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목). 여행 둘째날.
오전엔 슈프레강을 따라 정부청사 주위를 산책하고 오후에는 두 곳의 마켓을 갔다. 두 곳 모두 목요일 특별한 장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한 곳은 Hackescher Market 으로 단체 여행 중에 주요하게 방문할 곳으로 되어있었는데 역사도 1908년 경에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로 유서가 깊었고 유대인들이 이 근처에 이주해서 많이 거주했기에 유대인 학살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베를린 문화 역사 예술의 힙한 아이콘으로 주요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다시 올리기로 하고, 이날은 특별히 매주 목요일 플리마켓처럼 광장에 장이 선다고 해서 그걸 구경하러 갔다.
광장 한가득 각종 민예품들과 옷, 가방, 액세서리, 핸드메이드 수공예품들을 팔고 있었고 한 켠에선 먹거리 장터가 열려서 맥주와 소시지, 케밥 외에도 다양한 음식 포차들이 나와 있었다. 그가운데 한국 비빔밥과 만두를 팔고 있는 포차도 있었다.
(사진저장공간 부족으로 남긴 사진이 별로 없다는 점이 함정. 사실 그런 사진 찍기를 별로 즐기지는 않는데 막상 블로그를 올리려고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 중요하게 이야기할 곳은 그날 연이어 찾아간 마르크트할레노인(Markthalle 9). 독일어 문맹인 내겐 이름이 너무 어려워 도무지 외워지질 않았는데 번역하면 "마켓홀 9번"이라는 걸 알고 나니 드디어 이 이름이 기억에 남게 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중앙시장 14개 중 9번 시장이라는 뜻이다. 여기와 같은 전통시장이 14곳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졌고 9번 시장도 없어졌다가 다시 복원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20년 역사를 가진 전통있는 시장이다.
공부도 할 겸, 재미로 chat GPT에게 이 시장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정보를 토대로 자세히 설명해준다. 1891년에 원래 식료품 도매시장으로 사용되었는데 통독 이후 소멸 위기를 맞다가 2011년에 도시재생사업으로 전면 개조되어 현재는 개성있는 식품과 농산물, 음료, 빵 육류 등을 취급하는 현대적인 식품시장으로 변모했다. 새로 개편하면서 주민들 외에 관광객 유치를 겨냥하면서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든 유기농 제품, 지역 특산물, 세계 다양한 나라의 특색있는 음식 등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홈피에는 '슬로우푸드 개념에 부합하는 좋고 깨끗하며 공정한 재료만 사용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와 문화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와 워크숍도 열고 있으며 특히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street food thursday"가 열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제대로 된 여행자라면 바로 목요일 저녁 6시에 이 시장을 방문해야 했으나, 어설픈 관광객인 우리는 우리 시간에 맞추어 오후 시간에 이곳을 방문했다. 먹고 마시고 즐기기 보다는 그저 어떤 곳인지 한 번 둘러보려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점심도 두둑히 먹어서 배가 부른 상태에서 이 먹거리 시장을 방문했더니 수많은 음식과 음료, 과일과 술이 모두 우리에겐 잘 그려진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식사 시간이 아니었지만 시장은 북적거렸고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간식과 술, 음료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천천히 걸으며 눈으로만 맛볼 뿐.....한 켠에선 우크라이나 구호를 위한 캠페인 겸 모금을 위해 우크라이나 음식을 만드는 코너가 막 준비 중이어서 그 전통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아쉬웠다.
호텔에 잠시 머물 뿐인 우리들에게 싱싱한 야채와 과일은 눈으로만 담아야만 하는 상품. 우리에게 익숙한 채소도, 낯선 채소들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독일 물가가 싸지는 않아서 과일 앞에서도 망설이기만 할 뿐, 선뜻 무엇을 집어들지 않았다. 그와중에 내 눈길을 계속 잡아끄는 건 애플망고. 한국에선 크기도 작은데 너무 비싸 언감생심 사먹지 못하고 있는 이 과일이 독일에선 비교적 싼 편에 속하니 여러 번 사먹었다.
