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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 화살표 따라서 종적 감추기>의 줄거리 :
예수님 공생애의 의미는 이 세상 삶의 개선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눈과 귀와 손이 닿을 수 없는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입니다. 천국을 가리키기 위해서 천국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이 이 화살표를 따라 천국으로 시선을 붙박이하고 예수님이 만드신 천국 길을 따라 감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종적을 감추는 일입니다.
천국 화살표 따라서 종적 감추기
(창세기 50:1~26)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야곱은 향년 백사십칠 세로 죽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대로 두었다가는 심각하게 부패하기 때문에 의원에게 명하여 미라로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의 허락을 받아 시신을 운구하는데 그 행렬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과 요셉의 집안사람들은 물론이고 바로의 모든 신하들, 궁전의 원로들, 애굽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던 원로들까지 다 따라나섰고 병거와 기병도 운구 행렬에 참가했습니다.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았을 뿐인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왕들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이만큼 굉장한 장례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한편 이렇게 장례를 마친 후에 애굽의 고센으로 돌아오자,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들이 요셉을 팔았던 사건을 기억하여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요셉은 속이 상해서 한바탕 울고 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뒤에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백십 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본문의 연도를 따져보면 요셉이 죽은 것이 주전 1805년이고, 출애굽은 약 360년 뒤인 주전 1446년에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면 360년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창세기가 끝나며 출애굽기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천국 화살표 따라서 종적 감추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종적을 감춘다는 것은 쉽게 말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종적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서 움직임으로써 아예 이 세상에서 종적 자체가 감추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50장에 걸친 거대한 서사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천국 화살표를 따라 감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종적 자체가 완전히 감추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에서 제시되는 ‘천국 화살표 따라서 종적 감추기’라는 제목은 뒤따라오는 모든 성경 속에서 표현을 달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유일한 주제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50장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성경 전체의 주제를 아예 못 박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는 야곱의 유언 대로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운구하여 매장하였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야곱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 야곱이 평생 한 모든 일을 다 합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적인 크기에서 그렇고 의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죽은 후에 사십 일에 걸쳐 부패를 방지하는 미라 처리를 합니다. 그리고 칠십 일 동안 애굽 전국이 곡하는 기간으로 정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히브리 유랑민의 죽음이 초강대국 애굽의 국장으로 치러집니다.
예를 들어 강릉에서 살던 제가 죽었는데 미국 전체가 칠십 일을 곡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렇게 거창한 장례에 대한 서술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떠올려 봅니다. 창세기 25장 7~10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장례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35장 28~29절을 보면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라는 짤막한 묘사로 끝입니다.
시대를 달리하여 왕이었던 다윗의 죽음은 어땠을까요? 열왕기상 2장 10절을 보면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는 표현으로 끝입니다. 부귀영화의 최고봉을 누렸던 솔로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 11장 43절을 보면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에 장사 되고…”라고 했습니다. 한편 신약에 와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 요한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떻게 장례했는지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야곱의 장례를 이토록 거창하게 기록하신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이 장례가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라는 야곱의 유언을 따라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이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종적이고 자취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는 약속의 땅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취를 그리워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사실 시신이 어디에 묻히든 야곱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장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습니다. 바티칸 성당에 베드로가 묻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확증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시신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대상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려는 뜻과 계획이 더 이상 없는 대상이 시신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시신을 장례한 사건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거창하게 묘사됩니다.
