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19.
"천리마도 피곤하면 평범한 말에 뒤진다. 무릇 열등한 말이 힘에서 결코 천리마를 따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앞설 수 있다는 말인가? 다름 아니라 늦게 출발하는 조건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권5에 나오는 말이다. “나중에 출발하여 제압한다(後發制人·후발제인)”라는 방책의 묘미를 에둘러 표현했다. “남보다 뒤처졌을 때는 상대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법”(『백전기법(百戰奇法)』 「후전(後戰)」)이라는 설파와 맥을 같이한다. “먼저 출발하여 제압한다(先發制人·선발제인)”라는 책략과 상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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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은 세계 최고 축구 무대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도 손꼽히는 걸출한 골잡이다. 내로라하는 골잡이들의 각축이 펼쳐지는 EPL에서도 득점왕(2021-2022시즌)에 오르는 놀라운 득점력을 떨친 바 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손흥민은 EPL 득점왕 2연패의 대야망을 불태우며 2022-2023시즌을 맞았다. 초반 꾀했던 모략은 선발제인이었다. 기선을 제압하고 그 기세로 대를 쪼개듯 내달리려 함에서 취한 방략이었다.
그런데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상대 수비수들의 집중 견제로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불운까지 겹쳤다. “골!”이라는 탄성이 터지는 순간, 자책골 또는 오프사이드 판정이 잇달았다.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를 맞히는 슈팅까지, 외면하는 ‘골운’에 시름이 깊어질 듯했다.
그러나 손흥민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언제든지 골을 터뜨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한 채 매 경기 온 힘을 다했다. 아울러 방책의 전환을 꾀했다. 자신이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양 내비침으로써 상대의 자만을 끌어낸 뒤 그 방심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한 수를 던졌다. 준비된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하는 장계취계(將計就計)의 방략, 곧 후발제인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영혼의 단짝’과 함께 밟아 가는 합작 골 50고지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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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골, 골!” 손흥민이 대폭발했다. 한꺼번에 세 골을 휘몰아치며 시즌 무득점의 어둠 속에서 박차고 나왔다. 6라운드까지 단 한 골도 뽑아내지 못하는, 깊게 잠든 듯했던 동면에서 깨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울러 단숨에 득점 10걸(공동 8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지난 17일(이하 현지 일자) 7라운드 레스터 시티전(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벤치에서 경기를 맞이한 손흥민이 터뜨린 해트트릭은 여러모로 되돌아볼 만치 뜻깊었다. 후반 14분 교체 투입된 뒤 불과 13분 사이에 세 골(28·39·41분)을 작렬했기에 더욱 그렇다.
먼저 토트넘 구단 역사상 첫 교체 투입 해트트릭이었다. 1882년 출범한 토트넘이 140년의 오랜 연륜을 쌓는 동안, 지금까지 교체돼 들어가 3골 이상을 뽑은 ‘작은 이적’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EPL 사상 일곱 번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2015-2016시즌 EPL 무대에 오른 손흥민은 제8막인 이번 시즌 레스터 시티까지 239경기를 소화하며 96골(47어시스트)을 터뜨렸다. 8시즌째를 소화하며 3골 이상을 뽑아낸 적은 이번까지 세 차례다. 첫 번째는 2020-2021시즌 사우샘프턴전이었고, 두 번째는 2021-2022시즌 애스턴 빌라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단짝’ 해리 케인(29)과 합작품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레스터 시티전에서, 손-케인 듀오는 합작품 재양산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경기에서, 손의 두 번째 왼발 감아차기 슈팅 골은 케인의 패스를 받아 이뤄졌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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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케인 짝꿍은 ‘찰떡궁합’의 힘을 마음껏 분출하며 EPL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있다. 듀오가 밟아 가는 합작 골(Goal Combinations) 기록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이다. 2015-2016시즌부터 호흡을 맞춰 온 둘은 그 다음 시즌(2016-2017) 첫 작품을 낸 이래로 불꽃 같은 기염을 뿜어 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 비로소 일곱 경기 만에 스타트를 끊었다. 둘의 합작품은 이제 레스터 시티전까지 42로 늘어났다(표 참조).
손-케인 단짝은 기념비적 금자탑을 세울 꿈을 부풀린다. 합작 골 50고지 등정의 열망을 불태운다. 장밋빛 희망이다. 침묵하던 손흥민이 놀라운 잠재력의 산물인 해트트릭을 분출하면서 EPL 기록사(史의) 눈부신 한쪽을 장식할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새 지평이 열릴 그 날이 기다려진다.
최규섭 /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