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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고대 국가인 하(夏), 상(商), 주(周)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국가는 전국 시대 7웅의 하나였던 진(秦)이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 한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시행하였고, 흉노를 막는다는 구실 아래 만리장성을 쌓았고, 분서갱유라는 언론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정치를 하였다. 진시황 사후 발견된 무덤에서는 엄청난 양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어 그의 막강한 권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역대 왕조의 변천사」
하(夏, 걸왕의 폭정) → 상(商,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나라, 달기) → 주(周, 천자 호칭 사용) → 춘추(춘추오패, 공자)전국시대(전국칠웅, 유향) → 진(秦, 진시황, 만리장성, 분서갱유, 병마용갱) → 한(漢, 항우와 유방, BC206~AD220) → 위진남북조시대(삼국지, 오호십육국, 남북조) → 수(隨, 을지문덕) → 당(唐, 안시성.양만춘) → 5대10국시대.송(宋) → 원(元,몽골족, 쿠빌라이칸) → 명(明, 주원장, 임진왜란) → 청(淸, 여진족, 아편전쟁, 신해혁명)
진시황은 '불사(不死)에 대한 욕망'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불사에 대한 엄청난 욕망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도 한축으로 작용 한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진나라 30대왕 장양왕의 아들로 어려서 부왕이 죽고 일찍 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처음에는 여러 섭정이 국가를 운영하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권력있는 왕이 되었다.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반란이 여러 번 있었고, 왕이 되어서 죽는 다는 것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 실체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수많은 전쟁터와 그 이후에도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그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그와 진나라의 운명을 재촉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유산과 이야기, 그리고 전설들을 남기게 되었다.
제주 올레 제6코스는 서귀포시를 중심으로 한 코스중의 하나로, '정방폭포'와 '작가의 산책길'이라고 이름 지어진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이어 갈 수 있도록 기획된 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작가의 산책길에는 '서복(徐福)전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금은 다른 성격을 지닌 전시관이 있다. 서복전시관은 정방폭포 입구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고, 높은(?) 담으로 둘러 쌓여 있어 개방적인 제주 풍경과는 다른 뭔가 서먹하고 어색함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높은 담, 그리고 뭔가 어색한 부조화스러운 입구, 건물 형태....
올레길을 개척한 서명숙님은 그의 글 『제주 올레 여행, 놀멍 쉬멍 걸으멍』에서 '서복전시관 담장 유감'이라는 제목의 별도의 페이지 글을 통해 서복전시관에 대한 그만의 특별한 생각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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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 폭포를 지날 무렵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 이 담장이 대체 이곳에 왜 들어서야만 했을까.
서복전시관 옆 담장이다. ...
이 아무개라는 중국통 장관이 제주가 풍광만 자랑할 게 아니라 이런 문화 콘텐츠를 잘 활용해야 한중관계도 돈독해지고 중국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며 '무지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설득한 끝에 이뤄낸 '쾌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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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건립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 아닌지, 현명한 정책인지 아닌지는 두고두고 따져볼 문제다. 문제는 중국관광객들 입맛에 맞춘다고 전시관 들어오는 길목에 거대한 석조 대문을 세우고 중국집 담장을 높게 둘러친 것이다. 헌데, 얼마 전 제주KBS의 보도에 따르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그 전시관에 들르는 중국관광객은 한두 명에 불과하단다.
들어간 비용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풍경의 상실이다. 그 담장안에는 서귀포 칠십리 바닷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안이 숨어 있다. 중국식 격자무늬가 새겨진 돌담장에 풍경이 가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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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제주 올레 여행,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북하우스]
나도 여러번 제주도 여행을 했고 서귀포도 이곳 저곳 다녀 봤고, 무엇보다 정방폭포에도 들린 적이 있지만 서복전시관은 들어가 보지 않았다. 얼핏 나의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그 높고 뭔가 어색한 돌담에 주눅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들어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하지만 뚜렷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가, 아니면 이국적인 풍경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겨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서복이라는 책에서 잠깐 읽은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기대한 것일까? 내 발걸음이 서복전시관으로 향했다.
서복전시관(☞ 홈페이지) 입장료가 생각보다 싼편에 속한다.
서복(徐福, 혹은 서불(徐巿) 이라고도 함)은 고대 중국 진의 방사(方士)이다.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행적은 《사기》권6 진시황본기 및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BC 219~210년 사이에 두번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였고,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이어진다. 그의 행적에 대한 것들은 정통 역사학자들에게는 크게 인정 받지 못하는 면도 제법 있다.
