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모르간과 그의 저서 ≪고대사회≫
- 실천은 인식의 내원이다
1877년 미국사람 모르간의 저서 ≪고대사회≫가 발표되자 마르크스는 재빨리 그 가치를 발견하였다. 엥겔스는 그 저서를 오늘날 보기드문 획기적 저작의 하나라고 찬양하였으며 또 그 저서의 성과를 운용하여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이란 노작을 집필하였다. 엥겔스는 이 노작에다 루이스 헨리 모르간의 연구성과와 관련하여란 부제를 달았다.
≪고대사회≫는 원시사회를 연구한 훌륭한 저서이다. 모르간 이전에 사람들은 원시시대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거의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고대사회≫는 인디안 종족사회의 대량적인 실제 자료에 근거하여 이런 사회조직을 깊이 연구하고 나서 과학적 가치가 큰 일련의 견해를 제기하였다.
미국자본주의의 상승기에 생할한 모르간이 어찌하여 원시사회의 씨족상태를 이처럼 투철하게 알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 야기가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미국에는 그때까지도 개화되지 못한 원시종족들이 남아있었다. 모르간은 일찍 청년시절에 인디안민족 이로쿠오이 사람들의 풍속, 습관을 연구하는 단체를 지도하였다. 그는 인디안들이 살고있는 곳을 여러 번 찾아가 그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였으며 또 그들을 벗으로 사귀고 자주 내왕하였다. 인디안 종족사회에 대한 인식을 직접 얻기 위하여 1846년에 그는 아예 이로쿠오이 사람의 양아들로 되어 그 종속의 한 성원으로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외계에 알려지지 않은 인디안사람들의 풍속습관과 그들의 의식을 알게 되고 그들의 경제조직사회조직, 혼인, 가족, 풍속습관, 예술 및 종교 등등을 돌아다니며 조사하고 분석 비교하는데서 원시종족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모르간이 ≪고대사회≫를 쓰게 된 이 사실은 철학의 중요한 도리, 즉 모든 진정한 지식은 다 직접적 경험에서 오며 실천은 인식의 토대라는 도리를 말하여준다.
제17장에서 우리는 실천이 불가지론에 대한 가장 유력한 반박으로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이 장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실천이 인식의 내원이라는데 대하여 말하여 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실천의 관점을 떠날 수 없다. 그러면 실천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이 문제로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실천이란 목적있게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는 인간의 물질적 활동이다
실천이란 새로운 명사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에도 적지 않은 철학자들은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각 유파의 철학마다 크게 달랐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 명조때의 주관적 관념론철학자인 왕양명은 ≪지행의 합일≫을 주장하면서 사유활동 자체가 바로 실천이라고 인정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상에서 또 어떤 관념론자는 실천을 개인의 수신양성(修身養性)1)≪1) 수신이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이며 양성이란 자기의 천성을 길러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역자 주≫으로 해석하였으며 또 어떤 관념론자는 실천을 봉건적 예의활동이라고 말하였다.
관념론철학자들 가운데서 실천에 대하여 심각한 견해를 제기한 사람은 헤겔이다. 그는, 실천은 창조적 활동이 라는 이 본질적 특징에 접촉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실천은 절대이념의 정신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현대자산계급의 실용주의철학은 실천을 개인의 맹목적인 모험활동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실천에 대한 과학적 개념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유물론자들, 예를 들면 포이에르바하도 실천에 대하여 운운하였지만 실천을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상적인 생활실천에 국한시켰다. 포이에르바하는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늘 이런 실천의. 역할을 제기하고 단편적으로나마 실천의 의의를 추측하였지만 실천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끝내 얻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구유물론의 주요한 결함의 하나이다.
