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8, 21 - 35 |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앞의 15-18 절의 가르침을 듣고 이제 개인 간의 잘못과 용서에 관해서 질문을 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예수님을 단순히 스승이나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과 권위를 지니신 분께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구절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7 장 3- 4 절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회개가 용서의 전제가 되어있다.
반면 마태오복음에서는 ‘회개’가 전제로 나오지 않으며 베드로가 언급한 7 번이라는 숫자도 예수님에 의해 단번에 거부되었다. 따라서 마태오는 용서의 법은 루카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럽다. 이것은 한 명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이라는 말은 ‘형제끼리 서로 형제애를 거스르는 잘못을 했을 때’라는 뜻이다. 즉 신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잘못에 관한 질문이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용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뜻이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용서의 한계는 일곱 번이라는 것을 뜻한다.
‘용서하다’ 그리스어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 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죄를 범한 자가 회개하여 죄 고백을 하던, 하지 않던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곱 번까지 하면 되냐는 베드로의 제안은 베드로의 생각이었고, 또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를 숫자로 표현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와 같은 사람은 범죄 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 (아모스 1:3; 2:1)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듯이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언급한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함’과 ‘가득 참’을 상징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일곱 번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의 한계는 일곱 번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판단된다.
하느님이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신다면 인간들도 그 정도만 해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다. 루카 복음 17 장 4 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곱 번’은 ‘무한정’의 의미를 담고 있고, 여기서 베드로의 일곱 번은 ‘일곱 번까지만’의 한계를 가진 숫자이다. |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전통적 관습과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신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신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70*70= 490 번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고 70 인 역의 창세기 4 장 24 절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 배의 앙갚음과 연결해서 70+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490 번이든 77 번이든 이 구절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의 어떤 내용에 따라서 제한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23-35 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느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세기 4 장 24 절의 복수의 횟수보다 또는 구약 성경의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깊다.
유대인들이 따르는 관습과 율법에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바꿔 놓으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좀 더 알기 쉽게 ‘매정한 종의 비유’로 설명해 주신다. |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비유는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제한 없는 용서에 대한 앞 절의 가르침을 비유로서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용서의 기준을 세상의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하늘나라의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은 그래서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용서는’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임금’은 하느님이고, ‘종들’은 문자적으로는 노예를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왕의 영토 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하는 지방 영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느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의 용서를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조금 과장된 신분과 빚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종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셈을 하려는’이라는 말은 ‘계산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종말에 하느님 앞에서 일생 동안 자신들에게 맡겨졌던 일들에 대해서 셈을 해야 한다.(2 고린 5:10 절 참조.)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이 비유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들 사이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이다. |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셈을 하기 시작하자’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때로 해석된다. ‘만 탈렌트’에서 한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약 20 년간의 노동자 품삯이 한 탈렌트이다. 만 탈렌트는 20만 년 동안의 품삯이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800 탈렌트라고 했으니 만 탤런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액수는 결국 하느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속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빚진 사람’ 여기서 빚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액수가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공금횡령 등이 아니라 미처 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아켈라오(동방 박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왕이 헤롯이고 헤롯에게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필립 2 세 이다)는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0 탈렌트를,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에서 200 탤런트를 징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빚진 사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페이레테스’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페이레마’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으로는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변제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 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 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한다.
비슷한 점은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느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느님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야 43 장 25 절).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께 화해의 제물로 드려 인간들의 죄악을 없애 주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로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소 1 장 7 절).
‘하나가 끌려왔다’, 빚진 자가 스스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종말에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하지 않고 묻어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으로 본다. |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 당시에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노예로 팔고, 가진 것을 다 파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다고 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 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10 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레위기 25:39; 열왕 하 4:1; 느헤 5:5; 이사야 50:1; 아모스 2:6;8:6 )참조. 물론 그런 노예들은 50 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을 갚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종의 절망적인 상황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한 요구 조건을 제시한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큼의 빚을 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임금은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인간의 죄악의 상태와 영적인 파산 상태를 하느님 앞에서 그래도 묘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종이 엎드려 절하는 것은 복종과 애원의 표시이다. 종은 임금에게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 ‘엎드려 절하며’의 동사를 미완료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엎드려 절하는 동작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연민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는 자신이 진 채무로 인해서 임금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잊으시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뜻이다.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는 말은 사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애원하는 말이다. 즉 거짓 약속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갚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애원하는 태도에 강조점이 있다. 즉 왕이 그 종을 놓아주는 것은 그가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애원했기 때문이다. |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종에 대한 주인의 첫 번째 은혜를 베푼 원인은 임금이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은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총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 11 장 30-32 절 참조.
임금이 베푼 두 번째 은혜는 ‘빚의 탕감’이다.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즉 시간을 달라는 것 이상의 빚의 탕감을 약속했다. 한편 여기서 ‘빚’이란 단어 ‘다네이온’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난 부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의 뜻인 ‘아피에미’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 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보통 ‘아피에미’는 ‘용서하다’로 사용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 -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해 뜨는 데가 해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신다’ 시편 103 편 11 절의 표현처럼 죄를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하느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표현해 주고 있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는 것은 빚 자체를 모두 없애 주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임금의 행동은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느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게 만드신다.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하느님 당신의 판단 즉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 단 한 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한 번에 탕감을 받은 것이다.
