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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날의 회상
아저씨가 부엌에 가시더니 오징어포와 4홉들이 소주를 한 병 가져와 주전자에 붓더니 섭의 잔을 먼저 채우고, 자기 잔을 채우면서 “오늘 젊은 자네와 내가 마음껏 취해 보자.” 하고, 잔을 들어 건배를 하시고는 거푸 한잔 마셨다.
오징어 안주를 씹으며 상기된 얼굴로 “지금껏 마누라에게도 말을 안한 그러나 누군가와 한번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젊은 자네와 같이 나눌 수가 있게 된 오늘이 내게는 참으로 행복한 날이다.
자네가 이다음에 소설을 쓰거든 내 이야기를 꼭 한 번 써주기 바란다.” 하시더니 60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았다.
갑오경장으로 범어리 성 참봉(參奉) 댁도 하인들이 대부분 나가고 선출이네 가족과 정돌이 영감 내외, 그리고 어린 딸을 데리고 있는 순달이 엄마만 남아있었다.
참봉 댁 식구는 참봉어른 내외와 손자 석이 도련님이 전부였다.
심성이 착하고 재주가 특출한 석이 도련님은 일곱 살 때 벌써 사서삼경을 줄줄 외워 천재가 났다고 하였다.
재주뿐 아니고 여덟 살 어린나이에 끼니를 굶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다가 부엌에서 일하는 순달이 엄마를 시켜 밥을 먹이게 하고는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계몽편(啓蒙編)을 창호지에 써서 벽에 붙여놓고 가르쳤다.
참봉 어른과 마님은 그런 손자의 소행을 기특하게 보고 순달이 엄마를 시켜 마을 아이들을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해놓고 먹이게 하였다.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것 보다는 밥을 얻어먹는 것이 좋아 참봉 댁 행랑으로 모여 석이 도련님에게 글을 배웠다.
석이 도련님보다 한 살 어린 선출이도 아이들과 같이 글을 배웠다.
용바우는 석이 도련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아들 선출이 형제에게 미쳐 글을 가르칠 생각을 못하였음을 깨닫고 구포 장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동몽선습과 계몽편에 공책도 몇 권 샀다.
청일전쟁이 있고나서 국력이 기울어지면서 일본 세력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참봉 어른은 중인 출신으로 일본 역관을 지냈던 동갑내기 마을친구 박 서방에게 어린 아들의 독선생이 되어 한문과 일본말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들보다 두 살 어린 용바우도 아들과 같이 공부하라고 시켰다.
용바우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재주가 있어 두 번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공부한 용바우는 지방 선비들과 견줄만한 실력에 일본말까지 능통하여 성참봉의 재산관리와 관공서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석이 도련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가족들을 가르쳐야함을 깨달은 용바우는 저녁마다 가족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참봉 어른은 아홉 살 난, 석이 도련님을 물금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여덟 살의 선출이도 같이 입학시켰다.
선출이를 학교에 보내주는 참봉 어른의 속심(屬心)에는 심복 용바우에게 선심을 쓰면서 함께 손자 석이의 시종으로 붙여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동짓달에 태어난 석이 도련님보다 다섯 달 늦게 났지만 설을 하나 지나서 나이는 한 살 어린 선출이지만 키와 체격은 석이도련님보다 숙성하고 힘이 좋아 석이 도련님의 보호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다녔다.
석이 도련님은 두 돌이 체 못되어서 양부모를 잃었다.
수년 째 단오 날이면 낙동강 둔치에서 씨름과 추천(鞦韆) 등 체육대회가 열렸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뜻있는 유지들이 젊은이들에게 애향심과 기세를 살리려고 시작하였다.
동래군, 양산군, 김해군 심지어 창원군과 밀양군과 창녕군에서까지 모여온 젊은이들이 어우러져 힘을 겨루었다.
석이 도련님의 아버지 새서방님은 새벽부터 체육대회 참가할 면내 청년들을 물금장터로 불러 모아 국밥집에서 아침을 먹여 구포 행사장으로 갔다.
미리 머슴들에게 면내 청년들이 먹을 점심과 간식을 준비해서 소달구지에 싣고 마을 부녀들과 함께 오라고 시켰다.
의협심이 넘치는 새서방님은 든든한 재력으로 상서면(주:물금면의 옛 이름) 청년들을 몰고 다녔다.
오후가 되면서 술에 취한 청년들의 기(氣) 싸움이 거칠어졌다.
다대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아녀자들이 추천 타는 아래서 처다 보며 키득거렸다.