[사진 발췌 : 서복전시관 홈페이지]
입구쪽에 전시관을 소개하는 글판이 세워져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거의 없어(내가 방문한 시간에는 나밖에 없었다) 무척 조용했다. 더구나 전시관이 높은 담장으로 둘어 쌓여 있고, 건물도 폐쇄적인 구조인지라 더 그런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서복전시관은 서복이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렸던 역사적 흔적을 기념하기 위해 2003년 개원한 기념관이다. 서복의 역사적 실제의 증거는 사료에 일부 남아 있으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떠난 이후의 행적은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제주도에 남긴 것은 서귀포의 일부 지명과 정방폭포에 남아 있는 서불괴지(徐福過之)라는 글자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하면 '서복이 지나갔다'는 단순한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커다란 건물이 만들어지고 국가와 지방 재정이 투여된 것은 서명숙님의 말대로 '무지한' 일의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이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 수준의 것들을 추상위에서 기술한 것들이다.
서복전시관은 서복의 이야기를 10경의 스토리로 만들어 연결해 놓았다. 건물안에는 전체적인 서복과 그의 행적을 연대기와 테마 중심으로 전시해 놓았고, 외부도 내부와 함께 10경을 연결하여 펼쳐 놓았다.
서복전시관 홈페이지를 보면 서복10경에 대한 안내가 잘 설명되어 있고, 각각을 개별 페이지로 안내하고 있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제주에는 매화보다 더 일찍 피는 꽃으로 착각할만한, 아름다운 먼나무 열매가 사방을 수놓아 조금은 삭막한 사람들의 마음을 붉게 물들여 준다.
서복전시관 안에도 잘 관리된 먼나무 열매가 기와 지붕과 잘 어울려 멋진 풍광을 보이고 있었다.
진시황의 불로장생에 관한 욕구와 서복의 이야기들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서복전시관의 분위기는 약간은 도교적이고 꿈같은 느낌을 준다. (도교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관점에 따라 차이가 많이 있다)
전시관 입구에는 병마용갱의 병사들이 좌우로 문을 지키고 있다.
두 병사가 지키는 문을 들어셔면 신선사상을 바로 떠울릴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맨 가운데 있는 검은 수염의 남자가 서복으로 보인다. 서복의 곁에는 다른 신선들과 동남동녀들이 그려져 있다. 서복의 여행에는 동남동녀 3천명이 동행했고, 그는 여행을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 및 여러 장인들이 만든 것들을 가져갔다. 여행을 떠난 후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어디에선가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데려간 동남동녀들과 준비물들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병마용갱의 모사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진시황과 서복의 만남'을 묘사한 석조 양각이 크게 세워져 있다. 진시황은 서복 이전에도 수차례 많은 사람들을 여기저기로 불로초를 구하라는 명을 내려 보냈다. 당연히 다들 불로초를 구하지 못했고, 명을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던 서복은 어느 날 먼저 상소를 올려 자신이 불로초를 구해 올 수 있다고 말했고, 진시황은 그를 보냈다. 어쩌면 서복은 시국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현명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먼저 상소를 올려 진시황을 끌어들였고, 동행한 사람들과 가지고 간 물건들, 돌아오지 않은 행적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나의 생각이다.
동남동녀들이 동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 많은 수의 여행자들과 온갖가지 물건들이 움직였다면 그 안에는 당연히 수많은 문화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제대로 된 국가 형태를 지닌 것은 진나라가 거의 유일무이했고 주변국(한국과 일본)의 국가형성의 시기는 상대적으로 늦기 때문에, 그들이 정말 한국이나 일본으로 갔다면 그 나라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추측이지만, 일부 사람들은 거쳐가는 지방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서씨 시조는 그렇게 생겼을 것으로 판단한다.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한 욕구가 신선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흔적이 여기에는 여전히 보인다. 서복10경의 장자족구는 '불로장생체험관'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발췌 : 서복전시관 홈페이지]
서북10경 중 제6경인 용왕해송(龍王海松)의 멋진 모습이다. 자라는 모양이 바다를 향하고 있어 용궁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용왕해송이라 불리고 있고, 해송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 아름다운 장소라 하나 나는 늦은 오후에 전시관에 입장한지라 그 일출을 보지는 못했다.
서복공원은 바다를 조망 할 수 있어 좋다.
한쪽에는 서복의 전신 모습을 양각한 조각이 세워져 있다.
문득 발 아래 보도에 웃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가오리 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난끼 많은 꾸러기 같은 얼굴이다.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조금은 긴가 민가 하는 풍경들만 붕뜬 상태에서 보다가 이 것을 보니 내 기분이 나름 괜찮아졌다.
서명숙님이 말한 '높은 담'을 좀 낮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잘 꾸며지고, 중국 문화의 일면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다만, 사방을 둘러쌓아 마치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느낌을 주는 돌담을 낮추면 더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있고, 아름다운 서귀포 바다를 많은 사람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이런 이질적인 문화나 건물이 제주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것부터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꼭 그 관념에 메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번쯤 가서 신선사상이 무엇인지, 중국의 고대 역사와 진시황에 대해 다시 한번 이해하고, 서복이라는 사람과 그때의 시대적 상황을 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