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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시절
1929년 1월 14일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1383-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홍조(金洪祚, 1911~2008)와 모친 밀양 박씨 박부련(朴富連, 1909~1960)은 슬하에 1남 5녀를 뒀는데, 그 중에서 장남은 김영삼이다. 나머지는 전부 김영삼 여동생들이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분에 매우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는 개구쟁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번은 목이 마르다고 논에 있는 물을 마셨다가 어머니께 회초리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1992년 대통령 당선 이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영삼이 살던 마을의 주민들이 했던 인터뷰를 보면 7~8살 시기에도 김영삼의 부모가 대량의 멸치를 말려 놓고 잠시 어린 김영삼에게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집에 다녀오면 그 사이 부랑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와 멸치를 훔쳐가곤 했는데, 보호자도 없는 상황의 어린 영삼은 뒷짐을 지고 거침없이 그 아저씨들에게 가서 "다 큰 어른이 남의 물건을 훔쳐가면 도둑놈이지요!"라고 훈계했다고 한다. 물론 배고팠던 부랑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멸치를 훔쳐 영삼의 부모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갔다고 한다. 하여튼 이때 형성된 낙천적인 성격이 훗날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통영중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을 멸시했다고 전해지는 일본인 교장이 전근을 가게 됐는데, 학생들을 동원해 이삿짐을 나르게 했다고 한다. 이때 김영삼은 설탕 부대에 구멍을 뚫어 줄줄 새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중에야 설탕이 줄었다는 것을 알게 된 교장은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범인을 찾으라고 했고, 김영삼은 주저하지 않고 자백했다가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한 썰에 의하면, 이 교장은 조선인을 멸시하여 점심시간에 종종 학교를 돌다가 조선인 학생들이 도시락에 싸온 깍두기를 "마늘 냄새나 풍기는 조센징들의 음식 따위 재수 없다"며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짓을 자주 했고, 어느날 김영삼의 어머니가 싸준 깍두기도 교장이 버려버리자 김영삼이 크게 분노하여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 어머니가 손수 싸준 깍두기란 말이오!"라며 강하게 대들었다가 거꾸로 교장에게 혼이 나고 모욕을 당해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후에 기회가 와서 저 설탕 포대를 망가뜨리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는 썰이다.
물론 이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90년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당시 YS에 대한 책이나 만화가 많이 나왔고, 그 중 많은 책에 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쟁 분위기 속의 일제 말기이던 당시 사회분위기상 칼까지 차고 다니던 교장들도 꽤 있던 현실 속에서 그에게 대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일화는 후에 정치를 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드센 기세를 보이며 살았던 정치인 김영삼의 인생과 닮아 있는 일화라 실존했던 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일본인 교감은 조선인들을 연민했는지 김영삼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을 많이 감싸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영삼은 50여년이 지난 후 대통령에 당선되자 직접 이 교감의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한 적도 있다. 교감 본인은 일제강점기 때 교사를 했으니 김영삼이 1992년에 당선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성향이 일본놈들 버르장머리 발언에서 보이듯 반일성향이 강했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해방이 된 후 경남중학교에 편입되었는데, 언젠가 미국처럼 대통령제가 실시될거라 생각하고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여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은 1992년 말 대선 때 이루어졌다.
2. 정계 입문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일각에서는 청강생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서울대에서 정식 입학 및 졸업생으로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종결되었다. 김영삼의 대학교 성적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웅변 대회에 2등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웅변 실력에 감탄한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되며, 후에 장택상의 선거 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웅변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훈병으로 배치된다.
전쟁이 끝난 후, 김영삼은 그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가 됐다. 그후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었고, 김영삼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됐다. 1953년 9월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김영삼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 결심을 굳힌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의 입당 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5세 4개월의 최연소 기록으로 현역 국회의원인 무소속 이채오 후보를 누르고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 그가 세운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깨지지 않고 있다. 3위가 만 26세 6개월인 전휴상. 참고로, 공직선거법 제 16조 2항에 따르면 18세 이상이어야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생긴다. 이것도 21대 국회에서 피선거권 연령을 낮춰서 된 것으로, 그 전에는 만 25세 이상이어야 했다.
참고로, 역대 최고령 국회의원 당선자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1번에 출마해 당시 만 84세의 나이로 당선된 문창모 의원이다.
