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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강해
최인기 (서울장신대학교 교수 / 구약학)
서 언
아마 구약성서를 읽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편 1편 또는 시편 23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두 개의 시편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많이 읽히면서도 가장 많은 감동을 우리에게 주어왔던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구약 본문이 그렇듯이 이 두 개의 시편의 해석도 히브리어 원어적으로 그렇게 많이 해설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에 미치지 못하는 해석에만 그쳐온 느낌이 짙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이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귀중한 두 개의 시편의 의미가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전달되어 온 실정 속에 있지 않았나 보여진다.
본 소고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 두 개의 시편 중에서 우선 시편 1편을 히브리어 원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 메시지를 들어보고자 한다.
히브리어 본문의 사역(私譯)
1절 복 있구나! 그 사람은
사악한 자들의 충고에 따라 걷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가담하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모임에 앉지 아니하며
2절 즉, 야훼의 교훈 안에 그의 즐거움이 있으므로
그 분의 교훈을 가지고 밤낮으로 신음하는 (그 사람은)
3절 그는 그의 계절에 그의 열매를 내고
그의 잎이 시들지 아니 하는
물이 흐르는 수로(水路)들 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번성하리로다
4절 그 사악한 자들은 그렇지 않다
한갓 바람이 심하게 날려버리는 겨와 같다
5절 그러므로 사악한 자들이 그 심판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 서지 못한다
6절 왜냐하면 진실로 야훼께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사악한 자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 1편 히브리어 원어 해설
1절 복 있구나! 그 사람은
사악한 자들의 충고에 따라 걷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가담하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모임에 앉지 아니하며
히브리어 원어로 시편 1편을 볼 때 우선 한글 개역성경과 다른 점은 히브리어 시편 1편이 처음부터 감탄하는 분위기 또는 선포적인 분위기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히브리어로 는 '복 있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선포하는 상황을 표현한다. 즉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복이 있는가!'라고 감격하면서 선포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글 개역성경(이하 개역성경)이 '복 있는 자'에 대해 서술하거나 차분하게 설명하는 분위기로 이해하게 해주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개역성경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처럼 서술적이며 묘사적인 분위기로 번역됨으로써 히브리어 원어가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열정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시편 1편을 히브리어 원어로 읽게 되면 매우 감탄조의 감정적이라는 점에서 이 시편의 기자가 얼마나 '복 있는 사람'에 대해 감정적인 격정을 가지고 확신 속에서 외치며 선포하고 있는가를 뜨겁게 느끼게 한다. 이것이 히브리어 원어로 읽게 될 때 우선 크게 다르게 느끼게 되는 점이다.
1절에서는 세 가지 부정적인 것의 관점에서 외치고 있다. 여기서 '사악한 자들', '죄인들', '조롱하는 자들'은 모두 윤리적인 관점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와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그릇되게 나타나는 자들이다. 이들은 야훼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더 적극적으로 야훼에 대적하는 자들이다. 개역성경은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번역함으로써 모두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나 히브리어 원어로는 복수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어는 '사악한 자들', '죄인들', '조롱하는 자들'로 번역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복수로 되어 있다는 것은 본문 해석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개역성경이 이들을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추상적인 의미 또는 집합명사로서 정적인 상황을 느끼게 하거나 한 사람의 행위로 오해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어 본문은 이들을 복수로 표현함으로써 그 사악한 자들, 죄인들, 조롱하는 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서 꾀를 짜내거나, 열심히 인간적인 노력들을 짜 모으거나 추구하고, 나아가서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야훼께 역모를 꾸미고 있는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집단행동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여기서 복수로 표현된 '그들'은 우글우글하면서도 시끌시끌하고 번잡하며, 사악한 꾀와 그릇된 길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어둡고 추잡한 회집이다. 이 사악한 자들로 대표되는 자들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매우 능동적으로 그들의 뜻을 모으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개역성경에서 '꾀'라고 번역된 것은 히브리어로 인데 '충고' 또는 '평의회'로 번역될 수 있다. 오히려 '꾀'보다는 '충고'가 나을 것이다. 또한 '길'은 으로서 '넓고 큰 길'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죄인들의 통치(dominion)'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인다. 또한 개역성경에서 '자리'로 번역된 것은 히브리어로 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절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회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회집에서 이들은 사특한 꾀를 내어서 그들의 통치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회집은 야훼께 대한 반항과 역모로 끝나게 된다. 복수로 표현된 이들의 특징은 이처럼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며 행동적이며 시끄럽고 심지어 오만한 열심까지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없는 회의에 바쁜 사악함에 물들어 있으며 우상과 친한 죄인들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반역을 꾀하는 모임에 능숙한 자들이다. 잠깐만이라도 야훼 앞에서 그들의 생명이 누구의 것인가를 알고 침묵하는 시간이라도 그들에게 있었더라면… 그들의 그 분주한 회의 자리와 그토록 적극적인 통치 자리에 하나님이 복되신 분으로 계실 한 움큼의 자리만이라도 있었다면…
반면에 '복 있는 그 사람'은 여기서 단수로 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한 개인과 그 무리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복 있는 한 개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열심으로 인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 무리들 속에 끼지 않는다고 격정적으로 외치며 선포하고 있다. 이 시끄럽고 사악한 무리들과 대조를 이루는 복 있는 자의 성품에 대해서 2절이 말씀하고 있다.
