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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戰國時代宋(存續期間: 紀元前 11世紀~紀元前 286年)
1. 槪要:中國의 西周時代부터 存在하던 國家(紀元前 1040年?~紀元前 286年).
商나라의 王族이자 紂王 제신의 異腹兄인 미자 계(微子啓)가 分封받은 나라다. 首都는 상구(商丘)로,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남쪽 一帶에 位置하고 있었다. 公室이 쓰는 국성(國姓)은 商나라 王室때와 같이 자(子)였고, 씨(氏)는 송(宋)이었다.
2. 歷史
2.1. 春秋時代
西周가 統一한 直後에 받은 땅이 中原의 諸侯國 中에서 손에 꼽을 程度였고, 稱號 또한 모든 諸侯國 中에서도 으뜸가는 公이었다. 功臣인 太公望 姜尙이 分封받은 齊나라 國君의 稱號가 侯인 것을 勘案하면 엄청난 待遇인데 이는 宋나라가 以前 王朝인 商나라의 後裔이기 때문으로 代代로 公의 稱號를 쓴 諸侯國은 오직 宋나라 뿐이었다. 괵(虢), 소(召), 주(周)등 公을 稱號로 쓰는 다른 諸侯國들은 諸侯國 自體가 公 待遇를 받은 것인지 周 王室의 경사를 맡아서 公이라 불린 것인지 不分明하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優待를 받은 理由는 비록 周가 商을 滅亡시키기는 했으나, 商의 遺民을 回遊할 必要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신의 아들 무경을 商나라의 首都에 封했으나 무왕이 죽고 混亂한 틈을 타서 무경을 監視하라고 붙여놓은 관숙과 채숙이 무경과 함께 反亂을 일으키는 바람에 鎭壓하느라 진땀을 뺐다. 무경, 관숙, 채숙의 亂을 鎭壓한 周나라는 武王의 동생 강숙(康叔)을 商나라의 옛 首都인 조가에 封하는 한편, 武王이 商나라를 칠 때 周나라에 協力한 微子 계를 상구(商丘)에 封建하여 商나라 遺民의 民心을 달랜다. 宋나라의 君主가 公이라는 稱號를 받은 것도 臣下가 아니라 손님으로 待遇했기 때문이며 天子國만 擧行하는 祭禮를 許諾했던 것도 같은 理由로 推測된다. 결국 商나라의 宗廟社稷은 商에서 宋으로 이름만 바뀐채 商 王室의 祭禮를 通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無酌定 懷柔策만 펼친 것은 아니었다. 미자 계의 아들을 周나라 王室로 데려와 祭禮를 돕는 官吏로 삼았는데 이는 對外的으로는 宋나라를 尊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單純히 尊重하기 위해서 官吏로 삼은 것은 아니고 아들을 人質로 삼아 宋나라를 牽制하기 위한 意圖도 多分했다. 미자의 後孫이 周나라를 위해 일해야 했기에 結局 미자 계 死後 宋나라는 동생인 미중 연이 뒤를 이었고, 以後 宋나라의 國君들은 모두 미중 연의 後孫이다. 또 通婚으로 關係를 敦篤히 하였으나 周 王室의 女子가 宋나라 君主에게 시집오는 일은 있어도 宋나라 公室의 女子가 王后가 되는 일은 없었다.
春秋時代 初期만 해도 노(魯), 위(衛), 정(鄭) 등 中原에 位置한 諸侯國들과 함께 强盛한 편이었으나, 泰山을 등지고 제수(濟水)를 바라보는 드넓은 平野에 자리잡은 제(齊), 분수(汾水)가 흐르는 태행산의 골짜기에 자리잡은 진(晉), 物資가 豐富한 한수(漢水)와 장강(長江) 사이에 자리잡은 초(楚)가 强盛해지자 餘他 中原의 諸侯國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이에 끼여 混亂을 겪게 된다.
2.1.1. 양공의 失政과 그 以後
宋양공 때는 商나라의 復活을 꿈꾸며 覇者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狀況에 걸맞지 않은 行動으로 失敗하고 만다. 양공은 原來 自身의 能力은 君主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異腹兄 목이에게 君位를 讓步하는 등 謙遜한 行動을 보였으나 제 환공 死後에 齊나라의 後繼 紛爭를 收拾하며
漸次 自身의 能力을 過大評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양공은 주(邾)문공을 시켜 증(鄫)의 君主를 祭祀에 犧牲으로 바치는데 人身供養은 商나라의 祭祀에서 一般的인 것이었다. 하지만 周나라에서는 實際로 行해지는지와 別個로 原則的으로 人身供養을 禁止했기 때문에 이 行動은 諸侯들로부터 人望을 잃는 原因이 된다. 또 등선공을 사로잡고 조나라를 攻擊하는 등 暴惡한 行動을 일삼아 諸侯들이 환공의 人德을 그리워하며 宋나라를 背叛하게 된다.
