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복음교회, 2023년 7월 16일 주일예배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찬 송] 31장(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공동체 고백] 사도신경
[성시 교독] 교독문 72번(이사야 58장)
[찬 송] 134장(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강 론]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행1:11, 28:30,31)”
우리도 예수님처럼 “애굽에서 불러낸 나사렛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셨지만 ‘베들레헴 예수’ 혹은 ‘예루살렘 예수’로 불리지 않고, ‘나사렛 예수’ 혹은 ‘갈릴리 예수’로 불려 졌습니다. 그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즉, 흑암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마4:16). 그의 제자들도 동향의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며 멍하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고락을 함께 했던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새 희망이 되셨던 예수님, 그분이 지금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만 쳐다본다.”는 말이 있죠. 대책 없이 멍하게 있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저도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게 본문은 제자들에게 찾아왔던 천사들처럼 말씀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고. 저도 제자들처럼 과거에 집착하고, 무기력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희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 때문에 대책 없이 멍하니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는 천사들의 도전에 제자들은 반응합니다. 저도 제자들처럼 반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먼저, 자신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믿음의 행진을 시작합니다. 이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교회는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즉,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말이죠. 저는 제가 갈릴리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가슴에 되새깁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재림주)를 믿고, 믿음의 행진을 계속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갈릴리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저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1:4,12).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공간에서 공동체로 빠르게 이동합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있는 곳. 그 자리에서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시작된 공동체를 떠날 수 없습니다, 떠나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에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삶에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자리로의 복귀일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쓴다”면(1:14), “다 같이 한 곳(예루살렘)에 모”인다면(2:1),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에 힘쓴다면(2:42)”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놀라운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
금과 은은 없을 지라도 갈릴리 예수의 이름(복음)으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 일어나고(행3장), 옥에서 놓여 자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행5장), 룻다(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킴)와 욥바를(죽은 ‘도르가(다비다)’를 살림, 행9장) 넘어 가이샤랴(10장, 이달리야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은”것을 먹지 않는다는 차별(10:28)을 넘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차별 없는 세상(10:34)을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고 이방으로, 땅 끝까지 가게 됩니다(행1:8).
둘째, 돌아온 제자들은 떡을 떼며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고, 사도행전을 써내려갔습니다(행2).
우리는 떡을 떼며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아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습니까? 떡을 떼지만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는 하는데 떡을 떼지 않는다면 성령은 우리 가운데 가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유를 아낌없이 나눌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같이 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일이 나타나는 것이죠.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중은총’을 발견합니다. 무엇입니까? “죄용서 받고 성령을 받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등입니다. 이렇게 이중은혜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집단이 생성됩니다. 교회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이 이중은총이 꼭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 죄용서 받고 성령을 받는 은혜입니다. 이들을 세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죠(행11:26).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전도(사명)입니다(행28:30,31).
우리가 교회이고, 각 개인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도하는 바울의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온 유럽을 다니며 세 차례나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 소원대로 그는 로마에 도착했지만 수인의 몸이었습니다. 2년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도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로마는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국의 수인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외친다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어떤 힘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이죠.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도 떠날 수 없습니다. 즉 아무리 한국교회가 썩었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마시고, 이를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떠나지 마시기를 당부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에게 빛이 비쳐 손을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듯이(12:7) 우리에게도 여호와하나님의 빛이 비쳐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바울과 실라도 했습니다(16:22이하). 그러나 사도행전 마지막장에서는 이런 이적이 나타나질 않습니다(행28:30.31). 우리에게 여호와의 빛이 비쳐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그리스도에 관해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는 전도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를 느끼고 과거와 힘겨운 현실에 매일 뿐 아니라 미래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여 하늘만 쳐다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는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는 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 송] 493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
[공동체 기도]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