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주일, 목사님의 성역 40년을 포함하여 2024년 한 해를 결산하는 영상을 함께 봤습니다. 목사님의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그 안에서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가 뚫려 듣게 되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나는 놀라운 장면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1시간짜리 영상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피나는 과정입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있을까요? 없습니다. 농부가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한가득 들이는 것만 보고, ‘좋겠네~~, 부자네~~~’ 하면 오산입니다. 그 농부가 이른 봄부터 눈물로 씨를 뿌리고, 한여름 땡볕에서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눈물겨운 노력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목사님, 너무 멋져요. 안 가본 나라가 없으시니 너무 부럽네요. 목사님이 손을 대니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쫓겨가는 것도 너무 멋집니다.”라고 말합니다. 네, 멋지지요. 그러나 아십니까? 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제가 얼마나 눈물로 씨를 뿌리는지를.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제가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 이름도 잘 모르는 자들, 성령도 받지 않은 자들을 상대로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한은택 목사가 우리 교회 신문에 글로 썼듯이, 저는 호텔에 들어가 침대에 눕지도 않고 바닥에 단지 수건 두 장만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오직 기도만 합니다. 당신 스스로 법을 정하시고, 그 법을 넘지 않으신 하나님이 분명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는 마치 자식을 얻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목회 40년이 그랬기에 ‘주님, 내 걸어온 길 뒤돌아 생각하니 물 없는 사막, 눈 덮인 산야 외롭고 고달파 외롭고 고달파’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공짜는 독약에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12차까지 했습니다. 이를 본 지인이 “정말 목사님 교인들이 준비한 건가요?”라고 묻습디다. 너무 잘했다는 거지요. 너무 완벽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당연히 우리 교인들이야. 저 작품이 거저 나왔겠는가. 그네들이 그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손바닥, 발바닥이 다 까지고 발, 무릎에 멍이 들어가면서 노력했다네. 어디 그뿐인가? 완벽한 무대를 꾸미기 위해 우리 성도들이 밤을 새가면서 봉사한 거야. 세상에 공짜는 없네.”
문득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강수지 씨가 생각납니다. 한때 그녀의 발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발레복을 입고 화려한 무대에서 백조처럼 춤을 추는 그녀 뒤에 숨은 노력이 그녀의 발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발은 그야말로 굳은살이 박힌 상처투성이였고, 발가락은 비틀어져 거의 기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눈물로 씨를 뿌렸는지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멸망하는 길은, 실패하는 길은 문이 크고 길이 넓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살면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열매든, 혼적인 열매든, 육적인 열매든 거두길 원하냐? 그러면 좁은 문으로 자처해서 들어가라. 그 길은 힘들어서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로 가면 영·혼·육에 성공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불모지였던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그 밖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선교의 교두보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1~13)라고 탄식 아닌 탄식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전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러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편안함을 포기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한 시대에 맥을 그은 인물들이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선친들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편안함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난의 길로 몰아넣은 자들입니다. 안주하려는 자신과 싸워 이긴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오직 목적만 바라보고 귀는 막고 달려간 자들이 인생의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겠다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겠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면서,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가지겠다면서, 최고의 기업가가 되겠다고 하면서, 최고의 교회를 세우겠다면서 남들처럼 놀 것 다 놀고,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으면서 편안하다 안일하다 살면 됩니까? 꿈을 버리든가, 편안하다 안일하다 하는 자세를 버리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저를 염려해서 ‘좀 쉬세요’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처하여 저를 좁은 길로 몰아넣는 것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이 어마어마한 결실을 얻겠다면서 쉬면 되겠습니까? 놀면서 이 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단의 많은 젊은이들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공부해라. 몇 년 고생하면 평생을 편하게 산다.” 그렇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시절이 옵니다. 제가 노량진 교육관을 기도처로 개조하는 것도 눈물의 기도를 뿌려 기쁨의 열매를 얻자는 취지에서입니다. 밤마다 노량진까지 와서 기도해야 하는 수고가 있겠지만, 그 수고로 얻어지는 수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일 것이기에 말입니다. 주님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을 내지 말고 뿌려봅시다”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도 안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싸여 아예 씨조차 뿌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씨를 뿌린 곳에 태양만 내리쬐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비도 와야 하고, 때론 태풍도 몰아쳐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어떤 작물은 당년에 바로 거두지만, 어떤 것은 3년이 지나야 거두고, 인삼은 6년근이 되어야 거둡니다. 그 기간동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온다’는 믿음을 지키며 노력하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어떤 작품을 남기고 싶습니까? 큰 작품은 오래 걸리고, 그만큼의 수고를 요합니다. 그러나 그 작품이 완성되면 세상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는 스타가 될 것이고, 스타에게는 명성과 부귀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2025년, 늦었다고 생각 말고 이제라도 씨를 뿌려봅시다. 누가복음 13장에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의 주인이 다시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수고를 해서 이제 열매를 거두겠다고 한 것처럼, 이제라도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공짜는 독약에만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성공하기 원하면
편안함을 포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