紀元前 639年에는 양공이 녹상(鹿上)에서 會盟을 열고 諸侯들의 支持를 받기 위해 초나라를 招待하니 초성왕이 이를 受諾하여 參加한다. 사마 자어는 이를 두고 小國이 盟主가 되려 하는 것은 큰 禍를 부를 것이라 豫測한다. 가을에 宋 양공, 楚 성왕, 진(陳) 목공, 蔡 장공, 정 문공, 허 희공, 조 공공이 우(盂)에서 會合하는데 이때 초나라가 양공을 사로잡고 宋나라를 政伐한다. 겨울에 諸侯들이 다시 會合을 열고 양공을 釋放한다. 이를 보면 楚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諸侯國들도 양공을 사로잡는데 同參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진(晉)나라 같은 軍事强國도 諸侯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勞力했는데 宋나라 같이 壓倒的인 軍事力을 가진 것도 아닌 나라가 諸侯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覇者를 노렸으니 當然한 結果였다.
紀元前 638年, 양공은 雪辱을 하고자 楚나라와 同盟國인 鄭나라로 쳐들어갔다. 楚나라는 鄭나라를 돕고자 兵力을 動員했고 두 軍隊는 홍수에서 맞붙었다. 宋나라는 이미 戰列을 갖췄으나 楚나라군은 아직 강을 다 건너지 못한 狀況이었다. 사마 자어는 敵軍은 수가 많고 我軍은 적으니 渡江하기 前에 攻擊해야 한다고 助言했으나, 宋나라의 國力을 把握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前 覇者인 齊나라의 君位 繼承 紛爭을 解決하고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서인지 宋 양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楚軍이 渡江을 마쳤으나 아직 陣營을 갖추지 못했을 때도 臣下들이 攻擊을 主張했으나 양공은 따르지 않았다. 양공은 楚나라 軍隊가 陣營 整備를 마치자 마침내 攻擊했다.
結果는 當然히 宋나라의 慘敗. 양공 本人은 다리에 負傷을 입었고 수많은 卿大夫의 子弟들이 죽었다. 이에 모든 國人들이 양공을 怨望했으나 양공은 君子가 어찌 相對의 어려움을 틈타 攻擊한단 말이냐.라는 現實을 把握하지 못하는 妄言을 남긴다. 아무리 春秋時代의 戰爭이라는 것은 극히 一部分의 階級만이 參戰할 수 있는 特權이었고 當時 慣習이 兩側 軍隊가 整備된 狀況에서 맞붙는 것이라 하지만 이런 慣習 또한 結局 戰鬪에서 이기기 위함임을 몰랐던 것이다.
兩側이 整備된 狀況에서 맞붙는 慣習이 만들어진 理由를 생각해보자면 一段 春秋時代에는 아직 戰車가 主力이었고 戰車는 잘 整備된 平野에서만 그 威力을 發揮할 수 있다. 탁트인 平地에서는 奇襲을 한다 해도 멀리서부터 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奇襲의 意味가 없고 山地나 丘陵에서는 戰車가 제 役割을 할 수 없기 때문에 結局 땅에서는 奇襲이 不可하고 兩側이 整備된 狀態에서 맞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땅이 아니라 강을 끼고 하는 戰鬪의 境遇, 萬若 兩側의 戰力이 비슷하다면 어느 쪽도 먼저 渡江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結局 勝負를 낼 수 없다. 이런 狀況에서는 한 쪽이 渡江하기 前에 反對便한테 軍隊를 물리라고 付託한다. 한쪽이 軍隊를 물리면 다른 쪽이 渡江하고 이어서 戰鬪를 하는 것이다. 不過 11年 後인 紀元前 627年, 진(晉)과 초(楚)가 이런 行動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晉)나라를 相對할 때와 달리 楚나라가 宋나라한테 軍隊를 물리라는 要求를 하지 않고 渡江을 하는 것으로 보아 兩軍의 戰力 差異가 컸던 것을 推測할 수 있다. 宋나라가 中原에서 强한 軸이라고 하지만 楚나라는 中原에서 가장 强한 齊나라도 혼자서 相對할 수 없어 諸侯 聯合軍을 모아서 對應한 强國이다. 戰力 差異는 생각하지 않고 慣習만 따라간 것으로 왜 그러한 慣習이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宋나라의 大敗 以後 자어가 양공에게 하는 말은 正鵠을 찌른다.
