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문인협회
시인 한찬식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조연로
(시인, 부산문인협회 편집위원)
시인 한찬식 선생님 시비는 부산 영도구 동삼로 106번길 51에 소재하고 있다. 해양대학교에서 영도 경찰서 방향으로 가다 해안도로와 15도 각도의 비탈길로 갈리는데 윗길로 백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 도로변 작은 쉼터에 세워져 있다. 바다의 전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시비에는 “시인을 기리는 유족들과 부산의 시인들이 뜻을 모아 이 시비를 건립한다. 서기 1999년 10월 박철석 적다.”이렇게 적혀 있는데, "박철석 적다"는 시인 박철석의 필요 없는 고집이었다고, 당시 가깝게 지낸 시인 박응석, 임수생, 박태문은 볼멘소리를 하였다.
시인 한찬식 선생님(이하 시인 한찬식)과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버님과 함께 함남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계셨다. 어머님께서 함남고등학교 (현재 대신동에 위치한 혜광고등학교 전신) 정문 입구에서 문방구를 운영하였던 관계로 시인 한찬식과는 자주 만나는 게기가 있었다.
그때 함남고등학교 교지에 선생님들의 소개가 있었는데, 선생님들의 얼굴을 사진이 아닌 삽화로 그려졌었다. 시인 한찬식의 솜씨였다. 얼마나 솜씨 있게 그렸는지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아직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선을 사용하지 않고 단촐하게 그렸는데, 어떤 선생님은 이마를 강조 하였고, 어떤 분은 코를, 또는 눈을... 첫 눈에 바로 누구다 하고 알아보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삽화였다. 참으로 대단한 솜씨였다.(1955년경)
세월이 흘러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해기사협회 편집부에 입사하여 근무 하면서 시인 한찬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영도 대양중학교 교사였는데,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고, 선생님도 나를 알아보시곤 반갑게 대해 주셨다.
보통 협회 편집부에는 나의 상사인 시인선장 김성식 주간을 만나러 오는데 내 자리에 와서 담소하곤 했다. 그때 함께 자주 방문한 문인으로는 시인 박응석, 임명수, 김인환, 임수생, 시조시인 임종찬, 소설가 윤정규, 윤진상, 정종수, 천금성 등이었다.
시인선장 김성식이 바다로 나가고, 내가 편집장을 맡고 있을 무렵, 여름 토요일 어느 날, 시인 한찬식이 편집부에 오셨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의기소침해 계셨고, 풀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인사치레로, “선생님 약주 한잔 하실까요?”하자 단번에 눈빛이 달라지시며,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지 않느냐며, 말과 다르게 어서 가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거였다. 편집부 일이란 시간에 얽매임에선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이 있는지라, 상무님께 대충 둘러대고 일찍 퇴근 했다. 당시 협회 사무실이 중앙동이어서 자갈치시장으로 향하려 하자, 영도 해녀가 있는 곳으로 가자하신다. 영도 영선동 제2송도 해변, 택시가 갈 수 있는데 까지 가서 바닷가로 걸어가자,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얼마쯤 거리에 해녀의 움막집이 보였다.
몇 번 낚시를 와본 경험이 있던 곳이라 아는 체 하며, 해녀들에게 해물과 술을 주문했다. 소주 네병 정도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움막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움막집 안은 보기보다 잘 정돈 되어 있었고, 아랫목은 연탄불을 피워 따뜻했다. 밖은 지척을 분간 못할 정도의 소나기와 파도소리 뿐이었다. 선생님과 난 취한 김에 호기를 부리며, “여기 소주 한 박스와 안주 있는 대로 다 가져와!”하고 큰소리 쳤다.
토요일이라 손님 받으려고 애써 장만 한 해물들이었는데, 할 수 없다는 듯이 서비스로 막 나왔고, 자연스럽게 해녀들과 합석하여 술판이 벌어졌다.
사십대 중반의 해녀들이었는데, 손마디가 유난히 굵어져 있어 그 생활을 짐작케 했다. 몇 병의 소주가 비워지자 한명의 해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 했고, 좀 있다가 선생님도 꺼이꺼이 목 놓아 우시었다. 밖은 더욱 세차게 몰아치는 빗소리, 안은 울음소리. 이렇게 통금 시간이 되었다. 통금 해제시간이 되어서야 술판이 끝났다. 평생 가장 멋진 술자리였다. 당시 시인 한찬식 집은 영도 한진중공업 건너편 언덕에 사셨다. 선생님 집 어귀에 닿자, 연락 받은 따님이 마중 나왔다.
며칠 뒤 소설가 윤진상, 시인 정영태(당시 국제신문 사업부장) 그리고 시인 한찬식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중, 불쑥 시인 정영태를 향해 “정부장, 내 자식 보듯 시집 한권 내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때는 모두가, 그리고 모든 것이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시인 정영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책 만드는 것이 업이었던 나로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설가 윤진상도 마찬 가지였는지, 다음날 시인 한찬식 시집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연문출판사에서 견적을 뽑으니, 23만원이었다. 당시 나의 월급이 3~4만원이었고, 광복동 순두부 백반이 99원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설가 천금성이 성격대로 앞뒤 생각 없이 진행 할 것에 찬성했다. 당시 소설가 천금성은 원양어선 선장이어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시집 출간이 착수 되었다.
