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溪書院記
남계서원기
*林興祖所作裁朱子大全附錄券
*림흥조소작재주자대전부록권
南溪書院前有記矣後不可以無記常齋先生尉尤溪官蒲假館南溪鄭氏宗建炎庚戌九月十五日宲生文公於渼南舘嘉凞丁酉五月知縣李脩於文公始生地創祠堂中奉常齋晦菴鄭義黃勉齋配淳祐五年臘上饒施濆建講堂於祠堂之右名曰會極咸淳五年十月縣俠黃巖孫爲堂奉夫子蒸居德祐元年賜額南溪書院此南溪書院之源流也嗚呼父子有親文公所以自處以率人者莫切於是皇元混一尊崇正學謂文公父子書院宜在尊崇之展書院設山長弟子員上隸延乎郡祠堂中奉夫子並立常齋父也晦菴子也子雖齊聖不先父食而可正面比肩並立乎嘗疑近代郡縣夫子廟顔曾思三子配食於上顔路曾晢伯魚三父下列從祀或曰道統相傳爲重然父子尊卑道之大者也
남계서원전유기의후불가이무기상재선생위우계관포가관남계정씨종건염경술구월십오일포생문공어미남관가희정유오월지현이유어문공시생지창사당중봉상재회암정의황면재배순우오년납상요시분건강당어사당지우명왈회극함순오년십월현협황암손위당봉부자증거덕우원년사액남계서원차남계서원지원류야오호부자유친문공소이자처이솔인자막절어시황원혼일존숭정학위문공부자서원의재존숭지전서원설산장제자원상예연호군사당중봉부자병립상재부야회암자야자수제성불선부식이가정면비견병립호상의근대군현부자묘안증사삼자배식어상안로증절백어삼부하열종사혹왈도통상전위중연부자존비도지대자야
幸其父子異室相去甚遠不至如此祠堂之同室並立而此肩吾意文公之靈必蹙然不安者何始創至今百十有餘年而無一人之議及此而更張之至正四年夏閩憲趙公宣明敎化至縣謁南溪書院誇然曰南山之陽有木名橋南山之陰有木名梓橋高而伂梓實而俯可以人而不如木況奉世之矣人而可不順其父父子子之倫乎於是奉常齋先生居乎中奉晦菴文公侍乎側貳配食無所敃鳥文公之靈蹙然於百年之間者父父子子至是各安其所矣至正六年秋有事於先師時縣文侯躬獻奠四神位太相密通幾無容身拜地而況書院本爲文公設先河後海故祀常齋源長委大可以知其源之所自來足以表其委之爲大欲是貳者兩得其宜方區畵鄰郡擾攘未暇至正七年春止乃以官所地易鄰屋地入書院合堂後晐地而一之搆祠三間止塑常齋先生像而坐之於中以舊繪像置於塑像後以所繪文公義齋之像配之
행기부자이실상거심원불지여차사당지동실병립이차견오의문공지령필축연불안자하시창지금백십유여년이무일인지의급차이경장지지정사년하민헌조공선명교화지현알남계서원과연왈남산지양유목명교남산지음유목명재교고이패재실이부가이인이불여목황봉세지의인이가부순기부부자자지륜호어시봉상재선생거호중봉회암문공시호측이배식무소민조문공지령축연어백년지간자부부자자지시각안기소의지정육년추유사어선사시현문후궁헌전사신위태상밀통기무용신배지이황서원본위문공설선하후해고사상재원장위대가이지기원지소자래족이표기위지위대욕시이자양득기의방구화린군우영미가지정칠년춘지내이관소지역린옥지입서원합당후해지이일지구사삼간지소상재선생상이좌지어중이구회상치어소상후이소회문공의재지상배지
仍葺舊祠中坐文公塑像而以勉齋所繪立像配之修舊並居堂之左右新作西廡塑申夭及宠郕沂鄒四公像重繪濂溪至魯齋十有一先生像揭華表於欞星門之左題曰閩中尼山止自是春興工至夏而功告訖父父子子人倫最先旣正於違道之行乎何有趙公開其端而功爲大文侯成其功學之俱大故曰書院前旣有記矣今不可以無記者記其大者也事孰有大於人倫之最先者乎止院學合辭來求文以記其宲故記其大者又申之以辭曰道在四書語學庸孟一聖四賢相傳以正道在人倫父子爲先父尊子卑猶橋梓然通祀爲尊尊其大也配食於上從祀在下父子異室不相密通尙或議之何況於此此父此子南溪書院同室比肩式正其面肩隨之義猶有後前豈有父子而可比肩趙公宣明父父子子止慈止孝各安所止貫道知道有源有委各全其尊折同而異合異爲同同一溪南萬古書院輿天地泰
잉즙구사중좌문공소상이이면재소회립상배지수구병거당지좌우신작서무소신요급총성기추사공상중회염계지노재십유일선생상게화표어령성문지좌제왈민중니산지자시춘흥공지하이공고흘부부자자인륜최선기정어위도지행호하유조공개기단이공위대문후성기공학지구대고왈서원전기유기의금불가이무기자기기대자야사숙유대어인륜지최선자호지원학합사래구문이기기포고기기대자우신지이사왈도재사서어학용맹일성사현상전이정도재인륜부자위선부존자비유교재연통사위존존기대야배식어상종사재하부자이실불상밀통상혹의지하황어차차부차자남계서원동실비견식정기면견수지의유유후전기유부자이가비견조공선명부부자자지자지효각안소지관도지도유원유위각전기존절동이이합이위동동일계남만고서원여천지태
남계서원기
*임흥 선조께서 저술하여, 주자대전 부록권에 등재하다.