그러면 실천이란 무엇인가? 제일 처음으로 실천에 대하여 과학적 설명을 가한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을 목적있게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는 인간의 물질적 활동의 전일체로 간주한다. 보다시피 마르크스주의의 실천관은 구유물론의 실천관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구유물론자들은 실천에 대하여 일면적이고도 협애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객관적 세계를 변혁시키는데서 노는 실천의 역할을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입으로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는 것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일부 활동을 실천이라고 하는 때도 있다. 이것이 실천인가? 실천이다. 이것은 생활실천이다. 이것도 목적있게 객관적 대상에 작용하는 인간의 활동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천활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산활동이다. 노동자가 강철을 제련하고 농민이 농사를 짓고 목축민이 양을 기르고 어민이 바다에 나가 어로작업을 하는 것과 그리고 일정한 생산도구로써 자연을 변혁하여 물질적 향리품을 얻는 기타의 활동들은 모두 생산활동이다. 인간은 생산을 해야만 양식과 의복과 집이 있게 되며 정치, 과학, 예술 등 면의 활동에 종사할 수 있다. 생산활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의 기초로 된다.
생산활동에서는 인간의 실천활동에서의 일부 기본특성들이 표현된다.
첫째, 생산은 자연을 개조하는 물질적 활동이다. 다시 말하면 실천은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는 감성적인 물질적 활동이다. 물질세계는 의식에 의하여 개변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힘에 의하여 개변된다. 노동과정에서 물질의 자연력으로서의 인간은 노동수단을 사용하여 자연에 작용하며 노동자체를 통하여 물질적 향리품을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주위의 자연을 개변하며 또한 인간 자신의 본성도 개변한다.
둘째, 생산노동은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동물의 본능적인 활동과는 달리 실천은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과정이 아니라 의식의지도 밑에서 진행되는 활동인 것이다.
셋째, 인류의 생산은 처음부터 사회성을 띠고 있으며 실천은 사회적 실천이다. 사회적 실천과정에서만 이와 서로 관련되는 개인의 실천활동이 있을 수 있다.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며 실천의 형태로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업이 발전됨에 따라 실천도 여러가지 형태의 실천으로 나뉘어진다.
총적으로 말하여 객관적 세계를 합목적적으로 개조하는 물질적활동을 실천의 가장 본질적 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제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제1권, 23쪽)라고 말하였다. 사회적 실천은 생산실천을 토대로 한, 층차가 많은 사회적 활동의 전일체이다.
과학실험은 근대에 와서 생산실천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상대적 독립성을 가진 실천활동이다. 과학실험은 기구설비를 이용하여 실험조건을 통제하고 계획적으로 조성한 자연현상의 변화를 주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생산실천에 복무한다. 과학실험은 그 역할이 날로 뚜렷해지고 있으며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며 개조하는 강유력한 수단으로 되었다.
실천활동은 또 다른 방면의 실천활동도 있다. 사회생활조건의 개변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사회정치생활은 내용이 매우 광범위한 실천활동이다. 계급사회에서 계급투쟁은 사회생활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주므로 결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밖에 문화, 교육, 예술 등 활동도 모두 실천활동이다. 객관적 활동으로서 볼 때 그것들은 정신적 생산이란 이 면을 포함한 물질적 활동이다.
총적으로 말하여 천문관찰로부터 모르간식의 사회조사 그리고 예술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실천활동은 층차와 형태가 많은 물질적 활동이다. 생산활동이 가장 기본적인 실천활동이라는 것을 승인하지 않아도 옳지 못하거니와 실천을 생산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도 옳지 못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그릇된 사상의 영향 밑에 한 시기에 있어서는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일하는 것만 실천으로 보고 실험실에서 실험하거나 설계도를 그리거나 병실에서 병을 보거나 교실에서 교수(강의)하거나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들은 모두 실천으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르크스주의의 실천관에 대한 곡해이다. 물론 지식인들이 육체노동에 적당히 참가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데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생활은 하나의 전일체이다. 우리의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나 할 것 없이 모두 각자의 일터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실천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어느 한 부문이 없어도 안되는 것이다.