2절 즉, 야훼의 교훈 안에 그의 즐거움이 있으므로
그 분의 교훈을 가지고 밤낮으로 신음하는 (그 사람은)
2절에서 우리가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복 있는 그 사람'은 앞의 부정적인 세 부류의 사람들과는 달리 소극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아니며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행동을 그의 첫 번째 특징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특징은 내면에 있으며 영성에 감추어져 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야훼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즐거움이 그의 영성을 깨우고 있는가! 외형적인 헛된 행동보다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이 그를 힘차게 이끌고 간다. 대단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개역성경에서 히브리어 를 '율법'이라고 일반적으로 번역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는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 에서 온 것으로 '교훈'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애굽기 12장 49절, 24장 12절, 신명기 4장 8절에서 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율법 또는 율법집을 의미하지만 이 곳들에서도 본질적으로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시편 1편에서 는 복음과 율법으로 대비되는 바울의 신학에서와 같은 '율법' 또는 법적인 개념에서의 '율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시편 1편은 시편 19편 그리고 119편과 함께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편 1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렇다면 시편 1편은 시편 전체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읽히기를 바랐다. 시편서는 충실한 신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개역성경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라고 번역했으나 히브리어 원어에서 의 역할은 영어로 말하자면 'not but'의 'but'에 해당하는 것이다. 1절에서 '하지 않고'를 세 번 반복했었는데, 그 다음에 2절에서 '하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영어의 but에 해당하는 '다만' 정도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개역성경에서는 '오직'이라고 번역되어서 '다른 것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만을'이라는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only the law of Yahweh'같이 여호와의 율법에만 제한하려는 것 같은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어로 직역하면 '야훼의 교훈 안에 그의 즐거움이 있으므로'라고 번역된다. 개역성경과 의미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를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처럼 현학적, 독선적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주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인해 그의 즐거움이 다른 곳에서는 없고 자연히 야훼의 선하신 음성인 그 분의 교훈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밤낮으로 그 교훈을 야훼의 선하신 음성으로 듣고 되뇐다. 개역성경 2절 후반절의 '묵상한다'고 번역된 것도 히브리어 에 대해서 너무 정적(靜的)인 느낌을 느끼게 하는 번역이다. 그 본래?? 뜻은 '신음하다, 부르짖다, 웅얼거리다'는 뜻이다. 사악한 자들과 대조되는 '복 있는 그 사람'은 내면의 즐거움으로부터 그의 인생이 시작되며 언제나 밤낮 야훼의 교훈을 가까이 두고 그것을 가지고 내면의 영성으로 신음하기도 하며 부르짖기도 하며 항상 웅얼거리며 그의 삶을 선하신 야훼 앞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본질에 있어서 야훼의 생명과 복으로 가득 차 있다. 신명기의 축복도 떡 반죽 그릇까지 복을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훈의 말씀을 평생 옆에 두고 읽으며 그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야훼 하나님 그 분 자신을 마음에 생명의 말씀으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신명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복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을 때에도 주님의 교훈을 가지고 밤낮으로 신음하라고 하셨다(수 1:8).
