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나무 깨우려고 그렇게 불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비구름에 놀아나던 하늘도 화창한 토요일.
자주 뵙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해 나선 오늘, 신비롭게도 멋진 봄날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려오.
호국원에 모신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근 2년 만에 뵙는지라 죄송스럽다.
정이 많은 막내 처제 부부와 봄 나드리 나섰다.
주말이라 번잡할 것 같은데, 설 지난지 얼마 안 되어 한산하다.
못다한 정 느끼기엔 20분도 짧다. 소롯한 정이 그리웁다.
삶이 무엇인지 자식 된 도리조차 제대로 못하고 산다.
좋은 시절이라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데, 세월이 하 수상하다고 해야 하나?
이곳에만 들리면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도 밝아져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바다라도 보아야 더 신명날 것 같다.
기사는 단지 운전만 할 뿐, 포항으로 가자고 한다.
동서가 구룡포 근대 문화 역사 거리인 ‘일본인 가옥 거리’를 추천 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으로부터의 강제 이주로 인해 형성된 일본인의 삶을 볼 수 있다니 구미가 당긴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일단 배고픔부터 달래고 가야겠다.
자연산 회라고는 하나 믿지 못할 현실을 접어두고, 온라인에 바닷가 맛집이라는 은미횟집에 들어섰다.
양식이 대세인 횟집에서 자연산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무식함의 징표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먹어야 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순박한 주인에게 여쭌다.
이곳에 “현역가왕이 아빠와 왔다 갔나요”. “예, 요 자리에서 먹고 갔어요”라며 옆자리를 가르친다.
“그러면 현수막이나, 글을 써서 자랑해야지 왜 아무런 표시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우 째 알고 오는지 횟감이 부족해요, 만약에 표시를 한다면 우리는 장사 못해요”
“새벽 조업을 위해 9시까지만 영업합니다”라고 메뉴판에 붙어있다.
직접 잡은 고기만 팔고 없으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현역가왕’은 회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 회만 먹는다고 한다.
물회를 먹고 갔다고 하니, 오랜만에 자연산을 먹겠구나.
회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우린 주인에게 물었다.
“무엇 먹을까요”. “겨울 별미 이시가리 드세요, 조금 있으면 못 먹어요”
횟집에 스끼다시(곁들인 안주)가 잘 나오면 그집 회는 별로다.
좋은 회가 나오는 곳은 기본 찬만 나온다. 멍게, 아귀 수육, 호박전, 홍합이 전부다.
밑반찬이 동나고 한참 지나 나온 회에 입이 쩍 벌어진다.
큰 접시에 첩첩이 쌓인, 아니 수북이 쌓인 회에 놀란다.
뼈째 썰어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있다.
줄가자미는 1~2월이 적기란다. 조금 지나면 뼈가 어시어 먹기 힘들다고 한다.
정말 운이 좋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다. 이빨이 “날 잡아라, 잡아”한다.
이제 이가 아파 더는 못 먹겠다.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일본인 가옥 거리’로 향한다.
동서를 미심쩍어하는 처제는 자연산회를 맛있게 먹고도 의아해 말이 없다.
오늘 우리가 움직이는 동선엔 사람들이 자리를 비워주는 듯 한가하다.
넓은 주차장 편안하게 주차하고, 입구에 들어서는데 인심 좋은 엿장수가 맛배기로 한 움큼 준다.
일본식 솟을대문이 낯선 곳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다.
구룡포 공원 돌계단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계단 양쪽에 돌 비석이 세워진게 특이하다.
계단 밑 양쪽으로 보존된 일본 주택이 마치 영화세트장을 연상시킨다.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는 하시모토상이 살았던 2층 집에는 해설가도 있다.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이라 몇가지를 여쭈어 보니 상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까멜리아 cafe'는 여관했던 자리란다.
지역민과는 마찰이 별로 없었으나, 자기들 세력 다툼이 많았다고 한다.
에도시대 호족들의 싸움은 이곳에도 있었나 보다.
그 중에 하시모토는 두번째 번성했던 세력이라고 한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감사함이 더해진다.
알고나니 귀가 뚫리고, 마음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혜안이 넓어진다.
해설에 감사하고, 저 또한 정양늪 해설사로 활동하니 한번 들리면 영광이라고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다.
해설사의 동질감으로 감사의 정을 나누고, 까멜리아 cafe를 찾아 나선다.
cafe가 소담스럽고 아담하다. 온통 동백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포토샾 의자에 앉아 인증샷을 남긴다.
알고 보니 2019년에 방송되었던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촬영장소다.
동백이와 용식이로 대표되는 폭격형 로맨스, "사랑하면 다 돼", "사랑 같은 소리하네"로 인기를 끌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번잡하다.
총각이 대뜸 "용식씨" "동백씨"라 부른다.
드라마 주인공 이름을 따서 남자는 모두 용식이요, 여자는 무조건 동백이라 칭하는 말투가 재미있다.
장사는 아이디어 싸움인데, 이곳 용식이와 동백이가 최상의 무기이다.
덕분에 커피는 물론이려니와 용식샌드, 동백샌드 뿐만 아니라 동백빵 까지 불티난다.
많은 가게들 중에 유독 이곳만 사람들이 들끓는다.
일본인 가옥 거리 좌우를 둘러보고 돌계단을 오른다.
양 끝에 세워진 돌에 새겨진 이름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공원에 오르니 갑진년 용의 해에 걸 맞게, 엄청나게 큰 두 마리 용이 웅거한다.
가만히 보니 땅에도 여러마리의 용들이 지역의 안위를 받쳐준다.
송덕비는 비문을 가리기 위해 덧칠한 채로 우뚝 서있다.
누구의 항변에도 입막음 한채로 슬픈 역사는 바다만 바라볼 뿐이다.
저항의 역사도 역사다. 항일 의지가 담긴 역사물이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채 한세월을 오롯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먼 바다의 찬 바람이 귓볼을 때린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뉘우치지 않은 일본이다. 치욕스런 일제 강점기의 한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야 한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잊혀져 가는 항일 의지를 일깨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