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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충만하게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좌우 앞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여리고라는 지역을 지나가게 되십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에 대해서 먼저 잠시 묵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여리고라는 지명은 신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구약에도 이미 기록되어졌고 알려졌던 이름이죠.
하지만 기원전 1400년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리고 성을 7바퀴를 돌면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히 작년에는 고대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역으 로 이렇게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여리고라는 지역은 그 의미를 볼 때 달의 정읍이라는 의미가 있고요. 종려나무의 정읍이라고도 합니다. 종려나무가 많아서 향기가 있어서 향기의 섬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곳에는 오아시스가 있었던 곳이고 당대 최고의 성읍이다 그렇게 일컬어졌습니다.
사진 4장을 보여드릴 텐데 여리고가 어떻게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한번 보실까요? 먼저 첫 번째 사진 보면 중앙에 여리고가 보이시죠. 사회를 중심으로 위쪽 12시 방향에 여리고가 있고요. 사회를 중심으로 11시 방향에 보면 예루살렘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저 위치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저 요단강 위쪽에 보면 갈릴리가 있어 갈릴리,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고 그 위에 들어와 시온 지역이 있고 갈릴리 동편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던 것을 우리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은 입체 사진인데요. 입체 사진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보실 때 왼쪽에 보시면 지중해가 있습니다. 지중해 거기를 해수면을 0으로 볼 때에 중앙에 있는 예루살렘 높이 있죠. 거기가 800m라고 돼 있어 800m 보시겠습니다. 해발이 800이다는 것이고 반면에 열리고는 어떻습니까? 4회 위쪽에 있잖아요. 거기 보면 마이너스 200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그러한 높이 차이가 기록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걸 조금 더 쉽게 보기 위해서 단면도로 볼게요. 단면도로 보시면 여러분 왼쪽에 보면 열이 예루살렘에서 높이가 천이라고 기록돼 있어 천 그리고 오른쪽 쭉 가셔서 끝에 보면 여리고가 있습니다. 그 높이가 천미 가량 된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고 직선으로 보시면 22km입니다. 그러니까 22km를 1천m를 올라가야 되니까 사실 많이 가파른 지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리고는 예루살렘과 그런 위치에 있다라는 것을 보시고, 마지막 사진 보시면 하늘에서 본 사진입니다. 여기 보면 초록색 길이 있죠. 여리고에서 출발해서 험난한 지역을 거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됩니다.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이곳에는 강도가 출연한 적도 종종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질문으로 답을 합니다. 율법에 뭐라고 적혀 있더나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게 옳은 것이냐라고 묻죠. 유법 교사가 대답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준호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옳다 일을 행위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이 율법학자가 율법 교사가 자신의 옳음을 내세우기 위해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 이야기의 서두에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그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리고라는 지역은 갈릴리에서 지나갈 때에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 거쳐 지나가는 주요 길목 중에 하나였다라는 특히 절기 때가 되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됩니다. 성전을 향해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요. 이곳이 오아시스이기 때문에 여기를 거쳐 갑니다. 향기 나는 도시잖아 숙박시설이 잘 돼 있거든요. 그래서 이곳에서 숙박을 하기도 하고 쉬어가는 그러한 장소였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열일보러 가실 때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열리로로 간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절기 유월절이 얼마 남지 않았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지금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한 그러한 모습이 상상되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마가는 이 여러 수많은 사람들을 조명하다가 그 카메라 앵글을 한 사람에게 집중 조명하면서 클로즈업하게 되죠. 46절에 보시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줍니다. 46절 읽어보십니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메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라는 그 이름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하죠. 걸인이다 맹인이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맹인이 된지는 우리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길가에 앉아서 평생 국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비참한 인생이었다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메오에게 이 길가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사람들로부터 거절의 쓴맛을 경험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은혜의 손길을 맛볼 수도 있는 그러한 삶의 현장이었다라는 것이죠.
