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은 신심을 하면서「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을 흔히 접합니다. 이것은 본래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최승(最勝)의 경전인 법화경에 근거하여 명시한 법문이며 또한 정상(正像)시대의 관심수행(觀心修行)으로서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말법의 우리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념삼천이란 우리들의 찰나(순간)의 생명이 이 법계 전체로 통해 있고 이 법계의 모든 것이 우리들의 한 순간의 일념 속에 남김없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재의 일념이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미래를 크게 열어갈 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도 이에 따라 변해가는 것입니다.
미래가 밝고 멋진 것으로 되어 갈 것인가, 암담하고 황량한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인가는 자신의 현재의 일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도 고맙고 또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지간히 다스리지 않으면 미혹의 생명에 자신이 그리고 인생 전부가 농락당하고 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말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들이 행복한 인생을 걸어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일념삼천」은 천태대사가『마하지관(摩訶止觀)』제5 상(上)에서「무릇 일심(一心)에 십법계(十法界)를 갖추느니라. 일법계(一法界)에 또 십법계(十法界)를 갖추면 백법계(百法界)이니라. 일계(一界)에 삼십종(三十種)의 세간(世間)을 갖추면, 백법계(白法界)에 즉 삼천종(三千種)의 세간(世間)을 갖추느니라. 이 삼천(三千), 일념(一念)의 마음에 있느니라. 만약 마음 없으면 어쩔 수 없도다. 조금이라도 마음 있으면 즉 삼천(三千)을 갖추느니라」〔『훈독마하지관홍결회본(訓讀摩訶止觀弘決會本)』중권 296〕고 법화경의 법리를 밝히시는 가운데 처음으로 명시하신 법문입니다.
그 의의(意義) 내용은 이전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유일하게 법화경에만 밝혀져 있으며 바로 이것이 법화경이 이전경보다 뛰어나다는 까닭입니다. 묘락대사(妙樂大師)는 이 일념삼천을「지관(止觀)이 올바로 관법(觀法)을 밝힘에 이르렀고, 더불어 삼천을 지남(指南)으로 한다. 즉 이는 종궁구경(終窮究竟)의 극설(極說)이니라」〔『훈독마하지관홍결회본(訓讀摩訶止觀弘決會本)』중권 297〕라고 천태대사 일생의 설법 중에서 최후의 궁극의 설법이라고 명시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천이라는 수량은 마하지관의 말대로 먼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십계(十界)가 갖추어져 있고, 그 십계 각각에 다시 십계를 갖추어 십계호구(백계)로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리고 이 백계에 삼십종의 세간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삼십종(三十種)의 세간이란 상(相) · 성(性) · 체(體) · 력(力) · 작(作) · 인(因) · 연(緣) · 과(果) · 보(報) ·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의 십여시(十如是)에 중생세간, 국토세간, 오음세간의 삼세간이 갖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십계호구(十界互具)와 십여시, 삼세간을 합하여 삼천으로 합니다.
대성인께서는『관심의본존초(觀心本尊抄)』에「백계천여(百界千如)는 유정계(有情界)에 한(限)하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은 정비정(情非情)에 걸치느니라」(어서 645)고 이 일념삼천의 세계는 비정초목도 포함한다는 것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의 일념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삼천의 단위에 대해서는 백계에 삼세간을 합하여 삼백세간으로 하고 여기에 십여시가 갖추어지는 것을 삼천여시(三千如是)로 하는 방법과, 백계에 십여시를 합하여 천여시로 하고 여기에 삼세간이 갖추어 지는 것을 삼천세간(三千世間)으로 하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대성인께서는『觀心本尊抄(관심의 본존초)』에서「세간(世間)과 여시(如是) 일(一)이니라. 개합(開合)의 차이니라」 (어서 644) 고 마하지관의 주(註)를 인용하시고 계신데, 이것은 요컨대 여시에 약(約)하여 삼천으로 열어서 삼천여시로 인식하든, 또는 세간에 약(約)하여 삼천으로 열어서 삼천세간으로 인식하든 어느 것이나 개합의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일념삼천을 나타내는 데에서는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찰나의 일념에 이와 같은 삼천이나 되는 세계가 깃들어 있으며, 부처님도 지옥도 그 국토도 전부 내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일념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들 삼천세계로 종잡을 수 없이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통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묘락대사는「일신(一身) 일념(一念) 법계(法界)에 두루 퍼져 있느니라」〔『훈독마하지관홍결회본(訓讀摩訶止觀弘決會本)』중권 296〕고 명시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념삼천의 법문은 대성인께서『개목초(開目抄)』에서「일념삼천(一念三千)은 십계호구(十界互具)에서 시작되느니라」(어서 526)고 교시하신 대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십계호구 입니다. 