2.1. 정치 초년생 시기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3선 제한 철폐에 반대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노린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초선 의원 임기가 끝나자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자유당 이상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다.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 의원 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김영삼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 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 등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본인으로선 정말 슬픈 일이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본인의 정치행보에는 이익이 됐다는 시각이 있다. 당시 한국의 군사정권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을 실제 그 사람의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빨갱이로 모는 경우가 흔했는데, 북한의 무장간첩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 '빨갱이'가 됐다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삼은 여타 야당 인사들과는 달리 종북몰이에서 다소 자유로웠다. 당대 야권의 또 다른 간판 스타였던 김대중이 평생 '빨갱이'라는 소리에 시달리며 살았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당시 기사 애초에 김영삼 본인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김영삼은 80년대 이후 주사파가 등장하며 학생 운동이 지나치게 좌경화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문에 운동권은 김영삼에게 맹비난을 퍼붓고 김대중에게 몰빵 지지를 보내게 된다.
2.2. 40대 기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군정의 실무를 맡은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필 본인이 직접 김영삼을 만나 새로 창당될 민주공화당에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김영삼은 “전부 다 군사 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영삼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출소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1969년 6월 20일 신민당의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중 남산 멧돼지에 의해 자신이 탄 승용차에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1971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유진산 당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1차 경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과반 득표에 실패하면서 김대중과 1:1로 결선 투표를 치르는 2차 경선이 이어졌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철승 쪽 표가 김대중에게 옮겨가면서 결국 김대중에 패배했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지원하면서, 본인의 75년 차기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7대 대선에서 간신히 승리해 다음을 보장할 수 없음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일으키면서 김영삼의 행보도 꼬이게 된다.
2.3. 유신 시기의 민주화 운동
김영삼+박정희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
ㅡ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에서 김태촌과 맞서며 남긴 말.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ㅡ 1979년 10월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후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ㅡ 제명된 후 기자 인터뷰에서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함께 해외에 있다가 망명을 선택한 김대중과 달리 김영삼은 귀국하였고, 정치 활동에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하며 강력히 규탄했다.
유신 체제는 지속되었고, 신민당은 당 노선을 두고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즉각 민주를 외치는 강경파와 경제와 안보면에선 협력하자는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갈라졌다. 1974년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사망하자 곧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고,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의 총재 당선을 막으려고 경쟁 후보 지원에 여념 없었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여겨볼 점은 당시 공작정치의 주역은 정보부뿐만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도 뛰고 있었다. 당선된 김영삼은 선명야당론을 내세워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하며 강경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정세상의 문제로 대여 강경 투쟁에 차질이 생겼고, 1975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여야 영수회담 이후에 강경 드라이브를 늦추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당 주류와 비주류 간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정식으로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가 다가오자 김영삼은 자신의 재신임을 통해 단일지도체제를 확고히 하려 했고, 비주류를 등에 업은 이철승은 총재 당선을 대가로 당헌을 개정하여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 터지고 만다. 해당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지만, 이철승이 동원한 조폭이 바로 김태촌. 이 사건으로 조폭이 코앞까지 닥치는 상황에서도 위 말을 남기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폭이 문을 뚫고 총재실로 쳐들어오자 피신하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다리를 다치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의 기개와는 별개로 김영삼은 전당대회장에서 피신해야 했고, 전당대회장은 비주류파가 점거하여 이철승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에 주류파는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치러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킨다. 첨예한 갈등에 분당될 가능성이 생기자, 중재에 따라 다시 총재 선거를 치렀고 결국 최고위원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에게 결국 패배했다.
이후 얼마간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이철승 총재가 중도통합론을 내세우거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신민당은 유신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는 등, 지속적으로 온건 타협 노선을 걸으며 당내 내홍이 발생하고 만다. 그러자 김영삼은 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 내 대여 강경파를 규합하여 강경 노선을 천명, 선명 야당, 유신 정권 타도, 민주 회복 등을 내세웠다. 또한 1979년 3월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저지 투쟁을 주도하였다. 1979년 5월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누르고 다시 신민당 총재에 복귀한다.