당시 인쇄는 납으로 된 활자로 조판하여 인쇄했는데, 활자 자국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조잡했다. 편집도 지금처럼 컴퓨터로 하는 것이 아니라 200자 원고지에 쓴 것을 식자하여 조판하는 것이라 오타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글씨체도 볼품이 없었다. 원고 교정은 소설가 윤진상이 많이 도와주었다.
시인 한찬식의 원고를 받으니 제호가 “슬픈 공화국”이었다. 당시 군사정권 시절인지라, 제호가 마음에 걸린다는 출판사 사장의 말에 제호를 “낙엽일기”로 고쳤다.
출간 된 후 2개월 만에 시집을 팔아 인쇄비용을 지불 해 주셨다. 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인쇄했던 연문 출판사 사장은 안도의 숨을 쉬며 걱정 했다고 실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원래 시집을 내고자 하여 시인 김인환(당시 시인협회 사무국장)에게 원고를 맡겼었는데, 그 원고를 찾지 못해 다시금 원고를 정리한 것이었고, 훗날 “다시 섬에서”라는 제호로 출간 되었다. 즉, 두 번째 시집 “다시 섬에서”가 첫 시집 “낙엽일기”보다 먼저 탈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시인 한찬식 시 세계
시인 박철석은 “시인 한찬식은 불교의 윤회를 믿는 사람이 아니어서, 범신론적인 세계관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攝理’ ‘秩序’‘太陽’‘慈悲’란 단어를 자주 쓴다.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의식과 그러면서 두고 온 산하에 대한 망향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은 두고 온 산하에 대한 그리움이다.”라고 했다.
어쩌다 잘못 태어난
지금은 外國같은 咸鏡道
零下二十餘度의 分水嶺 밑에서
잃어버린 詩心은 인형의 눈망울
새파랗게 외곬으로 쏠릴 뿐.
--<아기와 인형>일부
두고 온 산하가 추억의 장으로서 그리움이라기보다 역사적 인식으로서의 고향 상실감으로 나타난다. 그의 고향 생각은 “어쩌다 잘못 태어난 / 지금은 外國같은 咸鏡道”로 인식 되는, 아이러니한 단어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평론가 최진송은 “시인 한찬식의 시 세계는 첫째 피난민의 한을 내면화한 존재인식과 둘째 고향 상실의 아픔을 드러낸 향수 그리고 셋째 전후 실향민으로서 가졌던 현실인식으로 구분되는데, 부정부패, 불신 패배주의 등을 단호히 비판하는 시인이었다.”고 술회한다.
그 중 가장 불안한 것은
잡다한 보도(報道)를 헤치고
어느 위정자의 뜻을 밝히는
기적 같은 <가정의 날>
보석반지의 여인은 간 데 없고
남자는 기다림에 지쳐있었다
--<불경록> 일부
괴로워하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잊어버리고 평화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좇아가고 있는 현실과 오늘날 파괴된 가정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사건들 속에서처럼 가정의 윤리가 파괴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어느 위정자의 뜻을 밝히는 / 기적 같은 <가정의 날>”이란 정해진 날짜에라도 참된 가정을 찾자는 궁여지책의 구호임을 알려 주는 구절이다. 위정자들의 이중적 통치이념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시인선장 김성식은 “시인 한찬식의 시는 서정성도 안개 속에 파어난듯한 아릿한 슬픔으로 그려져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피안에서 손을 저으시고
유리 술잔에 이슬을 채워든
그리운 친구는
어느 이름 모를 묘비와
한조각의 빵을 나누겠지
--<막간사> 중에서
소설가 촤해군은 “시인 한찬식은 정적인 정지체를 관조하는 것도, 형이상학적 오의奧義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현상계를 준열하게 직시하는 내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진 이 같은 잠재적 내재의식은 시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라고 했다.
끝으로 필자의 마음에 가장 많이 다가온 <늪>의 일부를 소개하며 졸작으로 마무리 짖고자 한다.
나는 나를 계산치 않고 / 가장 아픈 밑바닥에서 / 스스로의 因果를시험하면서 / 멸하지 않을 / 의지의 하늘을 / 그 위에 포갠 다음 / 긴 / 밤 / 아침에 눈을 뜬다 //
--<늪>중에서
잊혀 가는 전쟁에 대한 안타까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소용돌이치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유월 비 오는 날의 오후
故 한 찬식 시인을 그리며
비 오는 날 오후
소주병과 본 듯한 얼굴 교차되며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옛날 또 하나의 세계에서
새 하얀 무명옷차림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골목길을 잊지 못해
언제나 그 골목에 다시 와 서성이며
신작로가 되어 없어진 골목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꽃은 파헤쳐지고 뭉개져
흔적도 없어 슬픈 공화국이었고
풀뿌리는 매년 피어나지만 흙더미를 찾지 못해
낙엽이었다
그러나 함경남도 함주군 상지천면 죽리 795번지가
한 찬식 시인의 고향임을 알고 있다고
맏딸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비 오는 날 오후 시집 <낙엽일기>가
<슬픈 공화국>으로 변환되어 <다시 섬>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