3절 그는 그의 계절에 그의 열매를 내고
그의 잎이 시들지 아니 하는
물이 흐르는 수로(水路)들 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번성하리로다
그 복 있는 사람의 기초는 야훼로 인해 그리고 야훼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인해 든든하다. 그래서 그는 나무가 그것의 철을 따라 가장 적당하고 아름답게 그 나무가 맺어야 할 열매를 맺고 그의 잎이 시들지 않아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1절이 시끄럽고 어두컴컴하고 불안에 들떠서 분주한 분위기를 읽게 한다면, 3절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 처럼 조용하고 밝고 초록빛으로 아름다우며 안정되어 있으며 생명이 풍성한 것을 느끼게 한다.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그의 계절, 그의 열매, 그의 잎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야훼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가장 적절하며 완전한 지고(至高)의 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심겨진'이라는 단어이다. '심다, 옮겨 심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의 수동분사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다. 이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심겨진 또는 옮겨 심겨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그 나무가 가장 적절한 곳에 심겨졌으며 그래서 이 나무는 능동적이 아니며 피동적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1절의 사악한 자들과 대조되는 '복 있는 그 사람'의 피동적인 특징을 암시하고 있다. 즉 우리는 복을 창조할 수 없으며 언제나 복의 근원이 되시는 생명의 야훼에 의해 심겨진 나무 같아서 야훼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피동적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성의 출발이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 삶의 안전이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시고 베푸시는 삶의 풍성함이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그려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으며 한없이 미약해서 피동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심겨진 나무처럼 생명의 하나님께 든든히 뿌리 박아 있는 야훼와의 끊을 수 없는 즐거움의 관계 속에 들어 있다. 개역성경에서 '시냇가'로 번역된 것을 직역하면 '물의 수로들 가에'가 된다. 시내는 특히 인공적으로 파놓은 운하나 수로에 해당하며 복수로 되어있다. 더구나 히브리어로 '마임'인 '물'이 쓰여있다. 물이 없는 수로들이 아니라 물이 흐르는 수로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수로들도 복수로 쓰였다는 점에서 물이 사시사철 철철 흘러 넘치는 수로들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야훼의 생명과 축복이 넘쳐남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오직 야훼께 중심이 바쳐진 사람은 야훼에 의해서 생명과 축복이 넘쳐나는 자리에 심겨져서 열매가 철 따라 맺히며 잎이 풍성해지는 나무처럼 번성한다. 마치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그 곳에 새가 깃들이는 것과 같은 믿음에 의한 생명의 번성이다. 시편 1편의 기자는 의인들의 삶이 언제나 잘되는 '실제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천진난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복의 성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 나무가 심긴 기초가 든든한데 그 기초란 '야훼의 교훈'을 즐거워하므로 그것을 가지고 신음하며 부르짖으며 웅얼거리면서 끊임없이 그 분의 교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런 영성과 자세를 취함으로써 혼란 상태에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목적과 든든함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대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요 14:27) 평안이 그 의인의 삶의 기초이며 여기에서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은 영육 간에 가장 알맞고 합당한 분량으로 자라난다.
4절 그 사악한 자들은 그렇지 않다
한갓 바람이 심하게 날려버리는 겨와 같다
4절에서 사악한 자들에 관한 심판의 어두움과 심각성이 대두된다. 그들은 1절에서 표현되었던 것처럼 고삐 풀린 종들이 그들의 방종에 따라 마구 미친듯이 날뛰는 것만큼 그들은 야훼의 심판의 때에도 추수 때 키질하는 농부의 손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일순간에 알곡들의 무리에서 날아간다. 4절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인데 매우 강조되어 있는 어구이다. '그 사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말도 말아라'는 어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의인이 야훼의 복을 받는 것과는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이며 그들이 야훼를 그들의 마음과 삶에서 밀어낸 그 만큼 야훼의 복을 받는 자리에 도무지 끼일 틈이 없으며 의인과 함께 할 분깃이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야훼의 복을 받는 것과 심판을 받는 것 사이에 어정쩡한 중간 입장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지고의 복이냐 아니면 사악한 자들 틈에서 영원히 야훼를 떠나 바람에 날아가느냐 둘 중에 하나이다.
4절 후반절에서도 겨가 주체가 아니라 바람이 주체로 되어 있다. 원어적으로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바람이 날려버리는 겨'로 되어 있다. 그것도 동사에 목적격 접미사가 달려있는 형태인 에서 겨에 해당하는 목적격 접미사가 3인칭 남성단수에 대한 강조적인 형태로서 에 이중점이 찍혀있어서 '바로 그 겨를 (진실로)' 날려버린다는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 겨도 히브리어로 인데 3절의 나무에 해당하는 와 발음상 비슷한 단어를 써서 병행을 이루는데 이를 통해 그 둘 사이의 운명의 대조성을 대비하려하고 있다. 이런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서 그 심판의 심각성과 확실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말 어감으로는 '바람이 휙 날려버리는 겨'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을 받는 중심에 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변두리에서조차 밀려나서 생명과 죽음을 날카롭게 갈라버리는 바람에 의해서 설자리가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추수 때의 폐기물 생명 없는 불쌍한 쭉정이 겨로 날려질 뿐이다.