십계호구란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수라(修羅) · 인(人) ·천(天)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 · 불(佛)의 십계 각각에 다시 십계가 갖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비록 육도윤회를 되풀이하는 범우(凡愚)에도 반드시 불계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생활 속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들이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불계의 생명도 명복(冥伏)되어 있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불도수행의 중심으로서 불행의 원인이 되는 번뇌를 끊는 수행을 설하고 있습니다. 불행의 원인이 되는 번뇌란 주로 육도의 미혹의 생명이며 이것을 끊음으로써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십계호구의 법리에서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러면 육도의 각각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계도 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육도의 미혹의 세계를 헤매는 중생이 진실한 불과를 얻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승불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소승처럼 번뇌를 끊는 것 같은 수행(회신멸지, 灰身滅智)은 진정한 불도수행이 아니며, 유일하게 올바른 수행에 의해서 누구나가 경애가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설합니다. 이 수행에 의해서 범부인 우리들도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 등각(等覺)으로 단계를 밟으면서 몇 백년, 몇 천년동안 차례대로 상위로 올라서 결국에 불신(佛身)을 이룬다고 설합니다. 이와 같이 대승에서는 범부의 번뇌를 끊는 수행을 부정하지만, 그래도 범부의 생명에 곧바로 부처님께서 깃들어 있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법화경에 와서 십계호구가 명시됨으로써 비로소 범부의 생명세계에도 곧바로 불심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법화이전의 이전경에 의거하는 한은, 즉신성불의 대과보를 얻는 것은 이룰 수 없습니다. 천태대사는 이 일념삼천으로써 어떠한 생명이라 해도 지옥계에서 불계까지의 십계는 물론 온갖 국토와 세간으로 통하고, 그 실체가 동반된다는 것을 명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통달무애(通達無碍)한 일념삼천의 일념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에 둘 것인가, 그 중심을 어디에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밝히신 것이 말법출현의 니치렌대성인이시며 여기에 천태의 일념삼천과 대성인의 일념삼천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정법 · 상법시대의 중생은 천태대사가 제시한 일념삼천의 법문 등에 의해서 수행자의 일념이 곧바로 불계에 통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스스로 침사묵고(沈思默考)하여 기심의 불심을 관(觀)하여 성불하는 힘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선근(善根)을 가진 본이유선(本已有善)의 중생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심을 관(觀)하여 妙法蓮華經라는 법체에 도달한 뒤, 마침내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하종(下種)을 깨달아 각각이 성불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법의 우리들 본미유선의 중생은 정상(正像)시대의 수승(殊勝)한 기근을 가진 사람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천태대사가 일념삼천의 법문을 명시하더라도 그 관념(觀念)관법(觀法)만으로 자신의 기심에 갖추어져 있는 불심을 보고 확인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본래 말법의 중생에게는 불종(佛種)이 하종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말법에 있어서의 천태대사의 공덕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요컨대 말법의 우리들 범하중생(凡下衆生)으로서는 일념삼천이라는 법리는 각각의 성불 득도의 가능성이 명시된 것이기는 해도, 그것만으로 곧바로 불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태대사가 명시하신 일념삼천을 이행(理行), 즉 이론상의 일념삼천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대성인께서는『치병대소권실위목(治病大小權實違目)』에「일념삼천(一念三千)의 관법(觀法)에 둘 있느니라. 일(一)에는 이(理), 이(二)에는 사(事)니라. 천태(天台) · 전교(傳敎) 등(等)의 때에는 이(理)니라. 지금은 사(事)니라.」 (어서 1239) 라고 이것을 단적으로 교시하셨습니다.
