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해 알게 된 것들
1. ‘한글날’은 한동안 국경일 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최근 다시 포함되었다. 세계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류의 지적 유산이라고 인정받은 ‘한글’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여론에 의해 복귀된 것이다. 한글은 세계의 문자 중에서도 유일하게 창제한 사람들과 창제한 원리를 문서로 남긴 문자이다. 한글은 발음기관과 발음방법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다. 한글을 배우기 쉬운가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지는 듯하다. 한글은 세상의 어떤 소리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소리를 내는 방식을 표준화할 수 있어 누구도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문자이기도 하며 쉽게 배울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럼에도 정확한 맞춤법은 한국인들 또한 어렵다. 특히 한글의 곁받침과 어간과 어미의 활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2. 현재의 한글 표기법은 근대 한국유산의 창조적 계승과 독립 운동의 열망 속에서 완성되었다. 사실 한글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결코 존중받지 못한 글자였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한글을 홀대했으며 공식적인 문서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한글은 ‘언문’이나 ‘암클’이라고 불리며 하급문자로 취급된 것이다. 한글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조선시대 말 ‘독립국가’을 이루려는 국가적 개혁 프로그램 시행 속에서 이루어졌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비로소 ‘국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공식문서의 글자로 공인되었다. 한글에 대한 오랜 무관심은 한글 표기에 대한 다양한 혼란을 가져왔다. 사람들마다, 때론 같은 사람에서도 표기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었고 지역마다 수많은 표현법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3. 한글이 현재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의 노력이 크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우리글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입하였다. ‘조선어학회’을 만들어 천대받던 우리글의 이름을 ‘한글’이라고 명칭하였고 다양한 한글의 기본적 규칙을 제정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현재의 ‘한글’이 표준화된 것은 근대의 선각자들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 험난한 작업이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에 의해 ‘맞춤법통일안’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는 중요한 논쟁과 치열한 학문적 다툼이 있었다. 주시경의 제자인 최현배가 주도한 ‘조선어학회’ (학술지 <한글> 발행)뿐 아니라 당시에는 박승빈이 이끌었던 ‘조선어학연구회’(학술지 <정음> 발행)라는 또 다른 한글 연구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기 전 두 단체는 공청회를 통해 한글 표기법에 관한 뜨거운 논쟁에 참여하였다.
4. 1932년 동아일보의 주관으로 열린 공청회에서 두 단체는 3일에 걸쳐 표기법에 관한 세 가지 중요 문제를 논의하였다. 첫째는 경음을 표기하는 쌍서에 관한 문제로 한글파는 ‘ᄁ, ᄄ’와 같은 각자병서 사용을 주장한 반면, 정음파는 ‘ㅅ병서(ㅺ, ㅻ)’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는 한글파가 실용적인 입장에 있다면 정음파는 전통을 계승하려는 입장이었다. 둘째는 겹받침 문제로 한글파가 ‘형태’를 중시한 겹받침(ㅄ, ㄶ, ㄺ) 사용을 주장한 데 비해 정음파는 발음과 음성을 중시하며 소리나는대로 적을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어미활용 문제로 한글파는 어간과 어미의 구분을 중시하였지만 정음파는 여기에서도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결국 ‘한글파’의 승리로 돌아가 현재의 한글 표기법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
5. 당시 한글파를 이끌었던 최현배의 공청회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한글파의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파악하게 해준다. “문자는 결코 소리만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의 덩어리라는 것에 크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문자라는 것은 말을 적는 것이오. 말이란 것은 사상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치열했던 학문적 논쟁은 우리글의 표준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기준에 의해 형성되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또한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과거 학생시절 <고전> 시간의 표기법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 해결시켜주었다. 우리 문자는 기본적으로 알파벳과 같은 ‘음소문자’이며, 음절문자인 중국의 ‘한자’와는 다른 성격임에도 표기의 효율성을 위해 음절 형태로 표기되었지만, 음소문자인 성격에 의해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6. 주시경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인 한글파는 한글표기에서 또 다른 혁신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모아쓰기’ 방식을 ‘풀어쓰기’방식으로 전환하려는 도전이었다. 한글의 표기를 현재와 같은 초, 중, 종성을 모아쓰는 형태가 아니라 각각의 음소를 풀어쓰는 알파벳과 같은 표기법을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풀어쓰기’에 대한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①모아쓴 글자에 비해 읽기와 쓰기가 쉽다 ②기계화가 용이하다 ③단어를 한덩이로 표기하게 되면서 철자법이 간편해진다 ④한자폐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풀어쓰기에 관한 실험은 남쪽에서는 최현배에 의해, 북쪽에서는 김두봉에 의해 시도되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7.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굳어진 관행이었다. 한글은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모아쓰기’를 기본 표기법으로 채택하였다. 비록 알파벳처럼 자음과 모음을 독자적으로 만들었지만 이들의 음소를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표기법이 발음과 표기의 어려움과 표기의 혼란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지만, 언어와 글자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관습적 행동 속에 각인되어 온 일종의 문화DNA와 같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한글 자판기의 문자배열을 과학적 방식에 의해 바꾸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컴퓨터의 발전으로 철자법의 기계화 문제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우리나라의 최고 한글학자들이 ‘풀어쓰기’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풀어쓰기는 책을 ‘묵독’하는 데에는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글자는 소리뿐 아니라 한 눈에 파악되는 시각적 이미지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8. 요즘도 글을 쓸 때 맞춤법이 맞는가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만큼 맞춤법이 어렵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왜 현재와 같은 맞춤법이 표준으로 채택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되니 맞춤법이 가져다 준 문제를 사랑할 수 있을 것같다. 오랫동안 혼란스럽게 방치되어왔던 우리의 문자를 체계화시키려했던 국어학자들의 혼신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하나의 문자가 인간의 치열한 문화적 투쟁 속에서 발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더나은 우리말의 활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 문자가 절대적 고정이 아니며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적 편의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지라도 한글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힘든 투쟁을 생각한다면 좀더 우리말과 글의 정확한 사용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결국 나를 표현하는 것 또한 ‘한글’이기 때문이다.
<참고 도서>
첫댓글 "결국 나를 표현하는 것 또한 ‘한글’이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 때의 한글 창조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혁명이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고유의 민족문화를 자랑할 수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빛나는 한글 창제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긍심이 될 것이다. 언어의 종속은 사고의 종속이요, 문화의 종속이요, 삶의 종속이 되고 만다. 한글은 가장 가까이 있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한글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면 제대로된 우리 민족의 문화를 꿈꿀 수 없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혼이요, 얼이며, 가장 큰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