스포츠였다면 매우 훌륭한 行動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戰爭은 스포츠가 아니다. 무엇보다 楚나라는 異民族으로 取扱되어서 이들과의 戰爭은 결코 스포츠라 할 수 없고 길거리 싸움과 같은 級이다. 楚나라와 宋나라의 戰爭은 스포츠로 따지면 體級이 밀리는 무에타이 選手가 本人보다 體級이 큰 복싱 選手를 相對하면서 正正堂堂하게 勝負하겠다며 킥을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에서도 어리석은 決定인데 하물며 길거리 싸움에서는 더 說明할 必要도 없는 行動이다.
宋 양공의 行動이 問題인 것은 但只 戰鬪에서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렇게 인(仁)을 追求 했으면 以前에 他國의 君主를 祭祀의 犧牲으로 使用해서는 안됐다. 人望을 얻어야 할 中原의 諸侯에게는 恐怖와 忿怒를 심어주고 물리쳐야 할 이적의 軍隊를 相對할 때는 仁을 행했다는 것이 얼마나 矛盾的인가. 이런 矛盾的인 行動은 本人의 能力보다 큰 目標를 노린 宋 양공의 敗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宋 양공 이야기로 돌아와서 以後 '仁을 行해야 할 場所가 아닌데 仁을 찾다가 亡하는' 行動은 '송양지인'이라 불리며 2,000年 넘게 까이고 있다.
宋 양공의 이런 沒落 以後에 宋나라는 더이상 覇者를 꿈꿀 수 없었고 정(鄭), 위(衛), 진(陳), 노(魯) 등과 함께 진(晉)과 초(楚)의, 때로는 진(晉)과 제(齊)의 장기판 위 말로 轉落한다. 春秋時代 中期에 한번은 화원, 다른 한번은 상술의 주도로 진, 楚를 비롯한 列國의 停戰協定을 企劃하여 成事시켰지만 宋나라의 外交的 能力 德分이 아닌, 화원은 진나라의 집정 난서와 楚나라의 영윤 자중과 個人的인 親分이 있었고 상술은 진나라의 집정 조무와 楚나라의 영윤 자목과 個人的인 親分이 있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2.2. 戰國時代
이렇게 남아있던 宋나라의 威勢도 戰國時代에 이르러 漸次 衰退하였다. 그런데 紀元前 328年에 뜬금없이 覺醒하여 제(齊), 초(楚), 위(魏) 등을 擊破하여 領土를 擴大하였다.
이때 君主가 언이었는데 강왕이라고 부른다. 송강왕은 宋나라 歷史上 唯一한 王으로 兄 척성군을 몰아내고, 宋나라를 復興시키기 위해 熱心히 努力해서 宋나라가 一時的이나마 戰國七雄과 同級의 强國이 되었다.
하지만 宋나라가 富强해진 以後에 강왕은 緊張이 풀어지고 驕慢해지면서 暗君으로 變하기 시작했다. 于先 自身이 超人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높은 장대에 소 피를 담은 자루를 걸고 화살을 쏘아 맞혀 피가 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臣下들과 잔치를 열어 飮酒 大會를 했는데 自身은 10말을 들이켜도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은 그가 먹는 건 술이 아니라 꿀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멀쩡히 잘 살던 臣下 한빙의 아내가 예쁘다는 所聞을 듣자 그의 아내를 强制로 빼았았으며 奸臣들을 寵愛하고 忠臣들을 내쫓았다. 거기에다가 時間이 지날수록 百姓들에게 稅金을 過重하게 거두는 暴政까지 저질렀다. 結局 이러한 行實로 因해 宋나라 사람들에게조차 人望을 잃게 되었고, 이러한 機會를 周邊國이 틈타, 王號를 自稱하고, 兄을 몰아내며, 弱한 나라를 치고, 强한 나라에게는 빌붙는 등 10가지 惡行을 내건 제(齊), 초(楚), 위(魏) 등의 攻擊을 받고 紀元前 286年에 滅亡했다.