야곱은 사십 일간 부패 방지를 위해 미라 처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국장으로 애굽 전국에 칠십 일 동안 곡하는 기간을 선언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총리 요셉은 알아도 야곱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야곱의 죽음을 국장으로 선언하면서 애굽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총리 요셉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다는 가나안 땅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칠십 일 동안 애굽 전국이 곡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야곱의 장례에 쏟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야곱이 어디에 묻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시신은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됩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흔적이자 자취이고 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총리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자기의 여호와 하나님을 굉장히 그리워하고 사랑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장례를 통해 야곱의 마음속에 있던 그리움과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야곱의 시신에는 생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취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지지만 당시로서는 가나안 땅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일한 자취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야곱의 시신을 운구하는 장례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이 행렬은 마치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화살표와 같은 모습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종적이고 자취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가나안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을 자기 주체성으로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의 십칠 년은 요셉을 계기로 영광의 하나님이 참 복임을 알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진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백사십칠 년의 생애를 마친 야곱의 일대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야곱은 마지막으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향해야 할 곳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삶의 현장이 아닙니다.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천국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죽음은 바로 이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장례와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예표가 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듯이 예수님은 천국에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시신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듯이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다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야곱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국을 믿은 것도 아니고 사실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봄으로써 천국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천국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천국이라는 단어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당시의 애굽에서는 야곱을 통해 일어났고 이러한 야곱은 예수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공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오신 천국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과 행위를 표적 다시 말해 사인(sign)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인이란 가리키는 화살표입니다. 예를 들어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을 보면 ‘부산 300km’라고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이루어진 모든 말씀과 행위는 당신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떠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였습니다. 창세기 50장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이 칠십 일 동안 곡하며 가나안 땅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공생애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만 계셨다면 우리는 천국을 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에 내려오셨다가 다시 천국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공생애 3년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천국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화살표를 보아도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살표를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화살표가 부산을 가리키고 있어도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화살표를 따라 아예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후 요셉의 형들은 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그런 일은 바라지 않으셨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요셉에게 전달합니다. 이를 들은 요셉은 마음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을 불러서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합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말대로 하나님은 애굽에 팔린 요셉을 통해 온 중동 땅을 짓누르는 불가항력의 기근으로부터 많은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 사건에 대해 형들의 악행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총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형들에게 요셉은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요셉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합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동생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은 존재를 제거했다는 관점에서 살인과 똑같은 악행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존재가 형들의 삶의 현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동생을 제거한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형들의 삶의 현장에 기근이 덮이게 하십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기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요셉은 그 기근의 현장으로부터 제거된 상태였고,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기근의 현장에서 제거된 요셉은 형들의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신비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이와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제거된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구원이란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종적을 감추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 마음이 살아서 관여하고, 관심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흔적 자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기근으로 덮여 있기에 마음 채움이 불가능합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에 무엇인가를 채웠는데 그것이 영원할 때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내가 돈을 좋아해서 돈을 벌었다면 돈으로 마음을 채운 것입니다. 그런데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돈은 생명도 아니고 영생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으로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내 육체가 죽으면 내 마음을 채웠던 성공한 자식, 똑똑한 자식, 인기 있는 자식, 형통하는 자식은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생명도 아니고 영생도 아닙니다.
이처럼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이 기근입니다. 이렇게 기근으로 덮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형들이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요셉을 제거했는데 결국 제거된 요셉이 구원의 길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제거했지만, 제거된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만 생명은 가능합니다. 제거된 요셉과 함께함으로써만 형들이 기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존재는 제거된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만 기근으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예수님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천국으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 성경에 근거해서 ‘구원을 받음’과 ‘구원을 이룸’으로 나눴습니다. ‘구원을 받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룸’은 이 땅에서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다움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결국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이 땅에서는 아들다운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구원을 받음’이란 마음을 채울 거리가 없는 기근에 덮인 세상에서 내 존재가 제거되고 종적을 감추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남아서 무엇인가를 관여하고 있다는 흔적 자체가 없어질 만큼 종적을 감추는 것이 ‘구원을 받음’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맥락에서 ‘구원을 이룸’이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직면하여 아버지로 채우는 것입니다.
