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36 65세 된 사라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이기에? 또 실수는 아브람이 했는데 왜 벌은 바로에게 주어졌는가?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 12:11~13)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은 심한 가뭄을 맞아 애굽으로 내려간다. 거기는 나일강이 있기 때문이다. 애굽이 가까워 오자 아브람은 아내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요"(새번역성경, 창12:11~12). 그래서 짜낸 꾀가 '누이'라고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복동생이니까. 이때 사라의 나이가 65세였다. 75세 된 사람이 환갑이 넘은 아내의 미모로 인해 발생할 일을 염려하고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아내에게 홀려서 살아가는 남편의 자아도취쯤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막상 애굽에 도착하니 아브람의 염려는 객관적 사실임이 드러난다. 아브람의 누이동생 사라는 일거에 애굽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하여 바로는 큰 선물로 아브람을 후대하면서 그의 누이동생을 궁으로 끌어들인다. 65세 된 여자의 매력이 어느 정도였기에 애굽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그러나 이런 의문은 사라의 수명을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그녀는 127세에 사망하였다(창 23:1). 성경에 수명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여인이다. 그녀는 모조(母祖, matriarch)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여인이다. 그러니 65세의 사라는 70~80 수명을 사는 사람들로 치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이른 것과 같다. 더군다나 아직 한 번의 출산 경험도 없다. 거기에 1천여 명에 이르는 식솔들을 거느린 부호 아브람의 아내로 고생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니 그 당시 사라는 환갑이 넘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중년의 매력을 발산하기에 충분한 젊은 여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사라는 바로의 궁으로 이끌려갔다. 그리고 아브람은 '누이'를 바로에게 보내고 그로부터 “양과 소와 나귀와 남녀 종들과 낙타"(현대인의 성경, 창 12:16)를 선물로 받았다. 이때 아브람의 표정이 어떠하였을까? 또 선물을 받을 때 무어라고 말했을까? 기록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가 있다. 살자고 짜낸 꾀가 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사라를 누이라고 하는 순간 오빠로서 대접은 받게 되었지만 남편으로서 아내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 아브람의 모습이 참으로 초라하고 궁색하다. 더군다나 아내 사라에게 그런 제안을 할 때 아브람이 한 말도 고약하다. 그는 아내에게 '누이'라고 하라고 시키면서 그렇게 되면 우리 둘 다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창 12:13)고 하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있다.
어디로 보나 이 사건의 주범은 아브람이고 사라는 사주를 받고 행동을 한 종범에 불과하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 12:17). 잘못은 아브람이 했고 바로는 합법적으로 사라를 취하려고 한 것뿐인데 왜 바로에게 벌을 주셨는가?
이건 의도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구별된 한 민족을 형성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녀를 낳을 열국의 어미인 사라가 바로의 후궁으로 전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브람이 만난 첫 이방 왕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그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아브람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셨다. 이런 이유로 후에 다윗은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연락을 상기하며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일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대하 16:21~22)라고 하였다.
물론, 바로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사라를 데려가라고 하면서 '어찌하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그를 책망하였다. 그러나 아브람으로서는 망신살이 뻗쳤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자신의 불신에 대한 보응을 바로를 통해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죄는 아브람이 지었지만 당신이 그를 지키고 있음을 공표하였고, 아브람은 바로를 통해 자신의 잘못에 대한 견책을 들은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아브람이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 거의 비슷한 실수를 또 한 번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라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는 구체적인 약속까지 들은 이후이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마치 애굽 왕 바로에게 했던 것처럼 사라를 누이라고 하였다(창 23:2). 이때 사라는 이미 90이 가까운 할머니였다. 더 이상 매력이 있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 자신도 그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 확인하며 신앙 경험이 깊어져 있었다. 그런 그가 황당하고 난처한 상황을 초래하였던 바로 그 계략으로 갑작스럽게 되돌아간 것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세월을 따라 그때 배운 교훈이 잊힌 것인가?
여하튼 하나님은 이번에도 개입하셨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시어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3:3)고 직접 말씀하셨다. 이 두 번에 걸친 아브라함의 실수는 아들 이삭이 자연스럽게 배운 시범 사례가 된 듯하다. 그도 같은 책략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창 267). 하나님은 그의 종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키시고 구원해 주시지만 그런 실수의 교훈은 어떤 모양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그 열매가 자식들에게서 나타난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며 방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