추천에 매달려 높이 올라가는 여인들을 처다 보며 손가락질까지 하는 일본 군인들에게 상서청년 하나가 달려들면서 싸움이 났다.
싸움은 삽시간에 일본 군인들과, 상서청년들의 패싸움으로 번져 양산 동래 지역 청년들까지 합세하여 열대여섯 명 되는 일본 군인들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패싸움으로 일본군대가 나서게 될 것을 염려한 새서방님이 나서서 청년들이 싸우지 못하도록 말리는데 피투성이가 된 일본군인 하나가 차고 있던 일본도를 뽑아 마구 휘두르다가 새서방님의 옆구리를 치고 말았다.
새서방님의 비명 소리에 많은 청년들이 흥분하자 파견 나와 있던 경찰관들이 사태가 급박함을 보고 총으로 공포를 쏘아 신속하게 싸움을 해산시켜서 큰 사고는 없었지만 칼에 맞은 새서방님은 옆구리 상처가 깊어 위독하였다.
청년들이 새서방님을 소달구지에 싣고 구포에 있는 일본의원으로 달려갔더니 갈비뼈가 한 대가 나갔으나 장기는 상하지 않아 곧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상처가 잘 낫지 않고 점점 근육이 경직되며 경련까지 일어나 동래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았더니 파상풍이 감염되었다고 하였다.
일본병원에서도 파상풍은 쉽게 치료가 되지 않더니 날씨가 더워지면서 상처가 깊이 곪아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고개조차 움직이지 못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남편을 잃고 얼이 빠져 울던 새아씨는 화병으로 두 돌이 체 못된 석이 도련님을 놓아두고 눈을 감았다.
국력이 없다보니 성 참봉은 일본 군인들에게 당한 아들의 죽음을 어디 가서 호소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일본 군인들이 한 일이라 동래경찰서에서도 우물쭈물하다가 한일합병이 되고 말았다.
양부모를 잃은 석이 도련님은 조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속에 탈 없이 잘 자랐다.
참봉어른은 아들 새서방님이 죽고 나서부터 집안 모든 재산관리를 용바우에게 맡기면서 「집사」라 불렀다.
참봉어른이 용바우를 「집사」라고 부르자 마을 사람과 작인들까지 「손 집사」로 불렀다.
청룡산 자락 양지에 자리한 참봉어른의 조부 진사공 산소에서 묘제(墓制)를 지내던 날이었다.
비문(碑文)을 읽어보던 손 집사가 비석 뒷면에 進士公의 공적을 적으면서 진사(進士)라고 서야 하는 것을 진사(進仕)라고 잘못 쓰인 것을 발견하였다.
50년 전에 세운 비석이라 참봉 어른도 어려서 살피지 못한 일이다.
참봉 어른은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것은 집안의 큰 수치라며 당장 교체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산소의 석물을 아무 때나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며 모두 말려 다음 한식에 교체하기로 하였다.
가을부터 겨울 내 참봉 댁의 화두(話頭)는 진사공 산소에 석물을 교체하는 일이였다.
1919년 한식일은 음력 3월 초닷새(양력 4월 5일)였다.
하필이면 이 날에 유림선비들의 급한 소집이 생겼다.
지난해 가을부터 성 참봉의 숙원이던 유림 선비들과 같이 하게 되면서 임원까지 맡았다.
오매불망 소원하던 유림에 참여하게 된 성 참봉은 유림의 일이라면 집안일보다도 먼저 챙겼다.
유림의 급한 소집 때문에 한식일에 하려던 진사공 산소에 석물교체는 부득이 하루 앞당겨졌다.
마님은 아무 때나 산소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러신다며 유림에 못가더라도 한식날 하자고 하였지만 참봉 어른은 “유림 선비들의 모임이 어떤 모임인데 집안 일 때문에 빠질 수 있느냐?”며 기어이 하루를 앞 당겨 초나흘 날 비석을 교체하였다.
진사공 산소 비석(碑石)을 교체하는 날 전날까지 불던 샛바람도 그치고 날씨가 포근했다.
연초부터 떠들썩한 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단조로워 소작하는 사람들과 마을 젊은이들의 부역(赴役)으로 오전에 모두 마처졌다.
부잣집 일이라 동네 노인네와 아이들까지 따라 나와 푸짐한 음식으로 보릿고개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웃고 떠들어 안골은 마치 마을 소풍날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참봉어른과 마을 노인네들은 먼저 내려가고, 손 집사가 젊은이들을 데리고 주변을 정리하고 느긋하게 앉아 술항아리를 비웠다.