특별히 유월절이 가까웠으니 인파가 몰리지 않았겠어요? 그 사람들이 또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가겠어요? 조금 더 선한 마음으로 갈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길가에 있던 바디노에게 더 많은 선한 마음으로 이렇게 베풀어줄 수 있는 소위 말해서 이 시점은 바디메오에게 대목이 대목 큰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 이 바디메오 그렇게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리가 한마디가 바디의 빛가에 울릴 정도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식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그의 귓가에 들린 거예요.
여러분 마가복음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주로 아까 이야기했듯이 갈릴리 지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갈릴리 건너편 데가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마가복음의 서사를 쭉 보시면 이 열리고에 오는 장면이 기록돼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오늘 이 마가가 기록할 때는 처음 방문하는 그러한 자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말이 있잖아요.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던 바로 이 바디메오에게 들려줬다라는 것이죠. 어쩌면 이 바디메오는 그 소식을 듣고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구걸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냐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가 반응하는 즉각적인 반응의 모습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어요. 47절 말씀을 보실까요?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사렛 예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소리 외쳤다는 거예 지체 없이 큰 소리로 외친 것이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여러분 바디메오가 들었을 때 어떤 이야기로 들었어요?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죠? 나사렛 예수 그런데 여러분 이 바디메오가 지금 뭐라고 외칩니까? 뭐라고 외쳐야 정상적인 거예요? 나사렛의 수여라고 외쳐야 되는 게 정상이죠. 그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들려진 대로 소리가 나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나셀의 예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요라고 외쳤다는 것이죠. 아주 보편적이지 않은 그러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이미 소문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라는 소식을 듣고 그분이 메시아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겠다 하신 그분이 바로 이분이라는 사실을 그는 마음 가운데 확신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왔을 때에 그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하게 된 것이죠. 거침이 없어요. 그냥 듣자마자 고백한 거예요. 다윗의 자손 예수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절히 불러보지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요. 꾸짖기 시작합니다. 좀 조용히 좀 해라. 시끄럽다 주님 가신데 왜 이렇게 떠드냐 하면서 이 사람을 제지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바디메오의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꾸짖는다 할지라도, 아니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바디메오에게 찾아왔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바디메오에 대해서 소개했잖아요. 그는 거지다, 맹일이다 두 가지입니다. 거지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거는요. 사람들이 어떻게 돕느냐에 따라서 그 삶은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맹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거는요. 자신 스스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요. 누군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인생의 문제죠. 바디메오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다윗의 자손 예수 그분밖에 없습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바디메오는 꾸짖는 사람 막아서는 사람들 앞에서 굴하거나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더 큰 믿음 믿음을 담고 더 꾹꾹 눌러담아서 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여러분 이 간절한 외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는요 누군가를 도와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도움을 받으면서도 살아갑니다. 그것은 참 귀한 것이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마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따라야 할 분은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살면서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구원의 문제는 나 스스로도 해결할 수도 없고 누군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오직 다윗의 자손 예수만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은혜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누누히 말씀을 드리잖아요. 귀인들에 의지하지 말며 도울 의미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여러분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임을 믿고 그분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잖아요.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여러분 이 예수만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성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이라는 특별히 우리의 삶에는요. 시시때때로 문제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는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또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문제가 있겠죠.
그러한 삶의 문제가 있을 때 세상을 의지하는 것도 좋지만 바디네어가 꾸짖는 자들의 장벽을 뚫고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우리 주님을 멈춰서게 하는 그러한 부르짖음, 그러한 간절함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머물러서 오신 예수님은 부르짖는 바디메오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다가 이 바디메오에게 집중을 하시니까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49절을 한번 보실까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 다음에 조용히 해라. 그렇게 꾸짖었던 사람들이요.
이제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고 안내해 주는 그러한 모습으로 태도가 변한 것이죠.
여러분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혹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10장 서두에 보면 사람들이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왜요? 예수님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해서 그때 제자들이 꾸짖는 장면이 10장 13절에 기록돼 있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에 제자들이 꾸짖거늘
그렇게 꾸짖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아라. 그들을 용납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죠. 여러분 예수님은요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죠. 어린아이들, 병들고 아픈 자들, 고아와 과부뿐만 아니라 귀신 들리는 자들, 이방인들 등등을 포함해서 소외된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아니겠어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 기하여 쓸데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부르짖고 나아가는 자를 제지하고 막아서서는 안 된다는 거죠. 오히려 그의 부르짖음을 들었을 때에 길을 열어주고 너 예수님 좀 만나봐라 너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권면해 주고 이끌어주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옳은 것이죠.