인식은 실천에서 온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생활에서의 실천의 의의를 과학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그 원인은 역사적 유물론이 인간생활에서의 노동생산의 위치, 역할을 발견하고 논증한데 있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실천과 인식을 연결시키고 실천이 인식의 기초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왕의 철학자들은 인식문제를 고립적으로 연구하였으며 특히는 개인의 인식능력 등 문제를 고립적으로 고찰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하여도 인식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사회와 자연은 실천에 의하여 물질적 교환이 진행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인식은 실천을 떠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실천과정에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으므로 독립해서는 의의가 없는 것이다. 인식은 실천을 위하여 복무하며 그 산생과 발전은 필연적으로 실천에 의존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의 관점을 인식론에 도입하여 인식론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인식론면에서 일련의 혁명적 변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유물론자들도 인식은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식을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은 단순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실천의 능동적 작용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소극적이고 직관적인 반영론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만이 실천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인식이 객관적 세계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은 능동적이며 혁명적인 반영론, 즉 실천에 기초한 유물론적 반영론이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유물론은 객관적 세계가 인간에 작용하여야 인간이 객관적 세계를 반영, 즉 인식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기실 인간은 객관적 세계에 작용하고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여야 객관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인식은 바로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는 실천에서 온다. 아래에서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자.
인식이잔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간두뇌의 반영이다. 그러나 실천을 떠나서는 인식이 생길 수 없다. 인도에서는 승냥이의 습성을 가진 아이를 발견하였었다. 한 어린아이가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숭냥이에게 물려 승냥이 굴에 들어가서 승냥이와 함께 살며 자라났다.
이 어린아이는 승냥이의 습성을 가지게 되어 생고기를 먹었고 땅에서 기어다녔으며 노동할 줄도 모르고 말할 줄도 몰랐으며 사유도 할 줄 몰랐다.
우리 나라 명조시기에 명성조는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건문제의 아들 주문규를 붙잡아 가두었다. 당시 두살밖에 되지않은 주문규는 몇십년동안 갇혔다가 57세가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공자는 ≪30세에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고 40세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50세에 천명을 알게 되었고·..≫라고 말하였다. 이 요구에 의하면 주문규는 57세가 되었으니 마땅히 견식이 대단한 사람으로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석방되어 나온 주문규는 소와 말도 구별하지 못하였다.
승냥이에게 물려가서 자란 어린아이는 인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지혜를 잃어버렸다. 주문규는 50여세까지 살았지만 객관적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보다시피 인간이 두뇌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인식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정황을 볼 수 있다. 경험 많은 어부는 배에 앉아서 물소리만 듣고서도 물밑에 어떤 고기 떼가 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경험많은 사냥꾼은 밤에 야수의 눈에서 반사되는 같지 않은 빛을 보고도 멧돼지인가 여우인가를 판단할 수 있으며 사의(蛇矣)는 뱀한테 물린 상처만 보아도 코브라에게 물렸는가 살모사에게 물렸는가를 곧 알 수 있다. 어부, 사냥꾼, 사의의 지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공예미술전람을 참관하게 되면 우리는 틀림없이 기교가 뛰어난 상아조각에 반하게 될 것이다. 웅위로운 산봉우리며 수려한 하천이며 아담한 정자이며 아름다운 원림을 표현한 아름다운 상아조각들은 그야말로 황홀하기 그지없다. 상아조각예인들에게 어찌하여 이처럼 뛰어난 기예가 있게 되었는가? 그들의 기예는 선천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지식, 재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온 것이다. 실천에서 인식이 생기고 지혜가 나온다. 모택동동지는 ≪실천론≫에서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이 도리를 매우 생동하게 정식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식을 얻으려면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에 참가하여야 한다. 배의 맛을 알려면 배를 변혁시켜야 한다. 즉 직접 먹어보아야 한다. 