술에 취한 일꾼들이 소달구지 세대에 나눠 타고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며 내려오는데, 마을 소년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소를 몰던 머슴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참봉 어른이 순사들에게 잡혀 갔다고 했다.
소년이 전하는 말을 듣고 놀라 흥이 깨진 젊은이들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잡혀가는 모습만 보고 달려와서 무슨 영문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손 집사는 일꾼들에게 천천히 오라 부탁하고는 급하게 내려갔다.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몸이 약해서 평소에는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시는 마님이 바깥마당까지 나와서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정돌이 영감 말이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참봉어른을 따라 들어와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양산경찰서로 좀 가시자며 모셔갔다고 하였다.
손 집사는 우선 참봉 어른이 밤에 입을 따뜻한 옷과 용돈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양산경찰서로 달려갔다.
날씨가 서늘해져 머슴들이 헌 가마솥을 내다가 숯불을 피웠으나 추위가 느껴졌다.
마님이 어둡기도 전에 온 집안에 불을 켜라 시키고는 안채로 들어갔다.
해(亥)시(오후 9시-11시까지)가 되어 돌아온 손 집사가 마님 방으로 들어가 반시경이나 있다가 나왔다.
머슴들과 같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손 집사를 둘러서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손 집사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며 모두 늦었으니 집으로 가라고하였다.
참봉 댁 안마당 오른편에 안마당과 별체로 왕래 하는 샛문이 달려 있다.
별체는 마당보다 서너 자(尺) 높은 곳에 지어져서 안마당에서 보면 담이 무척 높아 넘볼 수 없지만 별체 마당에서는 담이 낮아 안채와 바깥채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별체 뒤로는 담밖에 산이 둘러있어 아주 조용한 곳이다.
지난 가을부터 이 별체에 나선 손님들이 자주 찾아들었다.
성 참봉은 원래 학문이 짧고 이름뿐인 종 9품 참봉벼슬의 직함마저 돈으로 샀다는 소문이 있어 유림 선비들이 외면해왔다.
밀양, 창녕, 창원, 양산. 김해, 동래 등지에서 반일(反日)운동을 하던 유림들이 활동 자금을 모았으나 부호들은 대개가 일본 권력에 밀착되어 있으므로 부탁할 입장이 아니었다.
삼 천석지기가 넘는 성 참봉의 외아들이 일본 군인들의 칼에 맞아 죽었고, 동양척식회사가 토지를 조사하면서 등기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누대로 농사지어 온 천석지기 땅을 빼앗아갔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유림 선비들이 활동자금이 궁하여 성 참봉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들었다.
아들과 재산을 잃었지만 어디 가서 억울한 말 한마디를 못한 채 분을 삭여야만 했던 성 참봉이 평소부터 동경하던 유림 선비들이 나라를 찾는 일에 같이하자며 찾아들자 무척 반가웠다.
자기를 찾아와 나라를 찾는 일을 같이하자는 선비들이 고마워 누가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전에 잘 오셨다며 쌀 천석 금을 쾌히 내놓았다.
성 참봉의 호기(豪氣)에 유림 선비들은 하나같이 의기(義氣)있는 선비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일찍이 이런 선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였다.
쌀 천석 금을 받은 유림에서 성 참봉을 무임소임원으로 추대하였다.
유림에 끼워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의기가 있는 선비라 칭찬하며 임원자리까지 내어주자 성 참봉의 의기(義氣)도 한껏 넘쳐났다.
유림 선비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좋고 모인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성 참봉의 별채를 자주 찾았다.
손님을 안내하는 손 집사를 처음에는 하인이라 없인 여기던 유림선비들이 왔다 갈 때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여비를 넉넉하게 넣어주고 성 참봉이 시키는 문서를 작성하는 문장과 필체에 놀라 여느 하인과는 달리 대하였다.
1919년 3월 1일(음력 1월 29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이 각처로 퍼지고 있을 때다.
성 참봉이 손 집사를 데리고 별체에 앉아 한해 농사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젊은이 세 사람이 찾아들었다.
구포 면서기 임봉래와 그의 친구 김옥겸과 안필중이었다.
임봉래는 경성의전에 다니는 친구 양봉근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소식과 함께 구포에서도 만세를 부르도록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만세 준비를 하다 보니 모두가 집안 경제권이 없는 젊은이들이라 준비할 돈이 없었다.
