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金炳淵] (79)
질긴 인연의 시작
해年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김삿갓은
이날도 이풍헌 댁으로 바둑을 두려고 모임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조조가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여보게! 오늘은 어디 가지말고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세!
이 술은 어떤 여자가 자네한테 보내 온 특별한 술일세!"
하고 집을 나서려는 김삿갓의 발길을 잡았다.
술이라면 어떤 술도 마다 할 김삿갓이 아니다.
"술이라면 먹세그려. 그런데 어떤 여자이길래 나한테 술을 보냈단 말인가 ? "
"왜, 궁금해? 그런 사람이 있어. 하하하."
조조는 술상 앞에 앉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이 술이 어떤 술이란 말인가?
또 어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또 누구인가?"
"왜?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니까 궁금한가?"
"아따, 이 사람! 더 궁금하게 하네..."
"그 애기를 하기 전에 우선 술맛부터 알아 보기로 하세.
자네가 한 잔 마셔보아서 술맛이 자네 입에 맞으면 내가 어떤 여인이 보냈는지 말해주지."
"술이 입맛에 안 맞으면 ...?"
"아따, 이 사람!
제, 삿갓 입맛에 맞지않는 술도 있었던가?"
"그랬던가 ? 하하하 !"
김삿갓은 술잔을 손에 들고 조조와 얼굴을 마주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닌걸.
이 사람아!
이런 좋은 술이 어디서 생겼는가?"
김삿갓은 40 평생을 살아오며 술이라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셔왔다.
그러나 술맛이 좋고 나쁜 것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셔 본 술은 국화 향이 그윽한데다가 술이 혀끝을 톡 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을 다시 한 번 마셔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술은 맛으로 평가 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보다는 신선들이나 즐길 수 있을 것 같구먼 그래."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도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한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 하니 자네가 무슨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술은 다 마찬가진데 쏘기는 뭐가 쏜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좋은걸 좋다고하지 아무렴 나쁜 것을 좋다고 하겠나?
정말이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야.
대관절 이 술을 빚은 여인은 누구길래 이렇게도 기막힌 술을 빚어 냈을까?"
김삿갓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술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한다.
"이 술을 빚은 여자의 정체를 알고 나면 술맛이 대번에 뚝 떨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술을 빚은 여인이 누구이든 이렇게 기막힌 술을 빚을 수 있는 여인이라면보통 사람은 아니겠는걸."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는 어이없어 하면서,
"자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해 줌세.
실상인즉, 이 술은 취향정醉香亭 주모가 보내온 술이라네.
자네는 며칠 전에 그 여자를 만나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취향정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 하였다.
"뭐 ... 취향정?
내가 언제 취향정 주모를 만나 본 일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 왜,
지난번 제제네 집에서 생일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2차로 취향정이라는 술집에 갔던 일이 있지 않은가?
이 술은 그날 밤 만났던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특별히 보내 준 술이란 말일세!"
조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집 주모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보내 주었단 말인가?"
"수안댁이 자네에게 왜 술을 보내주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 줌세."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해도 수안 태생인 수안댁은 열여섯 살 때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왔었다.
남편은 밥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주망태였지만,
수안댁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남편을 하늘처럼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수안댁이 시집온지 5년째 되는 여름에
남편은 독주毒酒를 잘못 마시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수안댁은 장사를 지낸 그날로 남편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꼬박이 치렀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에 돌아와 "취향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그녀에게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수안댁은 모두 거절하고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네 노파들이
"아까운 나이에 재혼은 안하고 하필이면 술장사를 하냐"고 충고를 했지만,
수안댁은 그때마다
"내 남편은 나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느 집이나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하겠기에 나는 술꾼들에게 좋은 술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대접하고 싶어서 술장수로 나서는 것이예요." 하고 대답했다.
이와같은 수안댁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안댁은 술을 직접 빚어 팔아 오기를 10, 4~5년,
계절에 따라 앵두주, 두견주와 국화주 같은 꽃잎과 과일로 만든 술도 썩 잘 빚어 왔지만,
대중적인 막걸리와 소주 조차 빚어 놓은 술의 맛과 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손 맛이 뛰어났었고,
시간이 더해갈 수록 양조기술도 발전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남 모르게 탄식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술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빚어 팔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 주는
진짜 술꾼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술꾼들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수안댁은 날마다 술을 팔아 오기는 하면서도 술맛조차 모르는 술꾼들을 내심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있는데 어느날 저녁 조조가 친구들 너댓을 데리고 술을 마시러 왔다.
제제네 집에서 생일 잔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한 잔 더 마시려고 들렀던 것이고
그 일행 가운데는 처음 보는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수안댁은 손님들에게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초면 손님만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별안간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감탄사를 지르는데,
"아니!
이 집 술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띄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 보았는데 그는 오늘 처음 온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어느 친구가 김삿갓을 놀려대는데,
"여보게 삿갓!
술이야 어느 집이나 마찬가진데 이 집 술맛이 뭐가 좋단 말인가?"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모르는 소리 말게 삿갓이 음흉스럽게 수안댁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지!"
김삿갓은 친구들이 놀리는 말을하자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못난 친구들아!
자네들은 술맛을 그렇게나 모른단 말인가?
정말이지 이 집 술맛은 보통 술맛이 아니야!"
수안댁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연방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돌아가고 수안댁은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셔가며
"이 집 술맛은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하고
연신 감탄하던 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울려 오는 것 같았다.
삿갓이라고 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술맛을 그렇게도 잘 알아 줄까?
조조 일행과 네니 내니 하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임은 분명해 보였으나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마을 사람들처럼 우매한 농부는 아닌것 같고 ..
수안댁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은 깊어 이슥토록 잠을 못자고 계속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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