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신=자연’ 의 표현물
<에티카> 전체는 5부로 되어 있다.
1부는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의 주제는 ‘신’(神)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신은 세계를 만든 창조주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들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유일무이한 이 세계, 이 우주이다.
그에게는 신이 곧 자연인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연’은 인간과 문화에 대비되는 세계의 반쪽이 아니다.
세계 자체, 우주 자체가 자연이며,
차라리 동북아 문명에서 사용되어온 ‘自然’에 가깝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만나는 현실적 존재들이 모두 신은 아니다.
사물들은 신과 별개의 존재, 신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가 신들인 것은 아니다.
사물들은 신= 자연이 표현된 것이다.
우리 얼굴은 웃는 모습, 찡그린 모습, 화난 모습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얼굴 자체는 하나이지만 그 얼굴이 표현되는 표정들은 극히 다채롭다.
그렇다고 해서 표정들이 얼굴과 떨어져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표정들은 얼굴의 표현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일 접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그것들 자체로서는
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과 절연되어 있는 피조물들도 아니다.
사물들은 신=자연의 표현물들이다.
스피노자는 신=자연의 표현에서 크게는 두 층위로 나눈다.
우선 신=자연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정한 길들이 있다.
스피노자가 ‘속성들’이라고 부른 그 길들은 무한하지만,
그것들 중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 두 가지는 물질과 정신이다.
달리 말해 물질과 정신은 신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물질, 정신, …… 등의 속성들은 신=자연에서 유래하는 어떤 것들이 아니다.
신=자연이 물질이고, 정신이고,……인 것이다
물질과 정신은 다시 스스로를 표현한다.
예컨대 우리 자신을 생각해본다면,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입술이 떨리는 것은
물질이라는 속성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고, 내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 차는 것은
정신이라는 속성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은 결국 신이라는 존재의 여러 표현들 중 둘이다.
따라서 그 근원에서는 하나인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는 것도, 정신이 물질로 환원되는 것도,
또 전혀 별개인 두 존재인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한 존재의 여러 표현들인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
우리 자신에게 정신 속성은 우리의 마음․ 정 ․영혼으로 성립하며,
물질 속성은 몸 ․ 신체로 성립한다.
내 몸의 모든 변화들은 물질 속성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며,
내 마음의 모든 변화들은 정신 속성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
기하하적으로 그린 원과 그것의 대수학적 공식이 궁극적으로 하나인 것과 같다.
스피노자는 이런 큰 구도 아래서 몸과 마음의 변화(스피노자는 이런 변화를 ‘변양’
양태 변화라고 부른다)다루는데, 이 내용이 2부와 3부를 장식한다.
2부는 주로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3부는 주로 감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스피노자는 인식/지식을 세 수준으로 구분해보았다.
첫 번째 수준의 인식은 경험적 인식이다.
두 번째 인식의 수준은 합리적 인식, 과학적 인식이다.
첫 번째 수준의 인식이 현실 속에서 몸과 마음이 변양됨으로써 생긴다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수학적 인식이다.
예컨대 첫 번째 인식 수준에서 태양을 보자면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서 빛나는 노란 쟁반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식 수준에서 보자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불덩어리인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수준의 인식도 있다.
그것은 철학적 인식으로서, 세계의 어떤 부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대한 인식, 종합적인 인식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신=자연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한 양태에 불과한
인간이 신= 자연을 인식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 경이로움이 있다.
철학사를 수놓은 그 어떤 주저들도 <에티카>만큼 감정에 많은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3부 전체가 감정론이며, 이 논의는 4부와 5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속담은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진리이다.
스피노자의 감정은 감응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인간이 타자들과 부딪쳐가면서 살아가는 와중에서 계속 변해 가는 것,
감응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극히 수동적인 감응으로부터(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감정에 ‘휘둘리는’인생)
극히 능동적인 감정까지(신=자연과의 사랑에 도달하는 인생)
다양한 층위들이 펼쳐져 있다.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신을 사랑하고,
그래서 결국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그래서 4부와 5부의 주제는 노예로서의 삶과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에티카> 창조주는 없다, 우주 자체가 ‘신’일 뿐 -이 정 우-
첫댓글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예전에 접근할 때는 신 = 자연이라는 것에 걸려서 접근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수련을 통해 우주의 관념이 변하면서 다소 기독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신 -> 실체 라는 사고에서 많이 벗어난 듯 합니다. 지금 읽으니 예전과는 다른 울림이 있네요.
스피노자의 글을 읽으면 우리와 사유방식이 흡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로 인한 감응으로 입가에서 미소가 지어지고 수긍의 파동이 번져갑니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