임봉래는 성 참봉을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창원은 진해와 마산, 그리고 삼진 지역에서는(당시는 진해와 마산과 삼진은 창원 군에 속하였고, 지금은 모두 창원시가 되었다.) 반일운동이 활발한데 양산과 동래가 너무 조용하다고 탄식하고는 오는 29일 구포장날 장꾼들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하는데 준비를 하다 보니,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을 동원할 경비가 여의치 못해 찾아왔다고 하였다.
성 참봉은 일제에 항거하겠다는 청년들의 이기(理氣)가 오히려 고맙고 기특하여 말하지 않아도 알고는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쌀 대여섯 가마니 값이었지만 성 참봉은 쌀 스무 섬 값을 직접 내주었다.
성 참봉은 하인들에게도 인심이 후하면서 어처구니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저녁마다 별체에 야식을 올리는 갓난이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것도 처녀나 과부가 아닌 서방이 있는 갓난이를.......,
보통 마름들은 작인들에게 토지를 소작하도록 해주는 대가를 챙겼지만 손 집사는 오히려 설이 지나면 작인들에게 한해 농사를 잘 지어보자며 그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 닭을 잡고 흰 쌀밥에 떡과 술까지 대접하였다.
이 일을 위해 삼랑진의 작인들에게 순행을 나갔다.
순행을 나가면 보통 2-3일은 자고 온다.
부엌 설거지를 마치고 난 갓난이가 별채에 야식을 올리러 가는 뒤로 선출이가 몰래 따라 갔다.
갓난이가 마루 아래서 야식을 가져왔다고 아뢰면 평소에는 들여놓고 가라던 참봉 어른이 좀 들어와 앉으라고 하였다.
선출이는 엄마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댓돌 가까이 다가갔다.
“나리!” 엄마의 외마디 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놀라는 엄마 목소리에 댓돌 가까이 갔던 선출이도 놀라서 긴장하였다.
선출이는 아홉 살 아이답지 않게 하인들은 이럴 때 모른 체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엄마의 비명 소리에 이상한 예감을 느낀 선출이는 조심스럽게 별체 뒤뜰로 가서 참봉어른이 거처하는 방 봉창에 귀를 기울이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보내 달라고 애원을 하는 엄마에게 참봉어른이 위압적으로 “네년이 내 말을 거역할 거냐?” 하셨다.
조심스럽게 창호지가 찢어진 문구멍으로 안을 들어다 보았다.
구멍이 넉넉지 못해 어설피 보였으나 참봉 어른이 겁에 질려 떠는 엄마 손을 잡고 “이 사람아 내말 들어라” 하는 엄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선출이는 동생 후출이와 같이 작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금년 겨울에는 구들이 막혀 불을 때도 따뜻하지를 않아 엄마와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에서 잠을 잤다.
자다가 거친 엄마 숨소리에 깨어 엄마 아버지의 잠자리를 훔쳐보았다.
선출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겨우내 여러 번 훔쳐보면서 이다음에 순달이와 결혼 할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엄마가 참봉 완력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기운 없이 방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서 슬퍼하다 잠이 들려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전 같으면 엄마를 불렀을 선출이지만 오늘은 엄마가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자는 척 하였다.
밖에서 한참 있다가 들어왔는지 조용히 들어오는 엄마 몸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선출이는 윗목에 앉아 소리 없이 우는 엄마를 훔쳐보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쌍놈이기 때문이라는 비애를 느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아버지를 따라 선출이 형제도 잠이 들었다.
무거운 방안 분위기에 잠이 깬 선출이는 가만히 눈을 떠보았다.
아버지는 캄캄한 윗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엄마는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선출이는 그저께 일을 혹시 아버지가 아셨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거기 무슨 표가 나는가?”
선출이는 이런저런 상상으로 마음이 초조했다.
아버지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우리가 떠나자” 하였다.
아버지 말에 엄마는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라고 힘없이 반문하였다.
“나도 생각하는 게 있다. 아무래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라.” 엄마 아버지 말을 엿듣고 있는 선출이로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가 훌쩍거렸다.
“울지 마라!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우는 엄마를 위로하던 아버지가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 하셨다.