5절 그러므로 사악한 자들이 그 심판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 서지 못한다
그 분주했던 사악한 자들도 하나님의 어전(council)에 서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생명 없음 때문에 곧 그 자리에 서지 못하고 날려 간다. 그렇게 됨으로써 의인들의 회중에도 서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서지 못할뿐더러 심판 자리에 마저 설 틈도 없이 쫓겨난다.
6절 왜냐하면 진실로 야훼께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사악한 자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5절에서 심판에 관한 언급은 곧 이 시편의 결론부인 6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언급으로 이 시편을 선포적으로 끝맺고 있다. 6절이 시작되는 첫 부분에 쓰인 히브리어 는 여기서 '왜냐하면'으로 번역되는데 의인이 복되며 사악한 자들이 왜 야훼의 복의 가장자리에서조차 밀려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야훼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어 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 외에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강조사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 단어가 이처럼 결론부에 쓰일 때에는 '진실로'라는 강조사의 기능이 더 중요하게 쓰인다. 시편 기자는 6절에서 전하려는 사실이 너무도 확실한 것이며 이 사실만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라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야훼의 통치는 명백한 귀결로 이어진다.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지 않는 그 사악한 자들의 길은 말라서 황폐해진다. '인정하시지만'의 히브리어는 로서 '안다'라는 동사 의 능동분사형이다. 동사는 원어적으로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한글로 번역했던 '인정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체휼하며 동참하며 동행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여기에 능동분사형으로 쓰여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야훼께서 의인들의 통치에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동참하실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 야훼께서 동참하시고 동행하시는 그 길이 어찌 번성치 않을 수 있으랴! 그 길에 어찌 생명과 축복이 흐르는 수로들의 물처럼 풍성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면에 사악한 자들의 길은 잡초가 무성하고 거름무더기로 가득 찬 쓸모 없는 길로서 황폐해진 광경을 연상케 한다. 야훼의 생명에서 떠난 것은 그 자체가 멸망이며 죽는 것(perish)이다. 비참한 운명은 다른 그 어느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악한 자들의 길은 형벌을 성취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야훼의 생명의 근원에서 단절된 것에서부터 온 파멸일 뿐이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백한 인생들의 귀결을 우리의 눈앞에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설교를 위한 제언
시편 1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보물창고이다. 시편 그 자체가 야훼의 풍성한 생명을 담고 있다. 그런 반면 시편 1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의 중요성을 그 어떤 말씀보다 웅변적으로 감동적으로 그리고 격정적으로 외치고 있다. 우리가 과연 무엇에 그리 바쁜가! 무엇을 위해서 무리를 지어 모이며, 무슨 묘안이라도 찾을 듯이 웅성거리며 땅바닥을 바라보며 우글대는가! 우리가 각자 야훼의 생명에 붙어있다는 실존을 얼마나 자각하며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야훼의 교훈을 생명처럼 먹으며 그것으로 인해 신음하듯 앓으며 사자가 그 먹이를 움킬 때처럼 비둘기가 그 짝을 찾아 구구거리는 것처럼 부르짖어 외치며 주님의 선하신 음성 외에 도대체 우리의 즐거움을 찾을 곳이 없어서 야훼의 교훈을 그 입에 밤낮으로 웅얼거리며 씹어 먹으며 생명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있는가? 시편은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음성으로 들려 온다.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수로들 가에 심긴 나무처럼 피동적이더라도 야훼 앞에서 그 교훈에 목말라 목마른 사슴처럼 목을 축이며 야훼를 즐거워하는 그 마음에서 열매와 푸르른 잎으로 번성함을 복음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야훼께서 인정하사 우리에게 감사하고 황송하게도 동참해주시는 그 의인들의 길은 다른 곳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인들은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부터라는 것을… 야훼와 함께 즐겁고 힘차게 동행하는 길, 그 참된 복의 길은 그 분의 말씀 앞에 순순히 앉아 신음하며 외치며 부르짖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에서부터 한 발걸음씩 떼어진다는 것에 의인들은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