다만 宋 강왕의 惡行은 造作되었을 可能性도 생각해봐야한다. 제, 초, 위 聯合軍은 宋나라가 아니라 조(趙)나라였어도 막기 버거운 强軍으로 강왕이 暴君이 아니라 하더라도 宋나라를 政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單純히 잘나가다가 亡했다고 暴君으로 보기에는 無理가 있는 것이다. 또 合從軍의 宋나라 정벌 以後 齊나라가 約束을 어기고 땅을 거의 독차지 함으로서 다른 國家의 어그로를 끌어 악의에게 滅亡直前까지 몰린 것을 생각한다면, 宋나라의 狀態와 關聯없이 연나라의 反間 소진의 計略에 제 민왕이 넘어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3. 地域드립
商나라의 後身인 만큼 周나라 系列의 다른 諸侯國과는 다른 特異한 風俗이 많았다고 傳해진다. 또한 그에 關聯하여 宋나라에 대한 特異하면서도 우스운 故事들이 많이 傳해지는데, 代表的인 것이 守株待兎와 揠苗助長이다. 周나라 時代 以後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으면 덮어놓고 '송인(宋人)의 所行'이라 記錄할 程度로 宋나라를 戱畵化하는 紀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송양지인이나 守株待兎 등 宋나라 사람들을 비하하는 故事成語가 여럿 전해져 오는 것은 當代에 宋나라를 바라보는 卑下的 認識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滅亡한 王朝의 後裔다 보니 認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結局 보기에 따라서는 송양지인, 守株待兎 같은 故事成語는 오늘날로 따지면 一種의 地域드립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宋이 商의 後身이라 國家的인 次元에서 厚待한 것과는 別個로, 亡國의 後孫이므로 그들을 戱畵化, 貶下, 無視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亡한 王朝에 對한 卑下的 認識은 夏나라의 後裔로 알려진 杞나라에도 마찬가지로 存在했다. 杞憂가 그 예.
4. 其他
또 商나라에서 大大的으로 行해졌던 人身供養의 慣習이 春秋戰國時代의 宋나라에게도 그대로 내려와서, 그 時代에도 人身供養을 行했다는 紀錄이 있다. 그 때문에 周邊國들이 기겁하기도 했는데, 그 時節부터 이미 祭物이 소로 交替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孔子는 宋나라의 공족인 '공보가'의 後孫으로 알려졌으며 墨子가 이곳의 大夫였으며 莊子도 宋나라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제자백가 중 유•도•묵(儒道墨)의 으뜸을 輩出한 나라인 것이다.
5. 歷代 君主
宋 國君
•미자(微子) 계(啓): 제을의 서장자이자 제신의 庶兄.
•미중(微仲) 연(衍): 미자의 동생.
•계(稽): 미중의 아들. 諡號가 傳해 내려오지 않는다.
•정공(丁公) 신(申): 계의 아들.
•민공(湣公) 공(共): 정공의 아들.
•양공(煬公) 희(熙): 민공의 동생.
•여공(厲公) 부사(鮒祀): 민공의 아들.
•희공(釐公) 거(擧): 여공의 아들.
•혜공(惠公) 한(覵): 희공의 아들.
•애공(哀公): 혜공의 아들.
•대공(戴公) 백(白): 애공의 아들. 무공을 除外한 대공의 나머지 아들들인 공자 충석, 열, 간에게서 各各 황보씨(皇甫氏), 화씨(華氏), 악씨(樂氏)가 나와 宋나라의 主要 家門이 된다.
•무공(武公) 사공(司空): 대공의 아들.
•선공(宣公) 역(力): 무공의 아들.
•목공(穆公) 화(和): 선공의 동생.
•상공(殤公) 여이(與夷): 선공의 아들.
•장공(莊公) 빙(馮): 목공의 아들.
•민공(閔公) 첩(捷): 장공의 아들.
•유(游): 민공의 동생으로 민공을 弑害한 남궁만에게 擁立.
•환공(桓公) 어열(御說): 민공의 동생. 그의 아들 공자 목이, 공자 탕, 공자 인, 공자 상에게서 主要 家門인 어씨(魚氏), 탕씨(蕩氏), 인씨(鱗氏), 상씨(向氏)가 由來.
•양공(襄公) 자보(玆父): 환공의 아들로 宋襄之人의 主人公이다.
•성공(成公) 왕신(王臣): 양공의 아들.