원자의 구조와 성질을 알려면 물리학적 및 화학적 실험을 하여 원자의 상태를 변혁시켜야 한다. 혁명의 이론과 방법을 알려면 혁명에 참가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오직 객관적 세계를 개조하는 활동에서 능동적으로 사물과 접촉하여야만 사물의 상호연관을 발견할 수 있으며 사물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으며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실천은 인식의 내원일 뿐만 아니라 인식발전의 동력이기도 하다. 인간의 인식은 어찌하여 모르던 데로부터 알게 되는 데로, 많이 알지 못하던 데로부터 비교적 많이 아는 데로, 저급적이던 데로부터 고급적인 데로 발전하게 되는가? 관념론은 이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직관적 유물론은 인식을 거울에 비치는 식의 반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도 이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오직 마르크스주의철학만이 이것은 인식과 실천과의 모순운동의 결과라고 지적하였다. 인식과 실천과의 모순운동과정을 놓고 볼 때 일정한 조건에서는 인식이 실천에 앞서 나아가면서 실천의 발전을 추진하는 정형, 예를 들면 그 어떤 이론연구의 성과가 있은 후에 그에 상응되는 생산기술부문이 개척되는 정형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총적을 보면 인식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하여 인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실천이 인식을 향하여 과제를 제기한다. 근대자연과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수요에 적용되며 발전된 것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사회에 기술상의 요구가 나타난다면 그 요구는 10개 대학보다 더 많이 과학을 전진시 킨다.≫(≪엥겔스로부터 W. 보르기우스에게≫,≪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4권, 505쪽)
조종학, 핵물리학은 최초에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무기를 발전시킬 요구에 의하여 발전된 것이다. 사회에 대한 인식도 역시 이러하다. 19세기 40년대의 구라파 노동운동의 실천은 마르크스주의를 낳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러시아 무산계급혁명의 실천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을 추진하였으며 레닌주의를 낳았다.
실천은 인식에 과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인식에 필요한 수단도 제공한다. 20세기의 자연과학에서의 거대한 성과를, 즉 상대성이론의 창립, 원자구조와 소립자의 발견 및 양자역학의 산생, 전자계산기의 발명 및 조종학, 정보이론, 계통학의 형성, 분자생물학의 성과 특히 핵산의 분자구조와 유전암호의 발견들은 실천의 수요에 의하여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실천이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뉴톤은 위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는 상대성이론이 창립될 수 없었다. 망원경이 없었더라면 갈릴레이가 1608년에 은하는 무수한 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현미경이 없었더라면 후크가 1665년에 세포를 보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며 쉴라이덴과 쉬완의 세포학설이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미립자가속기가 없었더라면 원자핵내부의 구조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소립자물리의 연구를 깊이 진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유력한 추동력을 가지 로케발동기가 없었더라면 우주비행원을 우주와 달나라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며 우주의 물질운동법칙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천은 인식에 과제를 제기하고 수단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실천을 떠나서는 인식성과를 응용하고 발전시킬 수도 없다. 예를들면 동력으로서의 증기를 사람들은 오래전에 벌써 알고 있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증기의 힘으로 자기의 기계완구를 돌리었으며 문예부흥시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증기의 힘으로 대포를 끄는 도안을 남겼다. 17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물을 뽑아 올리는 증기펌프를 설계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직 증기를 동력으로 할 필요가 있는 공업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설계들은 응용되고 보급될 수 없었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대공업이 발전되어 동력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고 광정의 배수와 방직업의 공작기계에 동력이 절실히 요구되어서야 와트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응용되었으며 오늘의 수준에까지 발전하여 왔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매우 정확하게 말하였다.
≪인간사유의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직접적인 기초는 단독적 자연 그 자체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 의한 자연의 변혁이다. 인간의 재능은 인간이 자연을 변혁시키는 것을 습득한 정도에 따라 발달하였던 것이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551쪽)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인식의 산생과 발전은 조금도 실천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실천의 관점을 인식론의 첫째의 기본적인 관점으로 간주한다.