총재가 된 후 6월 11일에 통일을 위해선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처음에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6월 18일 북한의 부수상 김일의 명의로 환영 담화가 발표되는가 하면, 조선로동당에서 로동당과 신민당 간 접촉을 위한 예비회담을 제의하면서 정치적 논란이 벌어졌다. 정부 여당에서는 국론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난했으며, 반공 우익 인사들이 신민당사와 김영삼 자택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1979년 8월 9일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목표로 시위 중이던 YH무역의 노동자 172명은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는데, 신민당은 이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빌려주었고, 이들을 돕던 노동 운동가들 역시 신민당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3일 간의 철야농성을 지휘하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신민당사 주변의 경찰들이 당사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러자 박정희와 여권은 YH사건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다.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이나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8월 11일 2,0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이를 막던 신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폭행하고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으며 김영삼은 자택까지 끌려나갔다. 이 와중에 노동자 1명(김경숙)이 사망한다. 자세한 사항은 YH 사건 참조. 이러한 때 조일환 등 신민당 의원 3명은 "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서울지방법원에 총재직 직무정지 신청을 제출하고 9월 8일 법원은 신민당 총재직 가처분 결정을 내린다. 9월 12일 뉴욕 타임즈 도쿄 지국장 헨리 스톡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화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할것이며 대한국 원조 중단까지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것이 9월 16일에 보도되자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서 그에 대한 제명 조치에 착수했다. 10월 4일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무술경위를 동원하여 제명안이 변칙 통과되면서 그는 헌정 사상 최초로 제명된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공화당과 유정회에서는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며 그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을 기반을 둔 국회의원들과 재야 지식인, 학생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곧이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사망했다. 10.26 사건 후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 박정희의 빈소를 찾았다.
2.4. 연이은 정치 규제와 투쟁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가 빼앗지는 못해!
1985년 2월, 전두환 집권 당시 가택연금을 선고 받고 나서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단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고 정치적 활동이 보장되는 시기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재야 인사들은 새로운 군부 집권을 막으려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를 오가며 양자가 손을 잡도록 중재했으나, 일이 쉽게 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김영삼 본인도 일단은 최규하 정부가 내세운 정치일정론에 반대하며 신속한 개헌을 주장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5월 17일 5.17 내란으로 인해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었고 곧 김영삼에게 가택 연금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김대중에게는 사형 선고, 김종필에게는 보안사령부 감금 조치가 취해지는 등 명백한 정치탄압이 이어졌다.
1980년 8월 13일에는 신군부의 강요에 의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신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민우 부총재를 당총재 직무대행으로 지명하면서 아예 정계은퇴까지 선언해버린 것. 당시 김영삼은 "나는 오늘 신민당 총재직을 사퇴함과 아울러 정계에서 은퇴할 것을 국민 앞에 밝힌다."고 말하고, "오늘의 정치상황에 처하여 야당 총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지고 이와 같이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출신구인 부산서구/동구 지구당에 신민당 탈당계를 제출했다. 마치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은 후 전두환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해외로 도피해야 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후로 김영삼은 5공 시기, 정치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당했다. 1981년 연금이 해제되자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를 주축으로 하여 정치규제에 묶인 인사들을 규합할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민주산악회. 그러나 1982년 4월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톡스와 북한산 산행을 하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 시기에 장남인 김은철의 결혼식이 있어, 신군부 측에서 결혼식에 가도 된다고 회유했으나, 전두환에게 도움이 되는 짓은 안 한다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1983년 5월 18일부터 민주화 요구 5개항을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였는데, 이것을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두환 정권의 어떠한 회유도 뿌리치며 23일간 단식 농성을 벌인 결과, 본인의 가택연금 해제를 포함, 일부 억압적 조치의 완화를 받아내었고, 6월 9일에 단식 농성을 중단하였다.
2.5. 무너진 야당을 재건하다
단식 1년 후인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자신의 계파인 상도동계 외에도 김대중계인 동교동계, 양자에 속하지 않는 범야권 세력을 모두 포함시키는 조직이었다. 이런 야권 결집에 힘입어 연말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이듬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1986년 11월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을 전제로 한 불출마 선언을 하자, "자신은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 할 수 있다."라고 예상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해 연말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 개헌도 가능하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놓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제 반대파를 이끌고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 조치를 내놓자, 이를 강력히 규탄하고 5월부터 호헌 조치 철폐 및 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한 전면 투쟁에 나섰다. 한 달 반 가량의 거국적인 투쟁 끝에 5공화국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명의로 6.29 선언을 발표하며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김영삼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승리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2.6. 야당에서 여당으로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 문제로 갈등을 빚은 김영삼과 김대중은 끝내 단일화를 하지 못했다. 결국 13대 대선은 36.64%의 득표율을 기록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김영삼의 득표율은 28.03%였고, 김대중의 득표율은 27.04%였다. 두 사람이 단일화를 이뤘다면 두 사람의 득표율 합인 55%까지는 안 나왔다고 하더라도 노태우를 이겼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당연히 이 대선을 통해 군사 정권이 끝날 거라고 잠깐 기대했던 민주화 세력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겨우 물러나게 만든 전두환 정권이 국민 직선을 통해 연장됐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총선에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의당이 선거 막판에 관권 선거와 금권 선거를 자행하는 자폭을 시전하며(...)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민주정의당이 125석,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 등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고, 김영삼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때때로 공조를 하였으며 이때 여당인 민정당을 견제하면서 대선 때 단일화 실패로 인해 날아갔던 평판을 회복시켰지만, 김대중이 제1야당 평민당의 당수로 야권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는 동시에 김영삼 특유의 좌충우돌적 행동이 서석재의 보궐선거 후보자 매수 사건에서 나타나며 나락으로 떨어지자, 결국 3당 합당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에 이른다.
