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주 뜻대로 살리라
Text Rm 8,19-23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1. 오늘은 환경 선교 주일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도 세상의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져야 함을 강조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며, 또 함께 잘하자고 서로 격려하는 주일이 환경 선교 주일입니다. 이제 환경 문제는 등한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오늘 환경 선교 주일에 하나님이 주신 성경 본문 롬8,19-23을 함께 나눌 때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본분을 다하며 살기로 결심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19절 말씀을 봅니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라는 말씀의 ‘피조물’이란 말은 자연의 전 구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전 창조계, 생물과 무생물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구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고대하는 바’의 헬라어 '아포카라도키아'는 목을 쭉 빼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려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온 피조물들이 목을 쭉 내밀고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도 오직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때 가장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고, 그 권한을 받았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세상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사탄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망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망가지고 사탄에게 굴복해야만 하는 세상은 다시 처음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들을 다스려줄 인간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이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원죄에 빠져버린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먼저 구원하셔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은, 먼저, 영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다음은 인격 혹은 혼도 온전히 변화되는 과정에 있으며, 나아가 육신의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 피조물들이 목을 쭉 빼어 내밀고서 간절히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는 이 세상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명령)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를 주로 인간의 삶을 위해 개발하고 이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습니다. 그래서 무분별한 개발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 등을 당연하게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지구 환경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린다는 말은 인간을 위해 무분별하게 파헤치고 망가뜨려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하라는 것임을 깨닫고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여 환경을 파괴한 행동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회개는 1990년 서울에서 개최된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 세계대회」를 통해서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가 전 세계적 선교 사역이라는 고백을 한 것이 회개의 첫걸음이었고 감리교회도 ‘환경선교주일’을 제정하여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2024년 연회를 ‘녹색 연회’를 주제로 삼아 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받은 환경 관리자의 역할을 잘하여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20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과 같은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연 자원은 인간의 편익을 위해 주어졌지만 동시에 잘 관리해야 할 책임도 역시 인간에게 있음을 알고 감사하며 동시에 보호해야 합니다. 자연을 부당하게 소모하고 파괴하는 탐욕과 탐욕스러운 소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는 탐욕스러운 소비보다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우선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을 살펴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처럼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물으며 당면한 해결책들을 모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는 이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의 실천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는 기도를 지속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3. 우리는 주신 성경 본문에서 피조물이 바라는 것 두 번째를 보게 됩니다. 21-22절입니다.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이유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 것, 곧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이란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불결, 훼손, 그리고 불안전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창조 세계가 얼룩투성이가 되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졌습니다. 한 피조물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고 하나하나가 변화되고 썩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인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회초리와 함께 온 세상이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빠져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이다. 온갖 종류의 피조물이 불에 의한 전면적인 파멸로 줄달음질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허무에 굴복하게 된 불쌍한 피조물을 우리는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란 허무와 썩어짐에 굴복하던 이 낮은 세계가 새 하늘이 서고 새 땅이 생길 것(벧후3,13 계21,1)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피조물에게 적합한 영광이 수여되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의 불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멸하고 파괴하는 불이 아니라 정련하는 불이 될 것이며, 짐승들에게도 회복이 있으리라는 것도 셩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 그랬듯이 저들이 여러모로 쓰여질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란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탄식이 아니라 피조물 모두가 함께 겪고 있음을 말합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얼기설기 엮어져 있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는 곳에는 인간의 탄식 소리도 같이 있습니다. ‘탄식’의 헬라어‘쉬스테나조(συστεν?ζω)’는 ‘재난을 같이 맛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동시적인 탄식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 다 느끼듯 세상과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 무생물까지 탄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사진이 있습니다. 미국령 미드웨이섬에서 촬영한 대형 조류 앨버트로스 사진입니다. 놀랍게도 죽은 앨버트로스의 몸통 부근엔 일회용 라이터, 병뚜껑 등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한반도 면적보다 7배나 큰 쓰레기 섬 이야기는 충격 이상입니다.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이 쓰레기섬에서 발견한 쓰레기 중 1위로 많은 것은 일본 것들이고 2위는 중국인 가운데 한글이 또렷이 새겨진 쓰레기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북태평양 한가운데 쓰레기로 이루어진 섬에서 한국 쓰레기가 확인된 겁니다. 태평양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오대양에 모두 확산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쓰레기에 한국도 한 몫 거들며 함께 탄식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대해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와 자연법칙을 인용하시고 강조하시며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 교재입니다. 사도들도 환경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창조물을 영광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드러내는 계시의 도구라 했습니다.(롬1,20) 또한 사도들은 절제와 겸손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무분별한 소비와 낭비를 야기하는 탐욕을 피하고, 절제로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환경 오염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함께 탄식하지만 함께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자연 환경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4. 끝으로, 본문은 성도된 이들에게 탄식하며 속량을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아프고 괴로워서 하는 탄식이 아니라 간절함으로 하는 탄식으로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또한 영혼 구원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육신의 생활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구원을 간절히, 탄식하며, 적극적으로,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원죄로 인한 악함이 배어 있습니다. 때문에 롬7,21-24에서 사도 바울께서 했던 것처럼 탄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과 다투는 싸움을 극복하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육신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죄의 법을 따르는 것에서도 속량, 곧 구원받아야 합니다. 탄식하며 그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함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정을 닮아 주안에서 주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기 위해 눈물골짜기를 지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주님 뜻을 따라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언제까지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다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서기를 계속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것이 격조 높은 삶을 사는 일등 인생입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자신에게 최고의 보람이 되며 훗날 주님께 칭찬을 듣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그 하나님의 아들들로 세워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