실천은 인식의 내원이며 인식발전의 동력일 뿐만 아니라 인식의 정확여부를 검증하는 규준이기도 하며 인식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는 뒤에서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사상을 산생하는 가공공장이다
우리는 인식은 실천에서 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한 인식에는 지식, 재능이 포괄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실천에서 온 것이다. 인류의 인식의 총체에서 보아도 이러하며 개인을 두고 말하여도 역시 이러하다. 개인을 두고 말할 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셍각한다. 그들은 한사람의 총명과 재질은 전적으로 두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좋은 두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두뇌에만 의거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더면 인재로 될 수 있는가? 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교육가 도행지는 절은 시절에 왕양명의 ≪지(知)는 행(行)의 시원이다≫라는 견해의 영향을 받아 이름을 도지행이라고 지었다. 후에 그는 실천과정에서 ≪지는 행의 시원이다≫라는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실천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며 실천한 후에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이름을 도행지라고 고치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이름을 고친 것은 참 잘 고친 것이다.
공자는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성인이 있다고 하였으며 노자도 ≪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17세기의 프랑스철학자 데카르트는 천부관념을 제기하고 인간의 어떤 인식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이런 관점은 실천이 인식의 내원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인간의 의식을 선천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이런 관점을 철학에서 선험론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은 관념론적인 것으로서 옳지 못한 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도 본적 이 없다.
인간의 인식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두뇌의 반영이다. 인간의 두뇌는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없으면 물론 인식도 있을 수 업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자체가 인식을 낳을 수는 없다. 인간의 두뇌는 인간이 외부세계와 접촉하고 그것을 반영할 때에만 인식을 얻을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실천과정에서 외부세계와 접촉하지 않는다면 외부세계가 인간의 두뇌에 반영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가공공장과 같은 것이다. 가공공장은 원료를 가공할 수 있을 뿐이다. 원료를 가공공장에 들여보내야만 제품이 나올 수 있다. 인간의 두뇌도 마찬가지로 실천에서 얻은 외부세계의 감성적 재료를 가공할 수 있을 뿐이다. 실천을 떠나면 객관적 사물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될 수 없다. 그 어떤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두뇌는 보통사람들의 두뇌와 마찬가지로 가공공장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며 이 이상 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뉴톤을 놓고 보면 그는 대과학자이며 그의 두뇌는 영민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식도 마찬가지로 실천에서 온 것이다. 과학에서 달성한 그의 휘황한 성과는 그의 두뇌에서 자유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깊이관찰하고 연구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 뉴톤이 자기생애의 마지막 25년간에는 과학실천을 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하느님을 연구하였으므로 아무런 발명, 창조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실천을 떠나 인식내원의 대문이 막혀버린다면 인간의 총명과 재질은 고갈되고 만다. ≪실천을 하지 않는 학자는 달걀을 낳지 않는 암탉과 같다≫는 속담이 있다. 학자를 암탉에 비유하여 불손한 점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철리가 풍부한 이 말은 실천을 떠나게 되면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별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동하게 말하여 준다. 모든 사상가, 과학자들의 탁월한 학설, 위대한 이론은 본래부터 그들의 두뇌에 있던 것이 아니며 그들의 두뇌로 근거없이 상상해낸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도기관들에서 옳은 결책을 내오자면 반드시 실제에 깊이 들어가 조사연구하여야 한다. 영도자로서 만일 실천과의 연계를 끊어버린다면 옳은 사상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정확한 사상은 실천에서만 올 수 있다. 실천에서 과학이 나오고 이론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다.