1989년에만 해도, 정권 중간 평가 국민투표에 나서며 여권을 견제해온 YS였지만, 당시 최측근이었던 김동영 의원은 YS, DJ 두 사람이 87년 단일화 실패 후의 여권 우위 현상을 "꽃놀이패 상황"이라 진단, 노태우의 최측근이었던 박철언 전 의원 및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전 총재가 추진 중인 3당 합당에 동참할 것을 건의했으며, 이에 YS가 최종적으로 합당 동참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3당 합당은 단순히 여소야대 국면이 바뀌는 것 이상으로 향후 대권 향방까지 좌우할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여론으로 전해지는 파장은 매우 컸다. 당장 YS가 직접 발탁하고 지도를 아끼지아니하였던 김광일 전 의원이나 1980년대 중반 YS와 국내 민주화 투쟁을 함께한 김상현 전 의원이 합당에 반발해 당을 이탈했으며, 노태우 정부에서 공을 들인 북방정책이 1990년부터 본격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실상 2년 뒤에 치러질 대선과 관련된 여권으로서의 행보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민주화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난도 있었기 때문에 기존 야당 지지층들로부터 욕을 왕창 먹기도 했지만, 선거 전략가 김동영 전 의원과 허주 김윤환이 냉철하게 판을 짠 민주자유당에서의 대선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13대 대선 때만 해도, 영남의 표심은 부울경(YS 지지)과 TK(노태우 지지)로 나뉘었지만, 3당 합당 후에는 1200만이 사는 거대 권역인 영남이 민자당을 시작으로 보수 세력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어줬고, JP가 중심이 된 충청권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지역주의 대결에서 이렇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YS는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에 이어 1992년 14대 대선에서 다시 DJ와 맞붙게 됐으며 정주영이라는 다크호스도 참전함에 따라 3강 구도 하에 14대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다만, 14대 총선 과정에서 계파 갈등과 당시 정부 여당에 대한 불만으로 민자당이 과반수(150석)에 1석 미달한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기록한 탓에 당시 총선을 총지휘했던 YS는 대권 주자로써의 입지에 커다란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노태우의 뒤를 이을 마땅한 대선 주자가 없었던 민정계를 압박하여 민자당의 새로운 대권 주자로 최종 선출되었다. 이렇게 곡절 끝에 다시 청와대로 가는 길에 올랐지만, 역시 정점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막상 선거 기간 중에 부동층이 크게 늘어나며 김대중과의 지지율 차이가 크게 좁혀져서 위기감에 처했으며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이 초원복집 사건을 폭로하는 대형 악재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과 검찰은 "정부가 앞장서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려고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도청을 한 게 문제다"라는 논리로 사건을 풀어나갔고, 게다가 영남의 지역감정 정서에 불을 지르는 역효과를 불러 왔다.
그리고 非YS라는 지지 기반이 겹쳤던 김대중 후보(804만 표)와 정주영 후보(388만 표)의 표가 나뉨에 따라, 김대중은 호남에서 압승하고 서울특별시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41.96%(997만 표)의 득표율을 기록해 33.82%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대중, 16.31%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주영 등을 모두 제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됐다. 박정희 정부 이후 처음으로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직선제를 거쳐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순간이었다.
2.7.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시절
김영삼 정부 5년은 실로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취임 초기 문민정부라고 명명하며 시작하려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하나회는 군 인사를 자신들 임의대로 결정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내미는 등 문민정부를 길들이려 했지만 상대를 단단히 잘못 고른 셈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하나회를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일주일 만에 대장, 중장, 소장 상관없이 군 파벌의 핵심 하나회 소속 별을 40개 넘게 떨어뜨리며 본격적으로 숙군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회 소속 군 장성 입에서 "군을 너무 홀대한다.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가?"라는 발언까지 나올 만큼 반발이 심했지만 김영삼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반박으로 응수하며 하나회 정리 작업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후임인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무렵에는 영관급 장교 몇 사람만 남아 대부분 장성 진급 없이 전역했을 만큼 하나회 파벌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다.