배는 부르고, 어떤 음식이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돌아다니는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치즈 코너.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다양한 치즈들이 가득차있는 매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결국 여기서 빵에 발라먹을 치즈 몇 종을 구입했다. 아주 조금씩...소심하게....(맛있었다!)
시장이라곤 해도 결코 싸지 않은 치즈. 아주아주 조금...코딱지만하게 잘라주는 치즈를 몇 개 골라 시식하고선 조금씩 사서 돌아왔다.
시장 안에는 이렇게 오래된 스티커 포토기계가 있었는데 신기한 맘에 사진만 찍었을 뿐, 실제 이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갔으면 반드시 이 빈티지한 명물 사진기계로 즉석사진을 찍었어야 한다는 여행 팁을 듣고 잠시 후회하기도....역시 늙은 여행자에겐 이런 일 따위 귀찮을 뿐인 것을....
마르크트할레노인에서 맛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냐, 저녁 시간 신나는 요리축제를 즐긴 것도 아냐, 그저 재미없는 발품 투어에 그치기만 했던 이 어설픈 여행자를 열광하게 한 건 바로 이 시장 정문 옆에 있는 요리 전문 서점이었다. <Goldhahn und Sampson>이라는 책방 제목을 봐서는 두 명이 운영하는 서점인 것 같은데 요리책과 각종 요리 재료를 판매하는 서점이었다.
책방 양 옆이 모두 음식점이며 카페였고, 그 한복판에 이렇게 요리책방이 있다는 건 보기에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 서점에서 가장 좋았던 건 무엇보다 "깔맞춤"이었다.
독일어를 모르니 어떤 책들을 배열했는지는 모르나 주제별로 정리된 그 안에서 화려하게 색감을 조율해가며 책을 꽂아두었다.
한 쪽 벽엔 책이 가득 꽂힌 서가가 있고 중심에 있는 매대엔 책과 향신료, 초콜릿 등 간단한 간식류들. 여기서 나는 기념으로 사진에 보이는 <Berlin> 미니 쿡북을 샀다. 베를린의 중심 요리들을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책인데 다행히도 영어로 되어있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체 공간의 절반 넘게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식재료들의 향연. 세계 각국의 식재료들이 있었고 일본 간장과 기름 미소된장까지 있는데 한국요리 재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세상에 저 많은 식재료들은 다 뭐지....각각의 내용물들은 모르겠으나 일단 전시와 색감이 너무 예뻐서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코너 한 칸을 갖고싶다고 생각했다.
각종 머스터드 류도 이렇게 예쁜 도자기병에 담아 팔고 있었는데 가격이 비싸지 않아서 예쁜 이 도자기 때문에 사오고 싶었다.
커피도 있고, 홍차, 녹차, 중국차들도 있고 세계 각국의 술도 있고....이 서점 한 곳만으로도 세계 여행이 가능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주변에 아시안 식당들이 많아서인지 아시아 식재료가 많은 것도 특징이었다. 마르크트할레노인이 펼치는 음식 페스티벌과 이 동네의 가게들이 모두 하나의 커뮤니티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가 너무 맘에 든다고 감탄하며 한참을 구경했더니 나도 이 가게가 좋다고....그래서 이걸 하고 있다고 서점 주인이 웃으며 대꾸한다.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가 취미인 사람들에게 이곳은 얼마나 황홀한 여행지일까. 온통 화려하고 푸짐하고 풍성한 세계의 요리 마켓에 가서 달랑 치즈 세 조각 사들고 온 나란 사람....많이는 먹지만 결코 미식과는 관련이 없는, '굶주린 식탐녀'일 뿐인 내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고 돌아와 그날밤 호텔에서 마른 빵에 치즈 잔뜩 얹어 꾸역꾸역 먹었더랬다. 비록 아주 소심하게 사들고 온 세 조각의 치즈였지만 마치 가난한 과부의 기름병 마냥, 이날 이후 사흘 동안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될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