지식과 재능이 실천에서 온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생리면에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천품의 차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가 모짜르트는 두살 때에 벌써 피아노연주를 할 수 있었으며 수학가 가우스는 세살 때에 벌써 아버지의 장부결산에서 생긴 오산을 고쳐줄 수 있었다. 최근년간 우리 나라에서는 우수한 소년들을 대학생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런 소년들에게는 확실히 뛰어난 재능과 지혜가 있다. 우리는 또 같은 가정환경과 같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어떤 어린이는 총명하고 어떤 어린이는 좀 둔한 것을 늘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일부 선천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건전한 두뇌는 지식, 재능을 얻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전제인 것이다. 선천적인 멍청이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재로 될 수 없다. 우리 나라 혼인법에 직계친족간과 3세대 이내의 방계친족 간에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선천적인 기형아와 멍청이가 나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문화교육사업과 위생보건사업의 발전에 따라 상응한 여러가지 우생조치를 계속 취하여야 한다. 이것은 산아의 건강을 보장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생학은 인식론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답을 줄 수 없다.
선천적 자질이 높은 것은 인재로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현실로 되게 하자면 반드시 일정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사회와 환경 등 객관적 조건을 제외하고는 개안의 부지런한 실천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모짜르트가 음악가로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매일 16∼17시간씩 애써 연습하였던 것이다. 매난방이 거둔 성과는 그가 다년간 예술무대에서 실천한 결과이다. 소년시절에 매난방을 가르쳐주던 선생이 매난방은 조상의 복이 없어서 경극을 배워낼 수 없는 아이라고까지 말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동무들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선천적 자질이 좋은 사람도 후천적인 실천을 떠나서는 인재로 될 수 없다. 우리 나라 송조 때 강서성 금계라는 곳에 방중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5살 때에벌써 시를 지었는데 머리가 영민하여 어떤 사물을 지목하여 시를 지으라고 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내곤 하였다. 그러나 후에 교육과 단련을 받지 못하게 되어 그의 지력이 점점 감퇴되었으며 20세가 되어서는 평범한 인물로 되어버렸다. 선천적 자질이 그리 좋지 못한 사람들가운데서 인재로 된 사람이 적지 않다. 다윈은 소학교를 다닐 때 선생들에게서 지력이 평범한 학생으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어느 한 어린이는 거위알을 깔고 앉아 게사니(거위)를 깨운다고 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둔한 아이라고 하면서 그를 보고 웃었던 것이다. 그는 소학교에서 공부할 때 성적이 대단히 좋지못하였으므로 전정이 없는 아이로 인정되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세인이 잘 알고 있는 대발명가 에디슨이다.
요컨대 인간이 지식을 얻자면 건전한 두뇌가 있어야 한다. 두뇌의 생리적 소질이 좋은 이것은 지혜와 재능을 낳는 유리한 요소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어디까지나 가공공장에 불과한 것이므로 실천에서 오는 원재료가 없으면 아무런 제품도 가공해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치중하여 개인의 지식과 재능의 내원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실천은 사회적 실천이며 인간의 인식능력도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한시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사회적 견지에서 말할 때 사람들 사이에 정보교환이 없으면 개인의 인식활동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발전의 견지에서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조건 하에서만, 그리고 그 조건들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인식 할 수 있다.≫(≪자연변증법 ≫,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562쪽)
물론 우리는 이시진, 아인슈타인과 같은 개인이 인류의 인식발전에 대하여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
인간의 모든 지식은 실천에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직접적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은 지리, 역사, 우주공간, 인간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히말라야산꼭대기에 올라가 본 사람, 만리장성의 원천을 답사해 본 사람, 동북의 사도(蛇島)에 가서 고찰해본 사람, 시쐐반나에 가서 진귀한 금수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지방에 가본 사람은 매우 적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곳에 가본 사람들에게서 또는 그들이 촬영한 영화나 그들이 편찬한 신문, 잡지, 서적들을 통하여 관계되는 지식들을 얻게 된다.