동년(1993년) 8월에는 사전 예고 없이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는데, 비록 발표 다음날에는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지만, 불법 자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발표 취지에 국민들이 공감하면서 주가는 사흘 만에 다시 안정 수준을 회복했으며, 이듬해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공식 지지율이 80%를 넘나들 만큼 문민정부는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혁 추진의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김영삼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YS는 못말려라는, 김영삼을 호의적으로 풍자한 유머모음집이 출간 한 달도 안 되어 30만 부가 팔렸고 YS는 못말려의 아류 유머모음집도 속속 출간되었으며, 10대들 사이에서도 최진실이나 허재 같은 당대 유명 연예인과 체육선수를 제치고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선정되었다거나 여대생 사이에서도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 1위로 선정되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14대 대선 때는 김영삼에게 평균 4%대의 표밖에 주지 않았던 호남에서도 김영삼에 대한 지지율이 20배 가까이 치솟음으로써, 지난 22년 동안 우리나라 발전을 좀먹은 영호남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국민 화합을 이룰 최초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사(慶事)가 계속된 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보통 1~2번 있는 대형사고가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정권 출범 한 달 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필두로 100명 전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1993년 ~ 1995년 사이에 무려 6건이 발생했으며, 부모를 살해한 사건, 부유층 대상 잔혹 범죄사건(하단 주석의 박한상, 지존파 참조)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서울 당산철교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계기로 실행된 전격적 서울 한강교량 안전점검에서 부실공사 실태를 발각당한 것도 김영삼 정부 임기중이었던 1994년이었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도 1994년 발생했으며, 경인 축 교통수송시스템의 수용능력 초과 패닉, 남총련 서울 영등포역 점거시위사건, 그리고 부천-인천 세금포탈사건 등 한 해 대형사고들이 연달아 발생함에 따라,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고의 면면을 보면,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폭발 사고처럼 안전 문제에 소홀한 무리한 일 추진에서 비롯된 사고가 있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제3공화국 ~ 제5공화국 시절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 인재(人災)도 있었다. 즉, 급속한 경제 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그 시점에 터지기 시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런 각종 사고들 +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그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던 것.
1994년, 우리나라 쌀시장 개방 여부에 관심이 모였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는, 생존 위기에 직면한 농민들이 죽음을 각오한 강경 투쟁 의지를 미국 협상단에게까지 전달하는 데 성공하며 다른 나라보다 몇 년간 개방 시기가 유예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교역증대를 위한 국제화의 대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입장만 고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쌀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여파로 1995년 들어서는 지지율이 다소 하락하였다. 사실 갤럽의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조사를 살펴보면 다소 하락이 아니다. 1993년 4분기부터 하락하기 시작해서 1994년 4분기부터 1995년 4분기까지는 30%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며, 특히 1995년 2분기, 3분기는 28%, 29%였다. 이때문에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되었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은 대참패를 하고 만다.
그렇지만, 일부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으며, 1995년에는 마침내 호남인들의 숙원 중 하나였던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착수하는 등 개혁 추진 의지가 변치 않았고, 경제 분야에서도 1996년 말까지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일 만큼 기업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9% ~ 9.6%라는 호조를 보였으며, 동년 말에는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듬해인 1996년 10월 11일,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할 만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김영삼 정부 당시 경제지표. 더군다나 노태우 정부를 괴롭혔던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의 상승도 노태우 임기 말부터는 부동산 규제가 먹히고 신도시 분양이 진전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고, 김영삼 정부도 금융실명제의 도입과 부동산 거래실명제도의 도입으로 노태우 정부때의 부동산 정책기조를 이어나갔기에 소득이 증가하면 바로 소비와 저축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기에 내수시장은 활황을 보였다. 이런 문민정부의 모습을 지지하는 여론이 여전했기 때문에, 이대로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구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고 퇴임이 되고 나서부터는 위인전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 같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12월 26일 새벽,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관계법 개정안과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조항을 부활시킨 안기부법 개정안이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155명의 표결만으로 7분 만에 날치기 통과된 후부터 여론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및 안기부의 수사권 강화와 관련하여 대다수가 노동자였던 국민들과 민주계 인사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97년초 부도가 난 한보그룹의 후속 조치과정에서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관련 법정 증인인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97년 4월 목을 매 자살하고, 동년 5월에는 차남 김현철이 뇌물 의혹으로 구속되는 악재까지 겹치게 되었다.
