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광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형무소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전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광주형무소에 수용되었던 재소자들이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7일부터 23일까지 5사단 20연대 헌병대에 의해 광주 근교 광산군 극락면 불갱이고개에서 미리 파 놓은 길이 9척, 넓이 8척의 구덩이 4개에서 총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광주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역시 광주형무소 등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7월 9일부터 23일 사이에 국군 5사단 20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광산군 산동교 인근 야산 불갱이고개(광산군 극락면 동림리)와 광주시 지산동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 총살에 직접 두 차례 가담했던 20연대 헌병대원 김씨(김용운)는 당시 총살이 5사단 법무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이며, 1회에 20여 명이 탄 트럭 3~4대가 갔는데, 먼저 골짜기를 정리해 네모난 구덩이를 판 후 7~8명씩 4~5회 총살했다고 한다. 군의관이 시신을 확인하였으며, 살아있을 경우 헌병이 확인 사살을 했다. 증언자가 직접 목격한 것만 150여 명이었는데 이런 학살이 몇 차례 더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광주형무소 재소자를 포함하여 희생자 수가 3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1949년 8월 재소자 수는 1,780명이었으므로 이 주장에 따르면 광주형무소로 연행되어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은 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광산군의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10일경 광산군 삼도면 도덕리 암탁골 등에서 총살당했다. 인민군이 점령한 후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당시 발견된 시신은 500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삼도지서 근무자 송씨(송영복)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직접 총살한 자들은 헌병대였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광주에서는 인민군 후퇴시기에도 집단희생사건이 발생했다. 9월 28일 광주형무소에 있던 35~50명이 인근 창고에서 집단학살당했다. 이 외에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화순지역 주민 10여 명이 화순내무서로 이송되어 1950년 9월 29일 화순저수지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광주형무소에서 풀려난 강씨(강호만, 전남청 기동중대)에 의하면, 1950년 9월 27일 밤늦은 시각에 호명되어 나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하며, 본인은 9월28일 교도소를 지키던 인민군들이 퇴각하여 교도소를 나올 수 있었다. 당시 광주형무소에 있었던 경찰서 근무자(김갑기, 박형대, 김운철 등) 일부 경찰출신들은 9월 28일 풀려났다고 하는데, 한편 전남경찰국 신씨(신상균, 사찰과 대적반)와 함평경찰 정씨(정복수)는 인민군이 후퇴하자 파옥하고 나왔다고 증언했다.
희생된 날짜와 상황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어쨌든 광주형무소 내에서는 체계적인 학살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 광주지역에서 부역자에 대한 초기 처리방식은 토벌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광산에서는 광산경찰서 토벌대가 1950년 10월 13일 새벽, 본량면 명도리 명곡마을에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진입했다. 경찰은 마을을 수색하던 중 임동술을 포함한 20여 명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삼밭으로 끌고 가 모두 살해하였다. 10월 21일에는 대촌면 석정리 석교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고삼석 등 15명의 주민들이 서창면 용두리 봉학마을에서 총살했다.
국군 수복 후 광주경찰서에 의해 부역혐의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은 양산동 ‘마당고개’ 등에서 희생되었다. 1951년 2월 9일경 광주 유동에서 연행되어 광주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1년 2월 19일 양산동 ‘마당고개’에서 희생되었다.
광주경찰서 외에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광산 삼도지서는 1950년 12월 8일 주막에서 술을 마시던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 주민 이돈식 등 8명을 연행하여 총살했다. 효천지서는 1951년 1월 12일 저녁 효지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윤삼림 등 주민들을 연행하여 효천지서 길목인 이강매재에서 총살했다.
지한지서는 1951년 1월 16일 지한면 관내 이장․반장을 포함한 마을유지들이 지한지서로 소집했다가 용산리 화산마을 몰몽재 부근에서 총살했다. 1951년 8월경 지한지서 정이성 순경으로부터 “용산리 화산마을 몰몽재 부근에 구덩이가 있는데 거기서 죽여 묻었다고 하니 한번 가보라”라는 얘기를 들은 허원동의 가족은 바로 그 현장을 찾아 갔으나, 여러 구의 시신이 한 구덩이에서 엉켜있는데다가 살해된 지 8개월이 지난 후여서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다행히 한 구의 시신에서 허원동의 도장이 발견되어 시신을 수습하였다. 평동지서는 1951년 2월 5일 새벽 용곡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삼밭에 집결시켰다가 모두를 평동지서로 끌고 갔다. 경찰은 1951년 2월 8일 김금남․김판길 등 9명의 사람들은 따로 분류한 후 총살했다. 나머지 주민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이상 광주광산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