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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울 청계천. 19세기말, 20세기초.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핫플레이스였고 불륜으로 아이를 낳게 되면 청계천에 유기하기도 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고전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일상은 우리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조선은 유교를 표방했지만 불교 유풍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은채 이어졌고 성적으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불교가 융성했고 남녀간 성적으로 거침이 없었던 고려의 풍습이 조선 초에도 지속됐던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어린 조카를 죽인 조선 제7대왕 세조(재위 1455~1468·1417~1468)의 경우 말년에 속죄하기 위해 오히려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다음은 연산군때 대제학을 지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 내용이다.
"세조 때 그 폐단이 극에 달해 승려들이 마을에 섞여 살면서 음탕하고 난폭한 짓을 해도 조정의 관리와 수령들이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 (중략) …
도성 안에는 비구니절이 10여 채로 늘었는데 비단을 깔고 단청으로 꾸미는 (호사스러운) 절집도 있었다. 어린 비구니 중에서 아이를 낳는 일도 일어났다."
조선전기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의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여성의 인구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았다고 고전은 전한다. 여성들은 집에서 살림만 했을 것 같지만 밖에서 남자가 하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했다.
명종·중종대 서얼출신 학자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의하면, 남자는 보통 첩을 두세 명씩 거느렸다. 재혼이 흠이 되지 않는 낮은 신분의 여자라도 남자가 부족해 홀로 과부로 늙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관청이나 일반 민가에서 각종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도 모두 여자로 채워졌다. 길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죄다 여자였다. 중국 사신이 이런 모습을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고 <패관잡기>는 전한다.
심지어 <패관잡기>는 조선 조정이 통역관으로 여성을 내세워 중국 측에서 불만을 제기할 정도였다고 소개하고 있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다음은 <패관잡기>의 내용이다.
"중국 사신 공운강은 조선이 자신들의 풍속을 따라 여자 통역관으로 응대하는 것은 예의를 따르지 않는 일이라며 조선 임금에게 여자 통역관을 남자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패관잡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행이 고쳐지지 않았다면서 "음양오행에서 동방의 숫자는 하늘이 3인 반면 땅은 8이다. 하늘은 곧 남자이고 땅은 여자이다. 남자는 3이고 여자는 8이므로 조선에서는 여자가 더 많은 것"이라고 엉뚱하게 풀이했다.
여성이 많아서 인지 여자 치과의사도 존재했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은 <청파극담>에서 여자 치과의사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벌레가 이를 갉아 먹어서 충치가 생긴다고 여겼다. 충치의 '충(蟲)'이 바로 벌레다.
"내(이륙)가 젊었을 때 제주도에 사는 가 씨라는 사람을 본 일이 있다. 사대부 집에 드나 들면서 치충을 잘 잡아냈다. 그 후 같은 제주도 출신의 계집종 장덕이가 가 씨에게서 술법을 배웠다. … (중략) …
대낮에 침으로 핏줄을 찔러 벌레를 잡아냈고 병도 조금씩 나았다. 일찍이 대궐에 들어가 이를 치료했는데 효험이 있었다. 이에 장덕이를 혜민서 여의로 삼고 나이 어린 여의 몇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배우게 했으나 끝내 전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장덕이 집에서 심부름하던 옥매라는 아이가 그 기술을 모두 배워 장덕이 죽은 후에 다시 혜민서에 속하게 되었다."
사진2. 함북 경성 여자들. 20세기초.
`남남북녀`는 원래 함경도 북쪽은 여자가 이쁘고 함경도 남쪽은 남자가 잘생겼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특정 지역이 미남미녀가 많을 수는 없다. 필시 노동력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함북 여성들이 부지런해 이쁨을 받으니 미인들이 많다고 했을 것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남남북녀'라는 말은 주로 '북쪽 지방(북한)은 여자들이 예쁘고 남쪽 지방(남한)은 남자들의 인물이 좋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이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남북'은 함경도 내에서 남쪽과 북쪽지역을 지칭한다.
함경도 북쪽 지방 여자들은 체구가 크고 살갗이 밝았다. 그녀들은 일도 잘해 일 년에 베를 두 단이나 짰다. 이렇게 짠 베로 시집갈 때에는 치마를 네다섯 벌이나 갖추고 가마에까지 면포를 덮어 씌웠다. 일손 하나하나가 절실했던 시절이니 노동생산성 높은 그녀들은 사랑을 독차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3. 혼례식. 19세기말, 20세기초.
신부는 신랑이 마음에 안드는지 눈을 감은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국가는 백성들이 결혼적령기를 놓칠까 무척 신경을 썼다. 사진 미국 헌팅턴도서관.
남자와 여자는 때가 되면 가정을 이뤄야 하는 것은 순리이다. 특히 인구늘리는게 급선무였던 조선시대에는 적령기를 놓치지 않고 혼인을 해야만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를 보면 나라에서 혼수품까지 지급하면서 혼인을 독려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성들이 결혼을 제때 하는지에 대한 조사도 매월 했다. <목민심서>의 한 대목이다.
"정조 15년(1791)에 백성들이 가난하여 혼인의 때를 놓치는 것을 딱히 여기고 혼기가 지난 자가 혼인을 하면 관청에서 혼례비로 돈 500냥, 베 2필을 주게 했으며 매월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중략)…
남자 25세, 여자 20세 이상의 자를 골라서 이웃의 유력한 자를 시켜 중매하게 하고 관에서 약간의 돈과 포목을 주어 돕는다. 홀아비와 과부를 중매하여 짝지어 주는 것도 또한 선정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에 불륜도 없을 수 없다. 조선시대 불륜으로 아이가 덜컥 생겼다면 어떻게 했을까.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원치 않는 아이를 낳으면 청계천 같은 곳에 유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목민심서>의 한 부분이다.
"임몽득이 평창에 있을 때 버려진 아이를 기른 자에게 상을 주고 상평창의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로 인해 구제받은 아이가 3800명이나 되었다. … (중략) …
한양의 작은 개천에는 간혹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간음으로 인해서 낳은 아이가 많다. 백성이 거두어 기르게 하고 아들이나 딸을 삼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오늘날 청계천은 우리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도 즐겨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서울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청계천은 조선시대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핫플레이스였던 모양이다. 조선말 궁중에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 지규식의 <하재일기>의 한 부분이다.
"정권과 함께 옷을 걸쳐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서 수표교(청계2가와 청계3가 사이 다리)에 이르러 야경을 구경하였다. 돌아오다가 청계천시장 앞에 이르니 달빛과 등불빛이 서로 어우러져 비치는 속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귀가 따갑도록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장안의 청춘 남녀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대는데 구경할 것이 못 되었다. 그래서 즉시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삼경(밤 11~오전 1시)쯤 되었다." 밤이 야심하도록 지켜봐 놓고는 "구경할 것이 못 되었다"고 불평하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6.한양 청계천에 버려진 아이들, 불륜의 씨앗 [낯선조선1] / 매일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