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가득 쑥국 향기... 처가에서 쑥을 따왔습니다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05-19 07:08:21
▲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쑥을 뜯는 모녀
ⓒ 유진택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통을 붙잡고 또 한바탕 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장모님한테서 온 전화가 분명합니다. 아내의 말투와 웃는 소리만 들어봐도 장모님이 틀림없습니다.
장인어른과 함께 적적하게 시골집을 지키다보니 주말만 되면 시골에 내려오라고 전화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절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아내 때문입니다.
아내가 집안 일만 한다면 만사 제쳐놓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놀다오겠지만 직장에 얽매이다 보니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50이 다돼가는 나이에 해야 하는 직장생활이 편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어도 피곤하다고 하는 나이 아닌가요.
그런데도 직장에 나가 가족들의 생계를 일부 떠맡고 있으니 그 어깨가 천근만근 내려앉는 것은 뻔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장모님과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난 아내가 전화를 끊더니 시골(친정)에 내려가자고 합니다.
심심하면 산을 타는 두 분... 산나물은 사남매에게 골고루
평소에는 눈 깜짝 하지 않더니 오늘 따라 마음이 돌아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장모님이 뜯어놓은 산나물을 싣고 오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두 분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되레 더 빼앗아 오려고 하는 것이 시집간 딸의 영악한 마음이라면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시골에 내려오면 산나물을 뜯는 일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습니다. 처가에서 차로 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평전 산속으로 들어가 두 분과 함께 산나물을 뜯었던 일은 아직도 한 때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처럼 깊은 산속을 해매다가 산나물을 잔뜩 뜯어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반가워 산속이 마치 전세 낸 듯 시끌벅적합니다.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산속에 들어차 마치 산자락이 와장창 무너질 듯 합니다. 그렇게 산을 타다보니 두 분의 몸은 아주 탄력있게 단련이 되어 있습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인어른이나 작년 급작스레 닥친 뇌출혈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장모님은 겉보기와는 달리 산을 타는 솜씨가 제법입니다.
그렇게 뜯어온 산나물은 대전에 사는 사남매에게 골고루 분배됩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반찬으로 씁니다. 식사할 때 보면 알 수 있듯이 반찬이 거의 산나물입니다.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시는 장모님이 육식은 해롭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상을 거의 산나물 위주로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분이 시간 날 때마다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도로변에는 애기쑥들이 지천
▲ 쑥을 뜯는 '봄 아줌마'
ⓒ 유진택
오늘도 점심때가 한참 지나 나물을 뜯으러 갔습니다. 두 분이 단골처럼 다니는 산속대신 처가와 가까운 도로변 밭으로 향했습니다. 장인어른은 동네에 마련된 공터로 게이트볼을 치러 가시고 장모님, 아내와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도로 옆 밭가에는 여리게 올라오는 연두빛 쑥이 지천입니다. 솜털을 달고 손톱만한 잎을 파르르 떠는 애기쑥들의 향기가 상큼했습니다. 그 향기를 맡으며 장모님과 아내는 쪼그려 앉아 쑥을 뜯었습니다.
쑥 뜯는 모습을 보니 두 모녀가 신기하게 닮았습니다. 갸름한 얼굴하며 목소리하며 깔깔대며 웃는 것이 누가 한 눈에 봐도 모녀지간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모녀를 곁눈질하며 그냥 카메라만 들고 어슬렁거렸더니 멀리서 장모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게 있지 마고 어셔 와 쑥 좀 뜨어!(그렇게 잊지 말고 어서 와 쑥 좀 뜯어!)"
사내 체면 구긴다고 폼만 잡고 있었더니 같이 쑥 좀 뜯자는 장모님의 지청구입니다. 그러나 발음이 아직도 시원찮습니다. 작년 갑작스레 닥친 뇌출혈 후유증 때문입니다.
1년이 지나 이젠 거의 완치되었지만 가끔 가다 발음이 엇갈려 듣는 사람들도 답답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둘이 뜯은 쑥을 보니 비닐봉지가 불룩합니다. 이걸로 쑥국을 끓여먹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힐 겁니다.
쑥국을 맛본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대전 가서 아내한테 쑥국을 끓여달라고 해야지, 빨리 집에 가자는 나의 성화를 못 이겨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 시간은 해거름이 깔릴 무렵입니다.
향긋한 쑥국 내음 가득한 주방
그 다음 날 아내가 쑥국 끓일 준비를 했습니다. 탁자 위에는 뜯어온 쑥들이 한 움큼 흩어져 있습니다. 대전의 세 남매에게 나눠줄 쑥도 검은 비닐봉지에 쌓여 한약봉지처럼 달랑 묶여있습니다. 보나마나 장모님의 작품입니다.
코끝을 대니 흙에서 금방 피어오른 것 같은 향긋한 쑥내음이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그래도 어제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 처가에서 다듬고 와서 그런지 정갈합니다. 밭에서 뜯을 때 보았던 뿌리 채 묻은 흙이나 잎을 어지럽혔던 티끌은 하나도 없습니다. 뿌리 끝이 하얗게 보이도록 쌈박하게 뜯은 걸 보니 정성을 많이 들였나 봅니다. 그런데 아내가 쑥을 요모조모 살피더니
"이건 분명히 엄마가 다듬은 것인데, 잡풀이 섞여 있는 걸 보니, 어두운 눈으로 어떻게 쑥을 뜯었을까?"
아내가 울컥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당뇨가 심해져 점점 시력이 약해져 간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깐, 아내가 조개국물에 된장 푼 물을 펄펄 끓이고 슬쩍 대친 쑥을 냄비 속에 넣는 걸 보면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한참 후에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나왔더니 주방은 온통 쑥 냄새로 향긋합니다.
쑥국에 밥 몇술을 넣고 말아 씹었더니 그 향기가 입안에 가득찼습니다. 몇 번 후루룩 들이켰더니 금세 배가 빵빵하게 불러왔습니다. 이런 맛에 쑥을 뜯으러 가나봅니다.
오늘 하루도 쑥국때문에 저절로 힘이 솟겠습니다. 쑥이 자라 빳빳한 줄기로 변하기 전 처가에서 전화가 오면 만사 제쳐놓고 다시 한번 달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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