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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성령을 소개합니다
Meeting the Holy Spirit
오늘날 성령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에는 성령님의 일과 사역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심지어 재림교회의 저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속성에 관한 이해 없이 그분의 사역에 관한 지식만 다루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원론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만일 어떤 일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이는 분명히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집착하면 진리보다 현실적인 유익을 선호하게 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여기는 위대한 일들, 예컨대 귀신을 쫓아내거나 예언을 하거나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주님은 비장하게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마 7:22~23 라고 선언하신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성령님의 속성을 간략하게나마 다루는 장을 하나 추가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령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그분이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일부 재림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속성을 부여받은 존재, 하나님의 손에 들린 능력 있는 도구쯤으로 단순히 추정한다. 하지만 성령님을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존재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는 아주 큰 차이를 야기한다. 다만 우리는 성령님의 본질에 관하여 과대한 분석을 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령이 어떤 분인지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니다. ・・・성령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은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주님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이러한 오묘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금이다." 행적, ··51 52
성령님 역시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여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3가지 기본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1) 성령님은 하나님이신가? 2) 성령님은 삼위일체에서 위격을 가진 분이신가? 3) 성령님은 삼위일체에서 다른 신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성령님은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성령님이 하나님이신지에 관한 성경의 직접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의 역사를 통하여 그토록 많은 진실한 신자들이 왜 성령님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본적인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남겨 놓으셨다.
이런 증거들 중에 가장 분명한 것은 아마도 사도행전 5장의 베드로의 진술일 것이다. 거기서 베드로는 눈속임하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땅을 판 것과 관련하여 왜 성령님을 속이느냐고 물어보면서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3~4 라고 선고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성령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교차 사용이 가능한 표현들이었다. 베드로의 핵심은 아나니아가 단지 초기 신약교회의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것이다.
교차 사용의 또 다른 예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과 6장에 사용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3장 16절과 17절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세 장이 지난 후, 그는 거의 동일한 말을 사용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 또는 "성령의 전을 상호 교차 사용했다.
"성령님은 단순히 영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피조물이라든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그분으로부터 나온 어떤 일부분이라든지 혹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분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그 자체인 영이시다." <루터의 사역> 24:297
예수님 역시 "하나님"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교차 사용하셨다. 그 밤에 니고데모와 만나시는 동안 그리스도는 다시 태어나는 일, 흔히 구원을 언급하는 표현인 거듭남이 어떻게 성령으로 가능한 지 언급하셨다.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가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5~9 라고 말했을지라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주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모여 구원받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여쭈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3~26 예수님에게 있어서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분명했다. 성령님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이끄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수 있지 않은가! 요 16:8~11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성령" 히 9:14 에 대한 유일한 성경적 언급을 찾을 수 있고, 신명기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신 33:27 에 대한 유일한 성경적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사람을 생명으로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5, 28.
무슨 근거로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을 생명으로 부르실 수 있는가?예수님은 그다음 절에서 설명하신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6 수년이 지난 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했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예수님을 살리신 그 동일한 영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배신을 당하시던 날 저녁, 그리스도는 "보혜사" Comforter/Helper 로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가 오실 것을 공표하셨다. 요 14:16~17 언어학적으로, 이것은 소개하는 이와 소개받는 이가 "평행"을 이루는 지위를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언급한 이유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첫째 보혜사 요일 2:1 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요지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셨다는 것이다. 16절 흠정역은 기도했다고 번역했다. 바로 몇 분 전에 그리스도는 자신과 아버지가 동일하다고 말씀하셨다.
9~10절 보혜사가 아들과 동일 혹은 평행을 이루는 지위라면, 또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혹은 하나라면,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성령님의 세 가지 신적 속성
성령님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 성령님은 편재 omnipresent 하시다. 즉 어디에나 계시기에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 라고 감탄한다. 성령님은 전지 omniscient 하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0~11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성령님은 전능 omnipotent 하시다. 성령님은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고전 12:11 은사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많은 구절이 삼위일체의 세 위가 그 역할은 다르지만 본성과 지위에서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지상 명령에 포함된 저 유명한 침례 선언은 제자들이 새로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9 으로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각기 다른 세 이름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이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세 위격을 같은 본질과 본성으로 묶는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사도의 축복 역시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그리고 영적 선물에 관한 가르침에서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하면서 그 동일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 12:4~6 베드로의 인사말에서 우리는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신성이 다양한 기능을 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12.
