭 주교도 그의 외삼촌이었다. 1953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7년 나트랑의 주교로 임명됐다. 그러나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바로 체포됐다. 외삼촌이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을 지내는 등 반혁명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3년간 강제 수용된 이후 투옥과 수감생활을 경험했다. 13년 중 9년은 독방에서 보냈다.
감옥은 그의 사목지요, 주교좌 성당이었다. 하느님 신비를 잊지 않기 위해 나무와 전깃줄로 만든 십자가를 걸었고, 신자들이 위장약이라고 속이고 보내준 작은 약병의 포도주와 손전등 안에 숨겨 들여온 제병으로 홀로 미사를 봉헌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 작은 조각의 제병을 손에 받치고 기쁨과 감사의 성찬의 전례를 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무 십자가에 성경 구절을 새겨 재소자들에게 신앙교육을 했다. 그는 후에 감옥 안에서 봉헌했던 이 가난하고 소박한 미사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다고 회고했다.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일치는 그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다.
13년 동안 극한 상황의 수감 생활을 에서 보여준 영웅적 성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드디어 1988년 석방된 후
해외에 나갔다가 베트남 정부가 ‘기피 인물’로 낙인찍는 바람에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의 성덕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의장으로 발탁했다. 2002년 9월 16일 암 투병 중 향년 74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2017년 가경자로 선포되어 지금 시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옥중 묵상집 ‘지금 이 순간을 살며’는 전 세계 가톨릭신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2000년 한국어판으로도 번역 출간되었다.
정문으로 들어나니 낡은 옛날 건물을 밀어 젖히고 이외로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나타난다. 생가 경당이었다.
경당 내부는 그리 넓지 않다. 제대 뒷벽에 예수님 입상 아래 감실이 있고 벽면에는 예수님 상과 같은 높이로 좌우로 성모님, 성 요셉상 그리고 순교자 상이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 바로 가까이 투안 추기경님과 지역 출신 신학생 순교자상을 모셨다.
우리가 김수환 추기경을 공경하듯 베트남에서도 반 투안 추기경을 공경한다. 두 분 다들 시복 절차 중에 있다. 반 투안 추기경의 다음과 같은 옥중 메시지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의 중요성을 한번 더 환기시킨다.
“성체성사는 내 안에서 매일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며 그분과의 깊은 일치의 표현이자 내 힘과 삶의 원천입니다.” 우리에게도 종종 삶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반 투안 추기경의 눈부신 모범을 기억하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꾸준한 기도와 성체성사의 은총에 우리의 마음을 의탁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면 어떠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오후 5시 반. 오늘의 일과가 끝났다. 멀지 않은 식당으로 가서 와인을 곁들여 느긋하게 저녁식사. 호텔에 도착하여 순례 일정도 다해가려는 때라 2차 모임 희망자 모임을 가졌는데 객실에서 깜빡 눈을 붙이는 바람에 그만 참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