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다.그시절 아버지가 사업을 하실 정도였다하니 비교적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어릴때 성격이 내성적이라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부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때 쯤6.25전쟁이 발발하자 집안 형편은 극도로 어려워지고 대학진학이 어려워지자 형님 한분이 서울법대나 의대에 진학한다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제안해와 사실 가고픈 국문학과에 원서를내고 의예과에 진학한것처럼 형님과 부모를 속이고 국문학과에 합격한다.후에 국문학과에 입학한것을 알아차린 집안 어른들이 대노하여 말씀하시길 ~~언문 배우러 대학가는 놈도 다있느냐~~하며 크게 격분하고 낙담했다한다.1955년 서울대 재학시절 자신이 학예부장으로 있던 문리대 학보에 ~~이상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러던중 우연한 기회에 어느 출판기념 자리에서 작가 한운사에게 발탁되어 겨우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이어령의 발언과 요지에 관한 글~~우상과파괴~~가 한국일보에 게재 되면서 이어령이 문인으로써의 정식 대뷔가 이루어진것이다.이어령은 이글에서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기성소설가 김동리,이무영을 각각 ~~미몽의우상,사기사의 우상,우매의우상~~이라고 비판했다.당시 이어령은 갓 22세의 나이였기때문에 김동리나 이무영은 그다지 그에 글에 신경도 쓰지않았다.하지만 이글이 한국일보 4면 전체 한면에 통채로 실리자 이들도 크게 당황스러워 했다고한다.그야말로 이어령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데뷔가된것이다.그후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처음에는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뒷날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교단생활을 이어갔다.1965년엔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이상으로 죽은 어머니의 영전에 대고 주인공인 홍만수가 하소연을 하는 형식으로 전개된 작가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가 북한의 어느 잡지에 실리면서 남정현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에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측 증인으로 출두했다.하지만 분지 사건의 증인으로 평론가 이어령은 법정에 출두했다는 그사실 자체만을 가지고도 사회의 일각에선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그가 평단의 젊은 기수로 등장해 사회 각층에 주목을 받게되면서 1960년에는 만 26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한국일보,중앙일보,경향신문,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두루거쳤다.1963년 이어령의 놀라운 관찰력이 돋보인 ~~흙속에 저바람속에~~단행본으로 출간되어 폭팔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해 1년동안 국내에서만 10만부가 팔렸고 해외에서도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진기록을 세웠다.또한 1982년엔 일본의 출판사인 학생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계약을 맺은 이어령은 8년간 틈만나면 일본관련 책자를 읽고 자료를 수집했다고한다.그렇게 일본 국제문화교류의 초청을 받아 1년간 동경대에서 연구생활을 하게되었다.그리고 두문불출하며 일본어로 집필한 ~~축소지향 일본인~~이란 책이 출간되자마자 일본에서 베스터셀러가 되었고 각종 언론과 강의에 초청을 받게되었다.또한 이어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을 총괄기획했다.종전에 있었던 모스코바올림픽과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 냉전의 여파로 반쪼가리 올림픽의 불상사를 만회하려 그는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만들어 내기도했다.또한 개막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역시 이어령의 기획이었다.혹자들이 인터뷰에서 ~~이어령씨 ! 당신은 문학하는 사람으로 어째서 이런 일까지 하느나고 ~~물었을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그건 내가 원고지에 쓰던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겼을 뿐이다.~~라고 웃음썪인 말투의 일행식적인 답변을 했다고한다.1990년 대에 이러르선 노태우정부로 부터 두번씩이나 장관 제의를 받았지만첫번째 자리는 문화공보부라는 장관 자리였는데 단지 문화라면 몰라도 공보행정에 관해선 아는게 없어서 거절했다고한다.이후 문화부와 공보처가 분리되면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자리를 수락했으며 1990년 1.3일부터 1991년 12.19일까지 역임했다.이어령에겐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목사이자 변호사인 딸 이민아(1959년~~2012년)가 시럭을 상실하면서 무신론자였던 그가 2007년 타계한 온두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받고 개신교인이 되었다.이어령이 이렇게 기독교인으로 변신한 가장큰 원인은 하와이에서 살던 이민아목사의 실명위기 때문이었다.그에따라 2010년에 출간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는 그 과정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그리고 대표적인 부녀의 애정이 이한줄에 기도속에 투영되어있다.~~주님,내딸에게서 빛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면 나에 남은 생을 당신을위해 봉사하며 살겠나이다.~~그리고 지난해 10월 신군부 출신 전직대통령 노태우가 사망하자 그에겐 주군이었던 노태우를 향해 ~~병문안도 드리지 못한채 불경스럽게 조시만 쓰고있는 저의 참을수없는 아픔을 통찰해달라~~라고 밝히고 노태우를 지극히 찬양하는 ~~질긴 질경이 꽃~~이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었다.2022년 1윌1일 자신의 생의 마지막 인터뷰라 직감했는가,말년의 관심사였던 생명에 관련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인터뷰를 남겼다.그리고 2022년 1월24일 저서 ~~메멘토모리~~가 출간되었다.죽엄에관한 신학적,인문학적 성찰로서 2월에 세상에 떠나면서 유작이 되었다.2022년 2월26일 숙환인 최장암으로 별세했다.향년 8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