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율법은 ①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②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으며, 그에 더해진 ③번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①•②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③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용도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의 원조인 칼빈의 주장을 벤치마킹 한 것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칼빈이 말한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의 용도
우리는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① 첫째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은 각 사람의 불의를 책망하며 그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주께서 그들의 허영을 증명해 보이시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 모든 어리석은 견해가 제거된 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 행위의 의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항하는 고로 이러한 교만이 팽개쳐져서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만 의지하고 그 안에 쉬며 그 속에 숨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의와 공로를 위해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붙잡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것을 찾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② 둘째
율법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실 것을 선언하고 범법자들을 위한 형벌을 설정하며 사망과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최소한 무엇이 옳으며 바른 것인가에 관한 고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사람들을 형벌의 공포에 의해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어되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거나 흔들려서가 아니라 고삐가 매였기 때문, 즉 그들의 손을 외적 행동에까지 뻗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음대로 탐닉했을 부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더 나아지거나 의로워진 것이 없다. 비록 두려움이나 수치심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 마음에 생각한 대로 행하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그들이 자신을 제어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타오르고 속이 들끓어서 무슨 일이든 하게 되거나 아무데서고 폭발하게 된다. 만일 율법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 율법 그 자체를 심히 미워하여 율법의 수여자인 하나님을 저주하며 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나 혹은 당신의 위엄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복하시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억지로 강요된 의는 인간의 공공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주께서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그러한 대비를 하심으로써 완전하고 폭력적인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저마다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③ 셋째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다스리시는 신자들에게도 그것은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인가에 대해 더욱더 엄숙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그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갖고 있지만(렘 31:33; 히 10:16), 즉 그들은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할 만큼 마음이 움직인 자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율법에 의해 유익을 얻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매일 더 철저히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주인을 섬기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항상 살펴서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그들이 아무리 성령의 감화를 받아 열심히 하나님께 순종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연약하며 하나님보다는 죄를 섬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게으르고 고집 센 나귀를 채찍으로 쳐서 일어나 일터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율법이 우리 육신에 대해 한다.
요약하면, 율법은 신자들에 대한 권면이다. 그것은 저주로 신자들의 마음을 구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권고에 의해 그들이 나태를 떨쳐버리게 하며, 그들의 불완전에 대해 항상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있어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말했다.
율법이 신자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더 이상 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자들에 대해 이전과 같은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서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겁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행이 칭의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과는 다르다. 선행이란 것이 전혀 없다는 말도 아니고 또는 선행이 선행임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선행을 신뢰하거나 자랑하거나 우리의 구원을 선행의 공로로 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바 되어서 우리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하늘 왕국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사 9:6; 살전 4:14-18).
우리의 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절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부정과 죄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 안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엡 1:4).
존 칼빈, 양낙흥 옮김, 『기독교 강요(초판)』(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pp.56~58.
첫댓글 [율법의 세 번째 용도] (third use of the law):
하나님의 율법은
첫째,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둘째,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다.
그에 더해진 셋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처음 두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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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 p.47.
https://cafe.daum.net/1107/YY6J/11
이전에 있단 좋은 글과 분유의 원조가 칼빈이었음을 확인하고 감탄이 됩니다.
@노베 저도 동감입니다^^
이 카페에는 교과서적인 배움이 많이 있어서 도움을 받습니다.
@에이프릴 매우 공감해요!
하나님의 법: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https://cafe.daum.net/1107/Z4mc/24
천이다님이 쓴 우르시누스의 글과 오늘 포스팅을 함께 보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습니다.
@노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율법의 세번 째 용도가 루터교와 개혁주의를 나누는 지표가 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네, 스탠리 그렌츠의 설명이 거의 그렇습니다. 개혁주의는 칭의 못지 않게 성화를 강조합니다.
신학용어사전의 설명과 같은 취지이시네요!
@장코뱅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칼빈이 말한 세 용도와 우르시누스가 말한 세 분류를 함께 알면 강하게 동반상승 효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합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말한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첫째,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함으로써 죄를 깨닫게 함, 둘째, 불의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을 알게 함으로써 불의를 제어하게 함,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살피고 배우게 하여 순종하게 함인 것 같습니다. 칼빈 특유의 장황하고도 소상하고 풍부한 설명이 재밌네요. 프랑스인의 기질이 엿보이는 책입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좋은 가르침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