신격을 지니신 성령님
성령님의 신성은 초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운 개념이었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입장과 더불어 성령이 신격보다 하등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편집장을 역임하고 대총회의 총무였던 유라이아 스미스는 적어도 1891년 이전에는 "성령을 거룩하고 신비로운 감화로 보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위대하고 완전한 그분들의 일을 수행" 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10월 24일, 664 하시는 것으로 서술하였다. 한 해 전에 그는 성령을 아버지나 아들과 같은 신격을 지니지 못한 "거룩한 영향력" 예수를 바라보자, 10 이라고 묘사하였다. 엘렌 G. 화잇 조차도 그녀의 저술에서 흠정역 성경을 인용하여 성령을 지칭할 때 대명사 "it" 그것 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1898년, 화잇 여사가 성령을 지칭할 때 인칭대명사인 "He' 그분 를 사용하고, 성령을 “삼위일체의 제 삼위"라고 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변경되었다. 시대의 소망 671, 참고
어떤 경우 성령을 부분적으로는 중성인 그것 It 으로 보기도 한다.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의 "프뉴마와 영어의 대명사가 문법적으로 중성이기에 이러한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 한 예가 로마서 8장 16절인데, "성령이 친히"를 영어 흠정역은 “The Spirit itself"라고 번역하면서 친히 중성인 '그것'이라고 했다. 영어에서 대명사는 선행하는 명사와 성, 수, 격이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령이 중성이니, 그 명사를 받는 대명사는 중성이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성령을 지칭하는 대명사를 중성이 아닌 남성 "케이노스"를 사용하였다.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6
성경 비평가들은 헬라어가 요한의 모국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실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이 계속하여 문법적 실수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일부러 성령을 "그"라고 부른 것이
06. 성령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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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와 유사한 실수가 전혀 발견되지않고 있기에 요한은 예수님이 그저 사물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분을 지칭했음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이 틀림없다.
성경 역시 오직 신격이나 인격을 지닌 존재에게만 있는 수많은 속성이 성령님 안에 있음을 확인해 준다. 예를 들면, 성령님의 "의지"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 [사도 바울과 동료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6~7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님의 여러 가지 선물들에 대해 언급한 후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1절 고 하였다.
또한 성령님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다시 한번우리에게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롬 8:27 라고 알려 준다. 성령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위하여 탄원하신다."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성령님은 또한 오직 인격체만 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느헤미야는 회상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의 선한영을 주사 그들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며" 느9:20 라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으로 인하여 위험이나 억압을 당할 때를 위해 이렇게 약속하셨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눅 12:12 덧붙여 힘이나 영향력은 말로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성령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 7, 11, 17, 29절과 3장 6, 13, 22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성령님은 하늘의음성에 대답한다. 마침내 "성령과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계 22:17 라는 음성을 듣는다. 이 구절들은 인격적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 큰 특징은 성령님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 엡 4:30 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사야는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완고했는지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 사 63:10 이 되셨다고 말했다.
또한 성령님은 영향력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라고 확언한다.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결론적으로, 오직 인격적 존재만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성의3위는 모두 사랑이시다. 요3:16; 13:1 참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롬 15:30 기도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이미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삼위일체에서 성령님의 위치
신약 성경에서 성령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주된 관련이 있다. 성령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찾을 수 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두 위격에 대해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셨음을 보게 된다.