모든 지식이 다 실천에서 온다는 것은 지식의 총체를 놓고 하는 말이다. 개인의 지식에는 두 부분, 즉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이 있다. 그 간접적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또 직접적인 경험인 것이다. 사도에 가보지 못한 우리에게 있어서 사도에 관한 인식은 간접적 경험이고 사도에 가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직접적 경험이다. 우리는 사도에 가본 사람들에게서 사도에 관한 인식을 얻었다. 그러므로 사도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역시 직접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개인이 직접적 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물론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제한이 있으므로 개인은 반드시 간접적 경험을 대량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비행원은 달에 올라가서 달이 공기도 물도 생명도 없는 정적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인식을 기록하게 되면 그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공동의 재부로 되므로 저마다 모두 달에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16세기에 마젤란과 그가 영솔한 265명의 선원들은 근 3년동안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247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지구를 한바퀴 돌고서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오늘 우리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기 위해 마젤란의 역사를 재연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간접적 경험도 귀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톤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전인들의 인식성과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떠한 과학성과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철학이 인식은 실천에서 온다고 인정하면서 실천 제1의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로 서책지식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서책은 지식의 해양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만 옛일과 오늘의 일을 넓고도 깊게 알 수 있으며 시야를 넓힐 수 있다. 실천의 중요성만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독서의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4개 현대화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책을 보지 않아도 안되거니와 책을 적게 보아도 안된다. 마르크스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천재로 된 것은 물론 그가 노동운동의 실천에 직접 참가한 것과 관계되지만 마르크스가 마르크스로 되어 마르크스주의학설을 창시하게 된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책을 많이 본데 있다. 그는 인류가 자본주의제도에서 쌓은 그런 지식들을 튼튼한 토대로 삼았던 것이다. 인류사회에서 창조된 일체에 대하여 그는 어느 한가지도 홀시하지 않고 비판의 태도로 그것들을 심사하였다.2)≪2) ≪청년동맹의 제 과업≫, ≪레닌선집≫, 한문판, 제4권, 342쪽≫ 그는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보았는데 그가 늘 앉아 책을 보던 자리의 세멘콩크리트 바닥에는 발자취가 뚜렷이 나 있었다. 이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는 미담으로 되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부지런한 학습정신을 따라 배워 부지런히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두뇌가 받아 들일 수 있는가? 받아 들일 수 있다. 현대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사람의 두뇌가 일생동안 저장할 수 있는 각종 정보의 최고치는 5억책의 지식에 해당된다고 한다.
한 도서관의 장서가 1,000만책이라면 이 5억책은 50개의 이런 대형도서관과 같은 것이다. 인간두뇌의 기억력은 그 예비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특히 청년시절은 기억력이 좋은 때이며 뇌를 쓰는데 있어서의 황금시절이므로 대뇌의 작용을 더욱 충분히 발휘시켜야 한다. ≪젊어서 노력하지 않다가는 늙어서 한탄해도 소용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도 명기할 필요가 있다. 나이가 젊고 정력이 왕성할 때 시간을 아껴가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물론 사람의 정력에는 제한이 있으므로 책을 읽을 때 아무것이나 마구 읽지 말고 선택하여 읽는데 주의를 돌려야 한다.
물론 독서로써 실천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접적 경험에 대한 이해도 일반적으로는 직접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 우리 나라 송조 때의 유명한 시인 육유는 자기의 작은 아들을 면려하여 다음과 같을 시를 써주었다.
≪옛사람은 학식을 닦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거니, 젊어서 공력을 들여야 늙어서 성사하나니라. 서책에서 배운 지식은 어쨌든 깊지 못하니, 이 도리를 명심하고 일마다 몸소 행할지어다.≫
이 시는 열심히 책을 ≪읽어야하는 한편 실천에도 주의를 돌려야한다는 도리를 말하여준다. 모르간도 직접적인 실천이 없었더라면≪고대사회≫를 써낼 수 없었을 것이며 학술면에서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하였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