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白痴)가 주는 교훈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운 사물을 즐기고 좋아한다. 우선 외형적인 모습에 넋을 잃고 몰입하는 것은 감각적인 반응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미(美)는 이성적인 판단이 작용한 결과로 이는 사람마다 판단하고 수용하는 기준이 상이하다.
더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의 과거를 망각하고 본성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한마디로 자신의 처지와 경험에 대한 역설적인 반발인 셈이다. 그 결과로 가난과 명예 그리고 출신환경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애써 무시한다. 나아가 가면(假面) 뒤에서 역으로 그런 배경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려는 특성이 있다. 상대적으로 강자에 순종하는 서열 문화에 익숙한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백치』는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쓴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창작 중에서 『백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고 말했으며, 이 대작을 1867년 9월에 시작, 17개월 만에 완성했다. 작가는 “도덕적인 힘을 가진 완전히 아름다운 사람”을 그려내고자 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이야기는 열차에 마주보고 앉아있는 「므이쉬킨」 공작과 「로고진」의 접촉에서 시작한다. 「므이쉬킨」은 간질병과 백치증세로 스위스에서 4년 간 요양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고, 「로고진」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이었다. 「나스타샤」는 미모의 여인인데 원래 「토츠키」의 집에서 자라난 고아 출신으로 사실 「토츠키」의 정부이자 노리개로 살아왔다. 「예판친」장군의 딸과 결혼하고 싶은 「토츠키」는 다 큰 「나스타샤」를 장군의 비서인 「가냐」에게 지참금 7만 5천 루불을 주어 시집보내고자 한다.
「므이쉬킨」이 도시에 도착한 그 날이 「나스타샤」의 25번째 생일이었다. 그날 밤 그녀의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므이쉬킨」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의논했다.
바로 그때 「로고진」이 10만 루불의 돈을 가지고 나타나 「나스타샤」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므이쉬킨」은 그를 가로 막으며 자기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기로 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자기가 직접 맡겠다고 한다. 「므이쉬킨」이 이들을 막아서자 「로고진」은 비수를 꺼내 휘두른다. 격분한 「므이쉬킨」은 간질 발작으로 쓰러졌으나 목숨은 건졌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후 「예판친」 장군의 막내딸 「아글라야」가 「므이쉬킨」의 순수한 마음에 끌려 그에게 접근하고, 「므이쉬킨」도 「아글라야」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아글라야」에게 「므이쉬킨」과 결혼하도록 권하던 「나스타샤」는 막상 「아글라야」를 만나자 도리어 그 결혼에 트집을 잡았다. 마침내 「아글라야」는 화를 내며 「나스타샤」와 싸움을 하게 된다. 이 광경을 목격한 「므이쉬킨」은 「나스타샤」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므이쉬킨」은 「나스타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억제할 방법이 없었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결혼식 날 여러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스타샤」는 신부예복 차림으로 달려 나가 군중 속에서 「로고진」의 팔에 안긴다. 이튿날 「로고진」의 집에 들른 「므이쉬킨」은 「나스타샤」가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 「로고진」이 질투 끝에 「므이쉬킨」을 죽이려다 「나스타샤」를 죽이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나스타샤」의 시신 앞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여기서 「로고진」은 완전히 미쳐 버리고 「므이쉬킨」은 다시 백치가 된다.
작가가 남긴 편지에 의하면 이 소설의 주된 의도는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인 「그리스도」가 있을 뿐인데 이런 한없이 아름다운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은 물론 기적일 뿐이다. 작가는 「푸쉬킨」의 시(詩)에서 언급된 「가난한 기사」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기독교 문학의 아름다운 인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인물로 제시하였다.
작가에게 ‘아름다움’이란 최고의 도덕적인 힘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소설에서 선한 의지로 충만한 주인공 「므이쉬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데칼코마니(복사)로 통한다. 그는 외모와 행동에서 아름답거나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그만의 독특한 내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는 더없이 솔직하고 순결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신뢰하며 듣고, 그들의 말에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의 정신적 순결은 백치의 속성을 연상시킨다. 그의 모습과 행동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 같다. 선량한 「므이쉬킨」이 진실 하나로 온 세상에 대항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외로운 선이 거대한 현실세계의 악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문제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미(美)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작가의 명제에도 불구하고, 돈, 권력, 성적 타락이 만연한 세계에서 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단지 “백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어린아이 같음, 진실하고 정직함, 성실함, 희생적인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그가 마주치는 『페테르부르크』 거주자들에게는 당혹스러움이고 충격이었다.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이 도시의 거짓과 그럴싸한 허위의 포장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본래의 추한 모습이 「므이쉬킨」에 의해 드러난다. 이는 배금주의에 물든 타락한 세상에 보내는 「도스토옙스키」의 강렬한 묵시록인 셈이다.
일찍이 「칸트」는 ‘숭고론(崇高論)’에서 미(美)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하였다. 우리는 야생의 대자연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크기를 보면 숭고체험을 경험한다.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 모든 것을 삼키는 태풍, 분노하는 바다 같은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힘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만 자연 현상들은 비로소 숭고한 것으로 경험된다. 그런 현상들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속적인 삶에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물질적인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무한히 작은 것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자연의 숭고는 태풍보다도 무서운 힘, 분노하는 화산보다 더 무서운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자연의 숭고가 주는 전율은 우리가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힘을 체험하는 계기에 불과하다.” (「김상환」 교수의 『왜 칸트인가』, pp213~223)
그런데 그 힘은 바로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존경은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도덕적 소명의식으로 이어 진다. 원래 신(神)은 무한자(無限者)로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의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유한자(有限者)로 이성(理性) 혹은 사유(思惟)로 무한자인 신과 연결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변증법’에 의하면 최고의 이데아는 진(眞), 선(善), 미(美)로 표현되는데 이중 최고는 선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칸트」는 전지, 전능한 자 만이 전선(완전하다)이 될 수 있는데 인간은 완전성이 없고, 다만 전선의 세계로 가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는 도덕적인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선의 실천에 있다고 하면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정언명령(定言命令)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법칙’을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난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운 힘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인간의지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과 문학 혹은 철학 등으로 표출되어 인류 문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적게는 개인의 새로운 결심과 각오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 시킨다.
인간은 완벽한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고, 아무리 순수하고 선량한 심성을 보유한다 할지라도 점차 세파에 물들어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순수함을 유지하다가는 마치 백치처럼 대우를 받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허세와 기만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계에 익숙한 삶에 적응되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면서도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는 미약하다. 아직도 진, 선, 미를 추구하는 인간 의지의 전반적인 확산이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타인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동정과 연민은 인간의 기본 존재법칙이다. 당나귀처럼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며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선을 구현하도록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백치(白痴)처럼 진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다수가 진실로 아름다운 미래를 노래하고, 언제라도 마음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상낙원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3.12.28.작성/2024.1.24.발표 )
첫댓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그 핵심을 적확히 짚어주신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S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