약속된 보혜사가 오실 것을 선언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14:16~17 성령님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의지대로 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에서 삼위일체의 두 위격, 곧 요청하시는 아들과 제공하시는 아버지를 철저히 따르는 모습을 본다.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 제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다. 21절 사실 주님의 약속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23절 제자들의 마음에 성령님이 세 번째로 내빈이 되신다는 명백한 언급은 없으나 주님이 예전에 말씀하신 바를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령님이 "또 다른 보혜사 곧 아들과 또 다른 분이지만, 성령님의 위격에 나타난 종속적인 역할을 분명히 보게 된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그리스도나 아버지보다 낮은 신이라고 오해할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은 다만 삼위일체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과 기능을 보여 주는 것이지 성령님의 신분이나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성령님의 종속적인 역할이 다시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요한복음 16장에서 마침내 우리는 삼위일체적 관계와 연관된 가장 명확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성품을 드러낸 것처럼, 아들이 자신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고 그 특권을 아버지에게 맡긴 것처럼 성령도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하였다. 요 5:30; 6:38 참고 그런데 여기에는 잠재적으로 아리안 주의, 곧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 때문에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달리 더 낮고 종속적인 차원에 있다고 보는 그런 사상을 품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이런 기능적 관계에서 아버지는 근원, 아들은 중재자, 성령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 나타나는 복합적인 연합에 관한 개념은 상호작용적이며 상호 순종적인데, 유대인들이 유일신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오랜 세대에 걸쳐 사용한 문서인 '쉐마' shema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 신 6:4, 개역한글 여기 "하나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드는 "여럿 가운데 하나, 특정한 하나에 강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토 크리스텐슨 Otto Christensen 에 따르면, “이 '하나'에 다른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모세는 오직 '하나'를 가리키기 위해 '야 히드'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단어는 "다양한 인격의 연합에 기인한다. 동일한 단어 '에드'가 첫 부부의 순종적인 연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신적 유대감이라고 할수 있다. 신들의 모임이 아니라 완전한 겸손으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고 표현하는 세 위격의연합이다.
왜 성령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왜 성령님을 삼위일체 중 한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사도행전 5장에서 초대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어떻게대처했는지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한 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성령님을 비인격적존재인 '그것' it 으로 치부하게 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왜 성령님을 거스리는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인지를 알려주는 이유이다. 마 12:31~32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게 되는 시점은 성령님을 통해서이다. "내가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가장 직접적인 접촉의 시점은 아버지를 통해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죄인들을 중보하신다면 하 7:17~82 성령님은 이 땅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보혜사로 우리 가운데서 중보 하신다. 롬 8:26~27 오직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게된다. 성령님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이자 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영접할 수도 없다.
우리가 성령님을 '그것', 다시 말해 개성이나 의지가 없는 감화력이나 영향력으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쉽게 성령을 무시하게 된다. 또한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는 성령님의 음성과 초청에 귀를막고 듣지 않게 된다.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바라는바로 그분, 곧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시는 성령님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다.
황혼이 깃드는 그 일요일, 감람산 기슭에 서 계신 아들이 느꼈던 절망은 어떠했을까. 성전을 바라보시는 주님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간이 그날 밤 끝날 것을 아셨다. 그들은 성령님의애정 어린 호소를 마음으로 거절함으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이미거절한 상태였다. 깊은 슬픔에 잠겨 그리스도는 우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23:37~38
성령 하나님이 신격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만약 성령님을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우리 마음을 뜨겁게할 어떤 "감정이나 '능력' 쯤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불신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동맹인 거짓 삼위일체를 보게 되는데 계 16:13~14) 이 마지막 존재는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과 유사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선지자가 하나님,특별히 성령을 대언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도 동일한 일을 할 것이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1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거짓 선지자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하여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늘의 자판기가 아니시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동전을 가득 넣으면 기계적으로 능력이나 축복으로 반응하지 않으신다" 도널드 윌리엄스, <성령의 위격과 사역>, 10
기적이나 경이로운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그저 "능력"이나 "감각을 신뢰한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롬 10:17 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믿음은 기적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님을 우리의 의지를 드림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의지에 따라 부릴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보다는 그들 스스로 만든 신을 더 받들다가 속게 될 것이다. 그간 속임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신은 결국 우리를 실망과 불신으로 이끌 것이다.
성령님을 삼위일체의 한 신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그분의 특징인 완전한 겸손을 생각할 때에 우리 또한 굴복하고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눅 10:22 성경은 성령 하나님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성령은 구약 성경에서 88회, 신약 성경에서 325회 언급되었으나 이 숫자는 삼위일체의 다른 두 분들에 관한 수많은 언급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벧후 1:21 성령님은 전형적인 신적 겸손으로 그 일을 하셨다. 성령님은 자신에 관하여 적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성령님의 신격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태도이다. 성령님은 자신과 아들 혹은 아버지와의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와 관계에 초점을 더욱 맞추신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그 안에 계신다. 아들과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령과 아버지와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자유롭게 소통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가운데 존재하는 이기심 없는 사랑, 특히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에 관한 통찰을 제시한다. 성령님이 자원하여 더 낮은 지위에서 봉사하시는 것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며 바로 지금이 그분의 위대한 사역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자 하는 그분의 소망 때문이다. 분명히 성령님에게 있어서 동등과 복종은 상호 모순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올림픽 만신전이나 북유럽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영어에서 소문자로 표기하는 신들gods 은 끊임없이 다른 신들과 전쟁을 벌인다. 그 신들은 각각 독립적인 의지와 계획을 갖고 있으며 분명히 하나의 목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각기 자존심이 있으며 지키려는 영역이 있다. 이런 신들의 모습은 갈보리와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교만을 상기시킨다.