기근으로 덮인 세상에서는 아무리 애를 쓰고 추구해도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설령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져도 마음의 기근은 전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음이 이 세상 것들에 매여서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족관계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에 묶여서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요셉이 형들의 삶의 현장에서 제거되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제거되듯이, 내 마음도 세상에서 제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제거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있는 곳에 형들이 와서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 마음이 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제거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없어지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요셉이 제거되고 예수님이 제거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종적을 감춰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바람과 관심 같은 것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어야 합니다. TV를 켜면 온갖 뉴스가 나옵니다. 그러한 일들에 여러분의 관심이 남아있다면 종적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종적 자체가 없어져야만 합니다. 마음이 어떤 것에든지 묶여있고, 지금도 무엇인가를 매듭짓기 위해서 이 세상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안 됩니다. 그렇게 종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아예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흔적이 없어지도록, 존재가 제거된 예수님과 함께 내 마음의 종적도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세상에서 제거되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공생애 전체가 화살표가 되어서 가리키시던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기근의 땅을 벗어나 풍요로움과 풍성함이 기다리는 생명의 땅으로 가라고 가리키셨습니다. 그 가리키신 곳으로 우리 마음이 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제거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거하신 길을 따라 공생애 때 화살표로 가리키신 천국으로 가는 길을 실제로 만드신 것입니다.
종적이란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서 종적을 찾을 수 없게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제거되신 것처럼 우리 마음도 세상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도 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천국입니다. 이 화살표를 따라 제거된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천국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시신이 가나안을 가리키는 것처럼 예수님의 공생애는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리키신 대로 천국으로 가려면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출 정도로 제거되어야 하고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십자가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자꾸 죽었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의 종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나의 존재가 세상에서 제거된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요셉을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의 삶의 현장은 기근에 덮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요셉을 제거한 일을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천국을 가리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으로 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존재가 완전히 제거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거하신 상황을 구원의 길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제거되는 것이 ‘구원을 받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을 이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50장의 결론입니다. 이 결론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어서 우리를 성경 속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자체가 우리 마음이 가야 할 천국을 가리키는 화살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개선되기를 바라셔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요셉이 제거되었듯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제거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존재의 핵심인 마음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기근이 덮인 곳입니다. 기근이 덮인 곳에서 제거되는 것이 ‘구원을 받음’입니다. 그리고 기근을 피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구원을 이룸’의 마음 채움이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계속 가리키셨던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하늘로 갈 수 없으면 ‘구원을 이룸’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려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존재가 제거되는 ‘구원을 받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존재의 핵심인 마음이 세상에서 제거된다는 것은 곧 내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시고 생활 속에 적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이 문제 앞에서 마음이 제거되었는지, TV를 볼 때 마주하는 뉴스들 앞에서 마음이 제거되었는지 확인해 봅니다. 어제까지 마음을 잡아당기던 문제가 있다면 오늘 ‘내가 이 문제 앞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 문제 앞에 내 종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 내 흔적과 자취가 남아서는 안 된다. 내가 계속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시가 남아서는 안 된다.’라고 마음먹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그 문제 앞에 여러분의 종적이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그 문제 앞에서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음’입니다. 아직도 관심하는 것이 있고, 아직도 걱정되고, 아직도 근심되고, 아직도 염려가 되십니까? 무엇인가 망할 것 같고, 안 될 것 같습니까?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존재감을 느끼고 소유감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이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면 생각과 관심과 염려 같은 것들은 작동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오직 화살표를 따라 올라간 하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관계하고 계시는 이 순간에 내 마음도 참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관계하는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관계하고 하나님을 버는 일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 마음 채움이 일어날 수 없는 기근의 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천국 화살표를 따라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종적을 감춰야만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결론이고 앞으로 살펴볼 성경 65권 전체를 규정하는 주제입니다. 표현은 달라도 천국 화살표를 따라 감으로써 이 세상에서 존재의 종적을 감추어야 한다는 주제는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삶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짐으로 내 흔적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음’이고 ‘구원을 이룸’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별스러울 정도로 거창한 야곱의 장례식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화살표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화살표가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을 가리키고 우리 마음이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형들이 요셉을 팔았을 때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제거되어 종적을 감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