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여우(守之如愚) -(자기 몸) 지키기에 어리석은 듯이 한다 이상호(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 수지여우(守之如愚) : 守(지킬 수), 之(갈지, -의), 如(같을 여), 愚(어리석을 우)
‘(자기 몸) 지키기에 어리석은 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는 노자가 말한 聰明慧智 守之如愚(총명하고 지혜 있고 슬기로운 자는 자기 몸 지키기에 어리석은 듯이 한다)에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몰라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알지만 오만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은 겸허하며 물어가면서 문제를 조심스럽게 해결하기에 큰 탈이 적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자기 멋대로 오만하게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이 말은 지식인이 겸허할 것을 강조한 말이다. ===================================================================
1. 똑똑한 자는 넘치는데 해방 후 계속된 의무교육의 확대는 이제 문맹자가 제로에 가까울 만큼 사라졌다. 이제 젊은 세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없다. 만약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탓이 아니다. 거의 100% 가깝게 개인적인 탓일 수 있다. 배움의 의지만 있다면 국가와 사회는 그 배움을 지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대학 졸업자가 많다. 고등학교 졸업자와 대학 입학자 수가 거의 같다. 앞으로는 대학도 학생모집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대학이 팽창되어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모두가 고등교육의 혜택까지 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똑똑해진 것이다. 대학 졸업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인이 넘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똑똑해졌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운 자는 많은데, 똑똑한 자는 넘치는데, 진짜 똑똑한 자들은 넘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줄어든 것 같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했던가? 아는 것이 힘이 되고 인격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세상을 갈라치고, 아는 것이 서로 다투게 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지식은 있는데 참된 지식은 숙성되지 못하고, 지식인은 넘치는데 참된 지식인은 길러내지 못했다. 지식인은 넘치는데 지혜인은 길러지지 못했다. 지식은 인격을 연마하고 삶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단순히 삶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도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1% 이내의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인 의사는 넘쳐나는데 참된 의술을 펴는 의사는 줄어든다는 목소리도 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간다. 이런 것도 또한 하나의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배운 자들이 배움을 바탕으로 바른 삶을 살고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며 정직과 성실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그 배움이 도구적 배움에 그치고 배움을 이용하여 이기심과 사회적 정쟁의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이유는 배움의 내면이 요구하는 지혜와 겸허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쩌면 가을 추수를 한 낱알의 곡식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창고에 그 곡식의 낱알들을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는 것이다.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려면 올바른 곳에 마땅한 때에 적절하게 활용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자랑하거나 타인의 우위에 있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식은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성숙의 과정을 거친 것이 지혜가 된다. 지식인은 진짜 총명한 자가 못 된다. 진짜 총명한 자는 지혜인이다. 지식을 도구로만 이용한 자는 언젠가는 그 지식으로 인해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지식에는 겸허와 지혜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도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공자도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고 하여 지식인의 겸허함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젊은 날에 너무 일찍 성공하면 대부분 오만해진다. 그리고 그 오만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흉기가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겸허다. 예로부터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듯이 ‘진짜 총명한 사람은 총명함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듯이 한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수지여우(守之如愚) 한다는 것이다. 2. 수지여우(守之如愚)의 유래 노자가 도덕경에서 聰明慧智 守之如愚(총명하고 지혜 있고 슬기로운 자는 자기 몸 지키기에 어리석은 듯이 한다.)라 하였다. 聰明慧智(총명혜지)에서 聰明(총명)하려면 배워야 한다. 총명은 천지 만물과 인간사의 이치를 알고 깨우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이 배워야 한다. 스스로 탐구하고 궁리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지식을 충만하게 갖추는 가운데 총명함이 깃든다. 그래서 예로부터 배움을 강조하였다. 노자가 무위(無爲)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그 무위(無爲)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배움과 궁리궁행(窮理躬行)은 절대 필요했다. 慧智(혜지)는 지혜 있고 슬기로운 것이다. 세상사 온갖 문제에 접하면서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배운 것(아는 것)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올곧게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겸허함이 절대 필요하다. 공자가 말한 중용(中庸)의 도(道)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중용은 물리적으로 중간이 아니라 성실함이 적절하게 충만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 부족할 때보다 넘칠 때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守之如愚(수지여우) 즉 어리석은 듯이 하라고 했다. 그래야 소중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지부지(知不知)를 강조하였다 (노자 도덕경 제71장) 노자가 말한 지부지(知不知)의 세계를 보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은 병이다.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아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병이 없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병이 없으니 그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이 없는 것이다.(知不知上이요 不知知病이니 夫惟病病이다. 是以로 不病이다. 聖人은 不病이니 以其病病이다. 是以로 不病이다)<老子 道德經 제71장>” 위에서 중심이 되는 말은 知不知(지부지)와 不知知(부지지)이다. 知不知(지부지)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는 겸손의 미덕을 말하는 것이다. 不知知(부지지)는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오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오만하지 말고 겸손할 것을 강조한 것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겸손의 미덕임을 강조한 것이다. 