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
<IVP 성경배경주석>, pp. 1299-1300.
겨자씨와 누룩 이야기
이 두 비유의 논지는 모든 사람이 대망하던 장엄한 천국이 미미한 데서부터- 예수님과 제자들 같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13:31-32 ‘겨자씨’가 어떤 식물의 씨인지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어쨌든 예수님의 청중이 겨자씨가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난초씨가 겨자씨보다 더 작기 때문이다). 요점은, 겨자는 매우 작은 씨에서부터 대단히 큰 관목으로 자라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갈릴리 해 주변의 경우 겨자는 약 3미터, 이따금씩은 4.5미터까지 자라나는 수도 있었으나 대개는 1.2미터 정도의 높이였다. 겨자는 매년 새로 자라나므로, 새들은 봄철에는 겨자나무에 둥지를 틀 수 없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것에서 크게 성장하는 것에 대한 표상을 과장법적으로 사용하고 계시지만, 이러한 수사법이 그분의 논지를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논점은 천국은 비록 눈에 띄지 않게 시작되지만, 종국에 가서 영광으로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새들이 겨자나무에 둥지를 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가지에 앉을 수는 있었다(마태가 여기 사용한 용어는 실제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마태가 암시하는 것은 다니엘 4:12에 기록된 또 다른 통치자 나라의 화려함과 연결되어 있다. 자료들을 보면 팔레스틴 관습상 겨자는 정원이 아니라 들판에서 자란다. 따라서 마태복음 13:31과 누가복음 13:19의 차이는 서로 다른 독자층의 관점과 이해에 맞추어 다른 이미지를 사용한 데 기인했을 것이다.
13:33 로마 제국의 도시에는 빵을 굽는 가게가 많았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리 시골 아낙네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밀가루 전체에 누룩 혹은 효모를 섞었다. 여자 한 명이 혼자 반죽할 수 있는 양은 두세 말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빵은 약 100명을 대접할 수 있는 양이었다.
<톰슨Ⅲ 주석>, p. 2107.
막 4:31 겨자씨…작은 것이로되 겨자씨 비유의 초점은 역시 교회가 극히 작은 데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크게 흥왕한다는 데에 있다. 예수-열두 제자-120성도(행 1:15)로 시작된 교회가 현재 전 세계에 걸쳐 흥왕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예언적 비유는 성경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준다.
막 4:32 공중의 새…깃들일 만큼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새처럼 연약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인생들이 교회를 통하여 성도로서 성장하며 보호받는 것을 상징한다.
13:33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 비유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다는 것을 보여 준 비유이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겨자씨 비유는 외적인 성장을 나타내며, 누룩 비유는 내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누룩은 자라지 않는 대신에 속 깊이 스며들어 큰 변화를 일으킨다. 이렇듯 소량으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키는 누룩의 효율성과 생명력을 볼 때 우리는 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의 예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이 비유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예언적인 의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용하고 미약하게나마 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막 1:15, 하나님의 나라>. 한편 누룩 비유를 그 번지는 속성에 유의하여 교회의 지역적 확장에 대한 비유로 보는 해석도 타당하다.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편>, P. 47.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둘 다 천국이 현재에는 하찮아 보이거나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명백해지고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될 때가 올 것임을 나타낸다. 이 비유들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의 이미(예수님 안에서 존재하는)와 아직을 전달한다. 동일한 개념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및 물고기와 그물의 비유에서 확장된다.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P. 1632.
13:31 겨자씨. 겨자나무는 약 3m가량의 크기로 자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마치 하나의 작은 씨 또는 밀가루 반죽에 숨겨진 효모처럼 보잘것없어 보이고 거의 감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향은 결국에는 온 열방에 퍼지게 된다. 실제로 AD 1세기 당시,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과 비교할 때 매우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훨씬 크고 위대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13:32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이는 나무의 그림은 겔 17:23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새들은 메시아 안에서 피할 곳을 얻고, 언약의 복을 누리는 이방 나라들을 상징한다.