이 의롭게 되는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로 가능해진다. (로마서 8:33 절 참조).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에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에 의하여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인 것이다. (1 요한 4:10)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임금과 첫 번째 종 사이에 있었던 일이 두 종들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다. 첫 번째 종은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은혜에 대해서 자신도 용서받은 감격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섭리요, 기회였을 것이다.
‘백 데나리온’, 당시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1/6000 달란트이다. 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불과한 액수이다. 백 데나리온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첫 번째 종이 탕감 받은 액수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이다.
24 절의 만 달란트가 인간이 하느님께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이웃이며 동료인 다른 이웃에게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료’라는 말을 통해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동료 관계임을 시사해 준다.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는 구절에서 ‘멱살’의 원어 ‘에프니겐’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임금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액수를 탕감 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 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볼 수 있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이라고 볼 수 있다.
‘빚진 것을 갚아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문맥 속에서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강요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것은 임금이 첫 번째 종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자신은 동료에게 전혀 베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첫 번째 종은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인정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의 동료 역시 빚을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애원하고 있다.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라는 말은 조금 전 첫 번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 좀 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부채였지만 이 동료의 부채는 100 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부채였기 때문에 부채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두 번째 종에게는 충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종에게 조금 전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빚진 것이든 이웃에게 빚진 것이든 빚진 사람의 처지는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일이든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이든 간에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처지는 같다. 그저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할 뿐이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첫 번째 종은 두 번째 종이 계속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종을 용서하기를 거절하고 있다. 첫 번째 종은 임금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준 임금에 비해 마음이 딱딱하고 완고한지 드러내고 있다. 특히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은 동료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간청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종에게는 전혀 그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 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고 있다. 임금은 첫 번째 종을 놓아 보냈으나 첫 번째 종은 두 번째 종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말은 첫 번째 종이 동료를 감옥에 가둘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도 법정에 고소를 해서 감옥에 갇히게 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 구절에 백 데나리온 때문에 감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1 달란트 즉 6000 데나리온의 1/10의 가격인 500-600 데나리온으로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동료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받은 사랑을 베푸는 사랑으로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무자비하고 인정없는 사람이다. |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이 구절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삽입한 구절이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주인이 첫 번째 불렀을 때가 빚의 정산을 위한 호출이었다면 두 번째 부름은 첫 번째 종의 죄와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위한 호출이었다. 사실 이 지상에 모든 불의 한 자, 형제적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이 두 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종이 동료에게 한 행동을 알게 된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서 그의 빚을 다 탕감해 준 이유를 알려 준다.
‘이 악한 종아’ 이 말은 25 장에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 대해 주인이 질책한 말을 연상시킨다(25:26).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주인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7:23;25:41;루카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별한 은혜는 상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네가 청하기에’는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라는 의미로 주인이 용서해 준 것이 빚진 자의 계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인이 빚을 탕감해 준 이유는 그의 간청도 있었지만 주인이 그를 불쌍해서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이란 말은 왕은 자기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이 바란 것은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 즉 왕에게 받은 자비를 자신도 동료에게 똑같이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을 원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또한 이 구절을 영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 번째 자비는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 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 번째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 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첫 번째 종의 입에서 나와야 할 대답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상황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12 장 7 절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인 것이다. |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화가 난 주인은’에서 ‘화가 난’ 이란 말은 ‘자극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한 첫 번째 종의 행동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에 대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사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 하느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질책하실 것이다.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에서 고문 형리에 해당하는 단어 ‘바나니스테스’는 ‘고통을 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감옥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첫 번째 종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직책을 맡은 자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 옆에서 하느님을 보좌하고 시중드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 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마태 13 장 20 절 참조.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는 구절을 보면 ‘~까지’라는 말로 인해서 어느 시점까지 빚을 갚게 하였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지’라고 하는 말은 첫 번째 종의 빚이 그 종이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기 때문에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이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라는 말은 고문을 받는 장소, 또는 감옥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리라고 선언하는 무기 징역과 같은 것이다.
‘악한 종’이라고 하는 유죄 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엄중한 형량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일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해 주지 않은 것, 용서해 주지 않은 것,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에 근거한다.
따라서 그가 형벌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 받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구절의 뜻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다면 형제들끼리 서로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용서를 주셨는데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미 주신 것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앞의 비유는 이야기 전개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일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왕에게 애원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의 상황과도 맞게 된다.
지금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이라는 말은 ‘너희가 형제끼리 서로’라는 뜻이다. 용서를 해야 할 사람과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용서를 해야 할 일도 있고, 받아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마음으로부터’라는 말은 ‘진심으로’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앞의 27 절에서 말한 것처럼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주는 일이다. 즉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지워서 없애 주고 기억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의 내 아버지’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인간의 행동 그대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에 말씀하신 황금률이 바로 그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 장 12 절).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