•어(禦): 성공의 아우로 성공이 죽자 쿠데타를 일으켜 卽位.
•소공(昭公) 저구(杵臼): 성공의 아들로 어를 죽인 宋나라 사람들에 의해 擁立.
•문공(文公) 포(鮑): 소공의 아우.
•공공(共公) 하(瑕): 문공의 아들.
•평공(平公) 성(成): 공공의 아들.
•원공(元公) 좌(佐): 평공의 아들.
•경공(景公) 난(欒): 원공의 아들.
•계(啓): 경공의 宗孫.
•소공(昭公) 득(得): 원공의 曾孫이자 계의 아우.
•도공(悼公) 구유(購由): 소공의 아들.
•휴공(休公) 전(田): 도공의 아들.
•환공(桓公) 벽병(辟兵): 휴공의 아들.
•척성군(剔成君) 희(喜): 환공의 아들.[20] 대공(戴公)의 後孫으로 사성(司城)의 地位에 있다가 환공을 죽이고 簒奪하여 卽位. 《史記》에서는 在位 41年만에 아우 언에게 쫒겨났다.
•강왕(康王) 언(偃): 척성군의 아우. 齊나라, 위나라, 楚나라의 聯合軍에 의해 滅亡한다.
◆[註]
•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sˤuŋ-s/. 현대 발음은 Sòng. 宋은 현대의 한자이며 금문 표기는 이렇다. 참조
•춘추전국시대에는 성(姓)과 씨(氏)를 구별했는데 송나라의 국성은 상나라때와 같은 자(子)성이었고 씨는 송(宋)씨였다.
•기원전 318년부터.
•주공 단이 다스린 주읍(周邑)
•이는 주나라 희성(姬姓)과 제나라로 대표되는 강성(姜姓)은 대대로 통혼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주나라 왕비는 대대로 강성의 여인이 차지했다.
•다만 이쪽은 춘추 초기에도 강국이었다.
•제 환공이 훗날 제효공이 되는 태자 소의 계승을 송 양공한테 부탁한다.
•양공의 이복형 목이의 자가 자어이다.
•다만 이때는 초나라가 군대를 물리지만 진나라는 초나라가 자기들을 두려워하여 후퇴했다고 선전하며 도강하지 않고 돌아간다.
•공자나 사마천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이를 옹호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양공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일례로 진수는 "사마천이나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거나 군대를 이끌어 봤더라면 양공이란 바보를 찬양하는 짓을 절대 안 했을 것."이라고 둘을 호되게 비판한다. 대다수 평은 허세로 아주 나라를 말아먹을 짓이었고 더불어 양공 자신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전투에서 초군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그는 1년도 되지 않아 죽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의 먼 조상이었던 상나라 왕 무을이 시전했는데 그는 우상을 만들어 같이 도박하고 우상을 목베며 강왕과 똑같은 짓을 했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
•한빙과 그 아내는 자살했다. 화가 난 강왕은 합장해달라는 그 아내의 유언을 무시하고, 따로 매장했지만 두 무덤에서는 나무가 자랐고 결국 붙었는데 여기서 상사병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등나라 같은 소국을 멸했다.
•진(秦)나라를 말한다.
•전국종횡가서에 의하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것과 달리 사실 소진의 주 업적은 6국의 재상의 인수를 차고 진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제나라에서 연나라의 반간으로 활약하며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안그래도 소진열전은 오류로 가득했는데 전국종횡가서의 발견 이후 사마천이 묘사한 소진의 신뢰도는 사실상 부정되는 상황이다.
•주변국 뿐만 아니라 송나라 내부에서도 기겁하는 경대부들이 존재했다.
•공자 본인도 자신이 상과 송의 후예라는 것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죽기 직전 제사를 송나라와 상나라의 예법으로 지내며 장례하는 꿈을 꾸고 유언하면서 상 왕실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내보였다.
•다만 공자의 부친 숙량흘 이전의 세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공자가 스스로 상나라의 후예라 생각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공보가의 후손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서주 초기는 아직 시법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송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제후국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주나라의 무왕, 성왕, 강왕, 소왕, 목왕조차 시호가 아니라 생전부터 불리던 칭호다.
•《사기》
•《죽서기년》, 《한비자》
•중국 학자 백광기(白光琦)는 재위 23년(기원전 355년 ~ 기원전 333년)으로 추정.
•중국 학자 양관(楊寬)은 재위 28년(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9년)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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