성령님이 더 높아지려고 다투고 서로 의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게 되자, 거룩한 복종심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그들은 "한 마음" 행 1:14; 2:1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 당시의 모임은 삼위일체를 반영하였다. 사실, 완전한 겸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보적인 특성일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은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우주의 신만 소유할 수 있는 다른 특성들을 이보다 더 잘 관리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다. 마음의 겸손은 선택과 의지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자신을 제한하기로 선택하신다. 왜냐하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제 3위가 영원토록 보여 주신 깊은 겸양에 관해 숙고할 때, 우리의 자랑과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자랑과 옹졸함은 티끌이 된다.
성령 하나님의 신격이 중요한 마지막 이유는 이것이다. 인격적 존재만 다른 이들과 협력하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과 협력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던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신학적 논쟁에 직면했을 때 행 15:1~29 교회, 곧 “형제들 중에 인도자" 22절 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이 사안을 다룬 후에 내린 결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꼭 필수적인 사항 몇 가지 외에는 여러분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의 뜻이며 또 우리의 뜻입니다.” 행 15:28, 우리말 성경 이렇게 긴밀한 연합과 협력은 인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바울과 그의 선교동역자들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였으나 성령님의 개입으로 두 번이나 제지당했다. 결국 그들은 아시아 대신 마게도냐로 갔고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는 하나님[여기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기술함]이 저 사람들[아시아 대신 마게도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6~10
이렇게 열린 대화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바울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은 단순한 감화 그 이상의 존재였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그를 인도하시는 분이셨다.
요한계시록에서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아시아의 교회들을 부르실 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계 2:7, 11, 17, 29;3:6, 13, 22 을 주의하여 들으라고 하셨다.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경고와 충고는 관계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오직 신뢰하는 사람들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성령님의 음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신자들이 그런 음성을 듣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음을 뜻한다. 성령님은 하늘의 심령적 환영이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실제로 들을 수있도록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과 그 백성의 이런 친밀한 관계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호소에서 볼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
여기에서 이 구절이 말하지 않은 것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성령과교회 혹은 "성령과 그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구절은 "성령과신부"라고 말한다. 이것은 결혼식 장면이다. 하늘의 신랑에 관심이 쏠려 있다. 신랑을 가장 사랑하는 그의 신부인 교회와그의 하늘 들러리인 성령님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잔치로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외쳤던 이 소리, 곧 아들을 대신하여 성령님이 분명한 음성으로 그분의백성을 위해 외쳤던 이 소리는 영원토록 메아리쳐 울릴 것이다.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이번 장에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준 성경적 예들은 무엇인가?
2. 오직 하나님께 속한 성령님의 3가지 특성은 무엇인가?
3. 재림교회의 초기에 유라이아 스미스와 엘렌 화잇은 성령님에 관하여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오늘날 재림교인들 중에도 그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성경에서 오직 성령님만 소유한 어떤 속성이나 특성은 무엇인가?
5. 삼위일체에서 성령님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는가?어떻게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연결되어 있는가?
6. 왜 아리안 주의는 성령님과 삼위일체의 관계를 부정확하게 보는가?7. 신명기 6장 4절에서 모세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8. 성령님을 단지 비인격적인 '감화력'이나 '그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가?
9. 오직 '기적'과 '징조'를 보아야만 믿는다면, 성령님에 대해 무엇이라고말하는 셈인가?
10. 성경에서 성령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토록 적게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11. 요한계시록 22장은 성령을 사물이 아닌 인격적 존재로 보는 데 어떤도움을 주는가?
12. 이번 장을 읽으면서 무엇 때문에 성령님이 인격적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