앞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어린 아이들을 꾸짖으며 제지했던 것처럼 오늘 본문 가운데 사람들은 거짓이며 맹인이었던 이 바디메오를 꾸짖으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제지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 나는 누군가가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제지하는 자의 입장에서 본 적은 없으신지요? 저와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환경을 만들어주는 그러한 축복의 통로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부활 주일날 환경을 만들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긴 것처럼 남은 기간 이 일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길을 만들고 환경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볼 수 있는 그러한 귀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아직 나는 거기에 동참하지 못했다. 낙심하지 마시고 아직 기간이 있으니 나도 하나님 한 영혼 함께 하시고 그 영혼이 주님께로 가는데 인도자가 되고 격려자가 되고, 그러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쓰임받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구하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바디메오는 반응을 합니다.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오늘 굉장히 생동감 있게 50절에 기록해 주고 있어요. 5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먼저 그는 겉옷을 내버렸다는 거예요. 당시의 겉옷은 두텁게 통으로 짜여진 옷, 우리 여성분들이 원피스 입잖아요. 그런 것처럼 통으로 입은 옷이었습니다. 이 바디메오가 왜 겉옷을 버렸을까요? 사실 바디메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매우 중요한 것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은 일교차가 심하지 않아요. 낮에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서 더워서 못 살겠다고 하지만 밤만 되면 추워서 못 살겠다고 그래. 그러니 이 겉옷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 단 하나의 사 이것이 잠을 잘 때 필요한 이불과 같은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 장구였다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은 겉옷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버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이것보다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더욱 소중합니다라는 그의 고백이 이곳에 담겨져 있지 않겠어요 주님께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 겉옷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 그것을 내어버린 것이죠.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겉옷을 버린 후 그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 오늘 본문에 보니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다. 내는 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예수님께 뛰어나가려고 하는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 모습은 어디에 따른 반응이냐 하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이 간절함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죠. 내 속에 있는 간절함이 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오라 하실 때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복음의 서사 누가 복음을 이렇게 쭉 읽다 보면 이 사건 이후에 바로 등장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 아십니까? 잘 어울리십시오. 부자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 세리 여러분 세리 삭개오는 부자로 살았죠.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경멸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도 열리고 해서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것이죠.
하지만 그도 보고 싶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키가 작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서 있는 거예요. 그래도 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예수님 만나야 되는 내가 그래도 예수님 봐야 되는데 그래서 그 간절함 주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옛날 성경에 꽃나무라고 돼 있죠. 그 감나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가?
그 길목을 지키고 살 여러분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기다리는 그 간절함, 그 간절함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습니까? 결국 그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이 그 집에 임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간절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또한 이 간절함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내어버릴 수 있는 이것이 방해가 되어서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런 사람 그렇게 간절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 우리 주님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그렇게 간절함으로 나아가니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요. 바로 앞에 이야기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질문과 동일하다는 거예요. 앞서 두 제자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 있죠. 우리의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그 질문과 대답이 어떠했는지 우리 마가복음 10장 36절 37절 바로 이 이야기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자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면서 세 번 이야기를 하셨어요. 내가 죽고 고난받고 죽고 부활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길에서 이야기하신 후에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이 제자들은 고난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영광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우리 형제를 잘 보셔서 하나는 우리 편 하나님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다른 복음서에서는 어머니가 와서 이야기했잖아요. 치맛바람 일으키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지 그렇게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모든 제자가 같은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이 야고보와 요한의 발언으로 인해서 열 제자의 반응은요. 성경에서 말합니다. 화를 냈다. 화를 냈다. 10명의 제자가 2명에게 화를 낸대 여러분 폴투르니에라는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일에 분노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에도 동일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할 때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분노하는가 같은 마음이 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분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가 영광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다라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디메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신 거예요.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대답합니다. 