악재가 겹치는 와중에도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차기 신한국당 대선 후보는 언제 어떻게 선출하나?"는 기자의 질문에 "적절한 때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총재의 입장에서 분명한 내 생각을 당원과 국민에게 전달하겠다."고 답하고, 당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수성 국무총리를 당으로 보내지 않고 행정부 안에 붙들어 둠으로써, 여권의 잠재적인 대권 주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로 삼으며, 노련한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96년 4분기부터 28%, 14%, 심지어는 7%를 찍어내며 하염없이 추락하고만 있었고, 김현철 사건 이후로는 식물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한 확장 후유증을 앓던 대기업들이 매월 잇달아 도산하고, 원화 가치가 달러당 1,900원으로 폭락하는 가운데 식물 정권 상태이다 보니 별다른 대책을 내지도, 대책의 약발도 보지 못한 채, 결국 달러 부족으로 11월 21일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임기 말 긍정 평가가 6%까지 추락하게 된다. 이 7%라는 지지율은 먼 훗날 어떤 역대급 정치 스캔들을 터뜨리는 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1997년 11월 8일, 당시 임기 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 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김영삼 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하지만 직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혼란 수습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 국민신당의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
2.8. 퇴임 후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ㅡ 퇴임사 中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웠다.
ㅡ 조선일보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통절한 개혁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가, 막판 1997년 외환 위기에 대한 대실책으로 퇴임할 때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 YS의 지지율 격차 기록은 아직도 한국에서 전무할 정도이다. 그 후에도 각종 측근들의 비리 등으로 초반의 영예가 무색해질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퇴임의 쓴맛을 봐야 했다. 퇴임 2년 뒤에는 한 시민으로부터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원로 정치인으로서 왕성하게 대외활동을 하는 등 매우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2년 4월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본 명문대 와세다대학에서 특명교수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예 고향으로 낙향해 공개적으로 방문객을 맞으며 활동했던 노무현을 제외하면, 2010년대까지 생존해있던 전직 대통령들 중 언론 노출도와 대외활동이 가장 왕성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으며,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 보수 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새해나 선거 시즌만 되면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는데, 전직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한 최초의 사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을 지지했다. 이후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당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개적으로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았으나 박근혜의 당선을 축하했다. 당시 김영삼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인지 여부를 두고 현재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2008년 9월 부친상을 당했다.
타고난 강골에 철저한 건강관리로 퇴임 후에도 오랫동안 건강을 과시해 오던 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지, 80세를 넘어간 이후부터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2009년 뇌졸중 판정을 받고 치료에 들어갔다. 판정을 받았을 당시만 해도 그리 심각한 뇌졸중(중풍) 수준은 아니었던지라, 2011년~2012년까지는 꾸준히 대외활동을 하며 언론에 모습을 비췄다. 그러나 2013년부터 뇌졸중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뇌졸중과 폐렴 증상으로 자주 쓰러졌고 2014년 가을까지 1년 6개월동안 장기입원을 했다.
3. 사망
2015년 11월 19일 정오경 갑작스런 고열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32초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향년 87세.
세상을 떠나기 전에 차남 김현철 씨에게 통합과 화합이라는 말을 필담으로 써 냈고,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이 필담을 받아든 김현철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 전 대통령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 아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타계 당일 확정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서 4번째로 안장하게 되는 것으로, 생전 여러가지로 얽힌 이들과 함께 이 곳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동작구 상도동 근처에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근처에 있는 고구동산은 생전에 고인이 운동을 나갔을 때 상도동 및 흑석동 주민들과 함께 하였던 흔적이 있기도 한 곳이다. 고인은 회고록 말미에도 고구동산에 올라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현충원 안장은 11월 26일 국가장이 거행된 이후 시행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은 국장과 국민장이 국가장으로 통합된 후 처음 치러진 국가장이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제3장군묘역 우측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독 묘역이다. 장남 김은철은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작은아들인 김현철이 상주 노릇을 했다. 국회에서 엄수된 장례식에는 김은철도 아픈 몸을 이끌고 참여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답게, 대통령 이름을 본뜬 브랜드의 장의차에 운구되어 국회, 상도동 사저를 돈 후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