만약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은 대단한 병(病)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병(病-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것)을 병(病)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병(病)을 병(病)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많이 배우고 수양의 도(道)에 이른 성인(聖人)은 병(病)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병(病-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것)을 병(病)으로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이 매우 큰 병임을 잘 알고 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겸손을 최상의 미덕으로 강조한 것이다. 노자의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모든 배움과 수양은 겸손의 미덕을 몸에 익히기 위함이다. 반면에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孔子 論語 爲政>” 고 하였다. 이 또한 겸허의 미덕을 강조한 것이지만 노자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라지만, 노자는 “아는 것도 모르는 체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맥락에 있어서는 같은 말이다. 다만 노자가 겸손의 미덕을 더 강조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노자가 말한 지부지(知不知)의 변은 그것이 곧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이며 최상의 도(道)에 이르는 길이다. 그 길은 최상의 겸손을 실천하는데 있다. 모든 병은 아는 체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도 아는 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인은 바로 그 도에 이른 사람이기에 모든 병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앞에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였다. 살아가다 보면 식자우환(識字憂患)인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안다고 함부로 나서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고, 어설프게 아는 지식을 잘못 말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옛날 왕권 치하에서는 함부로 아는 체하였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 또한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 것이다. 3. 수지여우(守之如愚)하는 삶의 지혜 예로부터 德先才後(덕선재후) 즉 ‘재주보다 덕이 우선이다’고 하였다. 그것은 재주가 있고 총명하면서도 덕(德-착함)이 없는 것보다 재주는 부족하더라도 착함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옛날의 교육은 德先才後(덕선재후)의 교육이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서당에 가거나 서원에 들어가면 행실의 기본 교육부터 하였다. 소학(小學)에서도 소제(掃除) 즉 청소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은 德先才後(덕선재후)가 아니라 재선덕후(才先德後)이다. 재주를 먼저 가르치고 덕은 나중에 가르친다. 아예 덕(德)은 가르치지 않는다. 재주에만 몰입하기에 교권 추락이라는 현시점의 사회적 문제도 일으킨 것이다. 학교 교육은 인성이 망가진 아이를 많이 생산하기도 한다. 그것은 순전히 학교 탓만은 아니다. 부모와 국가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자녀교육과 학교 교육의 중심은 인성교육과 지식교육이라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인성교육은 뒷전이고 지식교육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것은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성 상실의 교육을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삶을 이루고 지배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습관이다. 학자들이 말하기를 인생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학력은 15% 정도가 작용하고 그 성공을 뒷받침하는 85%는 삶의 태도와 습관이라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은 지식도 작용하지만, 태도와 습관이 지배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태도와 습관은 바로 삶의 지혜이며 덕(德)이다. 그리고 그 덕의 중심에 겸손의 미덕이 자리 잡고 있기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알지만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연찬과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 연찬의 노력이며 그 연찬의 중심에는 겸손의 미덕이 도사리고 있다. 다 안다고 여기면 더 공부할 것이 있겠는가? 두 번째는 학습하는 자세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아는 것을 내세우고 타인에게 말하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식을 가슴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입으로만 습득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날 넘쳐나는 지식은 표피적인 지식이다. 입으로는 지식을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지식인이 넘친다. 그것은 단순히 알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지 깨닫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습에서 중요한 것은 알고 나서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 학습에는 겸손과 인내가 깃든 학습이다. 세 번째, 요즈음 사람들의 지식을 대하는 마음은 조급하다. 빨리 많은 것을 접해야 한다.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다 보니 긴 글이나 무게감이 있는 철학 서적이나 역사 서적 등은 골치 아프다고 읽지 않는다. 짧고 재미있는 글을 우선한다. 그러니 지식은 있지만 체계화되지 못하고 지식인은 넘치지만, 개념화된 지식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지식은 어떤 것이든 깊고 오묘한 구석이 있다. 그런 깊고 오묘한 지식을 깨닫는 것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조급함으로 말을 달리듯 지식을 읽고 습득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따져 새기는 노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벽돌책 한 권을 평생 읽으면 어떠하랴. 그 세계를 체득할 수만 있다면. 네 번째, 평생학습의 자세다. 배움은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평생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 평생 배움의 의지를 가진 사람은 평생 자기를 다스리고 연찬해 간다. 그래서 삶이 더욱 윤택해지며 겸손해진다. 이런 평생학습을 이루는 저변에는 겸손의 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고 부족하다고 여기기에 계속 공부하게 되어 있다. F. 라블레는 “양심 없는 지식은 인간의 혼을 멸망케 한다(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고 하였다. 유명한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를 일곱 가지 사회악이라 하여 경계하였다. 모두 겸손의 미덕과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리라 노자는 죽는 순간까지 공부하였다. 공자도 죽는 순간까지 공부하였다. 소크라테스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반추해 보면 나는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오만한가를 알 수 있다. 노자가 말한 수지여우(守之如愚)는 곧 겸손의 미덕이야말로 자기를 지키는 최상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우리는 아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노자의 말처럼 진짜 총명하고 지혜로운(聰明慧智) 자는 겸손의 미덕으로 守之如愚(자기 몸 지키기에 어리석은 듯이 한다) 하리라. 지부지(知不知)의 참 의미를 새기고 실천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