막 4:32 공중의 새들. 단 4:21에서는 이와 똑같은 은유적 표현이 느부갓네살 왕의 전 세계적인 통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p. 1687.).
13:33 누룩과 같으니라. 비록 누룩이나 효모는 종종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16:11), 여기서의 유비는 긍정적인 것을 시사한다. 하나님 나라의 고요한 실재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변화시킬 것이다.
<IVP 성경주석: 복음서‧사도행전>, p. 69.
13:31-35 자라남에 대한 더 많은 비유.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모두 작은 시작에 대한 비유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을 가리킬 때 쓰는 속담 같은 것이다(참고. 17:20). 그렇지만, 충분히 자라면 나무가 3m까지 자란다. 누룩 한 줌은 마침내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문자적으로는 ‘서 말’인데 이것은 백 명 분의 빵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다!)에 스며든다. 그렇듯 하나님의 역사인 천국은 처음에는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겉모양은 속임수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아무도 그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제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 평가는 핵심을 놓친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는 보잘것없는 것이 크게 된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p. 585.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의 시작이 미미하다고 해서 실족해서 걸려 넘어지거나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신다. 오만하고 속된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보잘것없는 자들이라는 것, 온 세상이 즉시 박수갈채를 보내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 복음을 받아들여서 제자가 된 소수의 사람들이 대체로 하잘것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유로 삼아서 복음을 얼마나 멸시하고 웃음거리로 여기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복음의 시작을 보고서 복음 전체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보고서는 과연 복음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낙심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미미하게 시작하시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가 예기치 않게 놀라울 정도로 진보하는 것을 통해서 그의 능력이 더 밝히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후략).
첫댓글 좋아요^^ 한 문다의 성경구절에 대해 여러 건전한 주석을 올려주시니 비교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최근 유명한 국내 복음주의 설교자가 그 동안의 모범생 모습으로 보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자의적, 파격적 해석을 해서 논란이 되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거룩한 성경에 대해서 감히 개교회 목사따위가 함부로 자의적 해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청중도 일개 목사의 자의적 해석에 상처받고 의문을 가지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위 본문에 씌어진 것처럼 좋은 주석을 읽으며 성경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을 낭비케 하는 설교보다는 백배 천배 낫습니다.
저도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칼빈주석의 해당부분은 제가 조금 더 아래에 올리겠습니다(중략 부분). 그 부분도 좋은 내용이 나오는 것 같아서요.
마13:31-36; 막4:26-34; 눅13:18-22
(중략 이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다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거기에 둥지를 트는 “겨자씨"에 비유된다. 또한, 그 나라는 양(量)으로 보아서는 아주 적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서 큰 반죽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만드는 “누룩”에 비유된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육신의 눈에는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 태초에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없는 것들”(고전 1:28)을 부르셔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지극히 높이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예기치 않은 때에 오셔서 교만한 자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실 때까지, 그들이 복음을 비웃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구절에서 말씀하신 그의 능력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우리에게 드러내실 때까지,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견고히 서서 세상의 교만에 맞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11)고 말씀하시거나, 바울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고 말할 때처럼, “누룩"이라는 단어는 종종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단어를 단지 현재의 주제와 관련해서만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어구의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막 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이 비유는 직전에 나온 두 가지 비유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말씀의 사역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수고의 열매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본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열심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추수할 것을 기대하고서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 불안과 염려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자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농부, 달리 말하면 때가 되어 곡식이 여물 때까지 날마다 통상적인 수고를 계속하는 농부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선생들에게 말씀의 씨가 한동안 잘 자라지 않고 질식당한 것 같이 보이더라도, 담대함을 잃지 말고,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열심이 식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장코뱅 칼빈주석의 뒷부분을 생략한 것은 위 주석들과 내용이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서입니다. 댓글로 추가해주셔서 더 정확한 비교가 되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코람데오 그러셨군요. 주석이 없거나 찾기 어려운 분, 초신자 등을 위해서 그냥 올렸습니다^^
@장코뱅 누룩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구분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