또 니치칸상인(日寬上人)께서는『삼중비전초(三重秘傳抄)』에「만약 당류(當流)의 뜻은 적본 이문(迹本二門)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을 통하여 이(理)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이름하고, 단(但) 문저독일(文底獨一)의 본문(本門)을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이름 하느니라. 이것은 당가(當家)의 비사(秘事)니, 입 밖에 내서는 안되는 것이니라」〔육권초(六卷抄)29〕라고 설하셨습니다. 즉 법화경에 설하는 일념삼천을 모두 묶어서 이(理)의 일념삼천으로 위치 지우고, 대성인께서 교시하신 일념삼천이 바로 말법의 우리들 중생이 관심(觀心)으로 수행해야 되는 일념삼천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성인께서는『본인묘초(本因妙抄)』에「부처는 숙탈(熟脫)의 교주(敎主), 모(某)는 하종(下種)의 법주(法主)이니라. 그의 일품이반(一品二半)은 사리불(舍利弗) 등(等)을 위해서는 관심(觀心)이고, 우리들 범부(凡夫)를 위해서는 교상(敎相)이니라. 이 즉(理卽) 단망(但妄)의 범부(凡夫)를 위한 관심(觀心)은,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는 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어서 1680)고 교시하셨습니다.
석존께서 법화경에서, 천태대사가 마하지관에서 각각 밝힌 일념삼천은 정상(正像)시대의 관심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우리들 말법의 중생에게 있어서는 교상(敎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은 이론상의 관념 관법에 지나지 않아, 실제의 관심수행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말법의 중생의 관심(觀心)은 정상시대처럼 중생이 자신의 기심의 불계를 끝까지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南無妙法蓮華經의 수행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대성인께서는 교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말법의 중생의 관심, 南無妙法蓮華經의 수행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애초에 이 법계에 편만하는 일념이란 대성인의 본불님으로서의 일념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을『어본존칠개상승(御本尊七箇相承)』에「법계(法界)의 오대(五大)는 일신(一身)의 오대(五大)고, 일개(一箇)의 오대(五大)는 법계(法界)의 오대(五大)니라. 법계즉니치렌(法界卽日蓮), 니치렌즉법계(日蓮卽法界)이니라」〔『일련정종성전(日蓮正宗聖典)』379〕고 교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계 전부로 통하는 본불님의 일념은『草木成佛口決(초목성불구결)』에「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文)을 씻어 헹궈낸 것은 대만다라(大曼茶羅)이니라」(어서 523)고 밝히신 대로 본존님으로서 건립되어 있습니다. 즉 일념삼천의 법문의 일체는 인법일개(人法一箇)의 본존님으로 도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니치칸상인께서는『관심의 본존초(觀心本尊抄)』의 「관심(觀心)이란 나의 기심(己心)을 관(觀)하여 십법계(十法界)를 봄을, 이를 관심(觀心)이라고 하느니라」의 어문(御文)을 석(釋)하여「『나의 기심(己心)을 관(觀)한다』란 즉 본존(本尊)을 믿는 뜻이니라. 『법계(法界)를 본다』란 즉 묘법(妙法)을 부르는 뜻이니라. 이르길 오직 본존(本尊)을 믿고 묘법(妙法)을 부르면, 곧 본존(本尊)의 십법계(十法界) 완전히 이는 나의 기심(己心)의 십법계(十法界)가 되기 때문이니라」(어서문단 214)고 어지남하셨습니다.
즉 우리들이 본존님을 신봉하고 스스로 신행에 매진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의 일념이 본존님과 경지명합(境智冥合)하여 이 법계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세한탄을 하거나 혹은 게으른 마음이 생겨, 일과 가정을 구실로 하여 창제, 절복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존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근본으로 신심수행에 매진하는 곳에, 자신의 일념이 법계전체의 온갖 것으로 통하여 반드시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대성인께서는 『어의구전(御義口傳)』에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신(信)의 일념(一念)에서 삼천구족(三千具足)으로 열었느니라」(어서 1806)고 교시하셨습니다. 또『관심의 본존초(觀心本尊抄)』에는「석존(釋尊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의 이법(二法)은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에 구족(具足)하느니라. 우리들 이 오자(五字)를 수지(受持)하면 자연(自然)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을 물려주시느니라」(어서 653)고도 교시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올바른 광선유포를 향해 나가는 도중에는 온갖 마가 겨루어 일어나서 우리들의 작은 틈을 타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강한 일념은 반드시 모든 곳으로 통하여,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하더라도 반드시 해결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일념삼천의 실증입니다. 우리들은 정법을 믿는 참된 불자(佛子)로서 그 확신을 가지고 더욱 더 대원성취를 향해서 전진해 나아갑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