“안방마님이 죽은 새서방님을 낳고 몇 해 지나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놈의 짓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마님과 그 짓을 못하게 된 참봉은 첩실을 하나 데릴 생각은 않고 어매를 별채로 불러서 욕을 보였다. 어매도 자네처럼 영리하고 참 예뻤지! 마님도 참봉이 어매를 별체로 불러들이는 줄 알았지만 자기가 그 짓을 못하는 것이 죄가 되어 모른 척 눈을 감아 준거야! 어매 나이 스물여섯 살에 아배가 돌아가셨다. 아배가 돌아가신지 한 달도 못돼서 참봉에게 욕을 당한 거야. 만약 아배가 돌아가신 후 한 두해가 지났더라면 어매도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참봉을 원망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배가 돌아가시고 한 달도 안 돼 슬픔에 빠져있는 어매에게 그 짓을 했던 거야, 어매는 죽고 싶었지만 어린 내가 걱정이 돼서 밤마다 그 능욕을 참고 견뎠다고 한다. 참봉 방에 불려 다니면서 집안 하인들이 알까봐 조리는 마음고생이 참으로 힘들었을 거다. 참봉은 예쁘고 영리한 어매를 첩으로 앉히고 싶어 했으나 어매가 그러면 죽겠다고 거절을 해서 그러지를 못했다고 한다. 어매는 아배가 돌아가시고 한 달도 못 돼 그 짓을 당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셨다. ‘네가 이 집을 나가서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 이 사실을 발설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며 조심하라고 당부해 놓고, 36살 한창 나이에 목을 매어 자진을 했다. 어매는 어린 나 때문에 밤마다 그 더러운 잠자리 시중을 참아오다가 내가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다고 여겨지자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 앞에 털어놓고 자진을 한 것이다. 자네는 어제 일을 빨리 잊어라, 쌍것들에게 정조가 어디 있나? 양반들이 달라며 줘야지? 어매처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었다고 내가 자네를 탓하겠는가? 짐승만도 못한 놈의 자식, 어매에게 그 짓을 해놓고 어떻게 자네까지......, 내가 언젠가는 한을 풀려고 했으나 자네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쉬 결행하지 못하고, 애들이 생기면서 한을 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또 참봉이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지 우리 가족에게 과분하게 잘해주므로 어매 일을 잊어주었는데 자네에게 또 그 짓을 했으니 이제는 나도 못 참는다. 늙은 놈이 어매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자네에게까지 그 짓을 했으니, 앞으로 잘못하다가는 우리 가족 모두가 비명횡사 할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 원수는 못 갚았지만 자네에게 한 짓만은 용서 안 한다.”
이야기를 마친 손 집사는 다시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어저께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다가 이렇게 비장하게 나오자 한편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하여 “여보시오! 무슨 변고를 치자고 그래요.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 우리 쌍것들이 양반들 앞에 무슨 힘이 있나요.” 했다.
“자네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보기만 해라. 자네와 애들을 두고 어설픈 짓은 절대로 안 한다.”
아버지의 비장한 소리를 들으면서 선출이는 잠이 들었다.
경찰서 호출을 받아 갔다가 늦게 돌아온 손 집사가 마님 방에 들어가더니 오랫동안 있다가 나왔다.
경찰서에 불려갔다가 온 남편이 걱정된 갓난이는 잠자리에 누워 “임자도 같이 연류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림 선비들이 드나들고 만세운동에 관련한 모든 돈은 손 집사 손을 거쳐 나간 것을 갓난이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집사는 갓난이 묻는 말에 “구포장날 만세사건과 관련하여 참봉 댁으로 누가 찾아 왔느냐? 고 물었지만 내사 하인이라 누가 누군지 모른다고 잡아 때더니 거짓말 하면 잡아넣겠다고 위협만 하더니 가라고 하더라.” 하고 대수롭잖게 대답하였다.
갓난이는 행여나 남편까지 연류 될까봐 걱정이 됐지만 손 집사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을 놓으라.”고 안심시켰다.
선출이는 이불 속에서 엄마 아버지 이야기를 엿들었다.
경찰서에서 가족들에게 참봉어른 면회가 허락되었다.
인력거를 불러서 마님과 석이 도련님을 태우고 손 집사는 자전거를 타고 경찰서로 가서 참봉어른을 면회하였다.
참봉어른을 빼 내려면 경찰서와 검찰에 돈을 찔러 넣어야할 형편인데 지난 가을 추수한 곡식은 유림에 헌납하고 남은 곡식도 정초에 장리를 놓아버려 큰돈을 장만할 여분이 없어 논을 몇 마지기 팔기로 하였다.
그러나 농사철이 임박해서 인지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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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간 수술 후유증과 완쾌을 위해서 힘겨웁게 살고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가다보니 정성드러 쓰시고 있음을 알겠군요. 앞으로 더욱 큰 기대해보겠습니다.
요사이 교회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CBS,CTS 방송을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다음 주
부터나 교회에 나가려 계획 중입니다.서목사님의 기도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서목사님도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요. 서목사님! 효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