선생님이 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그가 구해야 될 게 무엇입니까? 거지잖아요. 한 푼만 주세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시오. 이왕이면 넉넉한 삶의 공간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문제를 놓고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에 구하던 돈을 구하지 않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그것을 믿음으로 간청했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하고 간구할 때에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반드시 구해야 될 것 나 스스로도 할 수 없고 누군가도 해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해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의 구원 구원이죠. 그분은 예수님만 해 주실 수 있는 것 이것을 구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목사님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이제 성도님들에 대해서 기도의 제목들을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들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도 제목들이 있어요. 들어보면 교회 오래 다니시고 분명히 직분을 받으셨는데 이렇게 대화를 해보면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 성도님들이 그냥 구원의 확신을 좀 다 가졌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어느 날 고민을 했어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 그런 분은 없겠지 신앙생활 오래 하시고 직분이 있는데 그냥 앉아서 제가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 우리 교회는 없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 이 중에 거기에 속한 분이 있다면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오늘 이 시간 나에게 임하셔서 구원의 문제까지 해결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귀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와 간구 부르짖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디메오가 눈을 뜨면 무엇이 가장 보고 싶었을까요? 오랫동안 이 사람은 보지 못하고 살았어. 눈을 뜨는 순간 뭐가 보고 싶을까? 가족도 보고 싶을 거예요. 또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하지 않았겠어요? 조금만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나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저기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데 궁금하네. 나 여리고 이 아름다운 도시라 하는데 나는 이 여리고 어떤가? 또 아니 내가 예수님을 부르는데 제지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궁금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도대체 누굴까 그런 여러 가지 궁금증으로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눈을 뜨고 보니 뭐가 보였겠어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무리가 있지 않았겠어요? 그 앞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나 앞에 있는 수림 보고 나를 보니 왠지 초라 왜요? 내가 가지고 있던 겉옷마저도 버리고 지금 주님 앞에 속옷 바람으로 어떻게 보면 그렇게 서 있는 내 모습 찌질하고 못난 나영 없어 이 모습 안 보였겠습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다 집중하고 있어 예수 믿는 나 이 상황에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지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그래서 영의 눈이 열리게 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죄라는 죄.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십니다. 그날 밤새도록 그물을 늘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분을 깁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배를 좀 띄워달라 해서 그 배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죠.
깊은 데로 가서 고민을 내려봐라.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옳지 않고 경험적으로 봐도 전혀 옳지 않은 그러한 말씀이었지만 이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주세. 나는 죄인으로서 주님을 만나고, 나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봐야 돼요.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을 찾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위에 뭐가 끼지 않았는지 그렇게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나의 모습을 조명해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러분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한 후에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제자의 삶으로 바뀌게 되었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어땠을까요? 바디메오의 모습을 보실까요? 52절. 오늘 본문 52절을 같이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리라.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후에 가라 내 믿음이 너희를 구원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 또한 부르짖고 부르짖는 믿음이죠. 그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가라 그러면 여러분 이 바디메오가 가고 싶은 데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이제 내 집으로 가야 되나 어디로 가야 되나 고민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의 결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눈을 뜬 즉시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제 눈을 떴으니 세상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거 따르며 살아라. 그렇게 뜨게 하신 걸까요? 아니죠. 이제 눈 떴으니 주님만 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다오. 그런 마음으로 뜨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 영안이 열리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목숨 걸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궁금하고 기웃기웃거리고 거기에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악인의 꾀를 따르게 됩니다. 어느 순간 죄인의 길에 서 있고 어느 순간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점진적으로 죄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바디메오는 같은 10장에 기록된 부자 청년과 선택이 달랐습니다. 같은 10장에 부자 청년의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지난주에 말씀을 나눴잖아요. 부자 청년은요. 주님을 따르겠다고 왔지만 가진 재물이 많아서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장애물이 되었고 결국에는 근심하여서 주님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을 부르짖었고 자신의 삶에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거듭까지도 버리면서 따를 수 있는 그러한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 죄인임을 고백했다면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그러한 참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혹여나 아직까지 그런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하나님 내가 예배드리는 그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 나에게 찾아와 주시고 나에게 은혜 주셔서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나도 주님을 따르겠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