남계서원 앞에는 기록이 있는데, 후에도 그 기록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재선생(주자의 父 주송을 지칭)은 우계현(尤溪:중국 복건성 우계현) 위관(尉:관직명)이시다. 포가관(건물명) 남쪽시냇가에 불꽃처럼 아름답게 세워진 정씨종가(의재 정안도家에서 주송께서 임시거주) 미남관(건물명)에서 경술년 9월15일 문공(文公:주자)께서 마침내 탄생하셨다. 가희(연호) 정유 5월에 현(縣)에서 학식이 있는 이수(李脩)가 문공이 처음 태어난 곳에 사당을 지어 상재선생과 회암(주자)선생을 마음으로 받들었다.
정의, 황면 등이 사당에 배향하셨으며, 풍요로움이 분출하는 순우(연호) 5년 섣달 상순에 경모하는 사당에 강당을 건립하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극에 이르고, 크게 소문이 알려지자 함순(연호) 5년 10월에 현에서 호협하기로 소문난 황암손이 사당에 부자(夫子:중국에선 父子를 夫子로 표기, 현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사용)를 받들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덕우(연호) 원년에 남계서원으로 사액이 내려지니 이것이 남계서원의 원류이다.
아! 부자유친을 문공께서 자처하니 따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도다.
이 같은 제왕을 태초의 우주로 유일하게 공경하고 숭배하였으니 바른 학문을 내리시는 문공부자(文公夫子)를 서원에 마땅히 모시게 되니 숭배하는 전각이요, 서원이 높은 산에 세워지니 산 같은 은사를 제자들이 높이 따르고 그 숫자가 크게 번져나갔도다. 많은 사람들이 사당에 나란히 모셔진 부자(夫子)를 마음으로 받드니 부(夫)는 상재요, 자(자)는 회암이시다.
비록 아들이 성스런 반열에 우선하지는 못하나 어버이의 배식에 정면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근래 군현(지방)의 부자사당의 모습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생각을 집중해보니, 세 아드님의 배식(配食)에 상전의 얼굴은 일찍이 도가 생겨 빛이 나고, 큰 고기3마리가 어버이 아래서 도열하여 따르니 제사를 지내면서 혹자는 말한다. “도가 합하여 서로 전해지니 무게감이 있고, 부자간에 있어서 높고 낮음은 도(道)의 극치로다.”
그것이 다행스러운 것은, 부자가 서로 사당의 다른 방에 지극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이처럼 같은 방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여 문공의 혼령이 곤궁하여 불안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 한사람이라도 의견이 미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백십 여년에 이르도록 비롯되어 시작되었겠는가? 뛰어나신 문공께서는 현(縣:지방행정 단위)에 이르기까지 교화, 선포하여 복건성(閩:복건성의 별칭)의 규범으로 만4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거듭 시행하였다고 전한다.
남계서원에 가본 사람들은 “남쪽 산의 양지에는 나무로 된 유명한 다리가 있고, 남쪽 산의 음지에는 나무로 된 이름난 다리와 가래나무가 있는데, 나무는 높고 가래나무 열매는 엎드려 있어, 사람이 쳐다보면 나무의 모습이 세상을 받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에 순응하지 아니하였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자식을 자식으로 섬기는 인륜이 숭상되는 것은 회암선생께서 상재선생 거처에 시중을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두 영혼의 새가 가까이에서 긴밀하게 음식을 베풀 수 없었다면 문공의 혼령은 백 년 동안 궁핍했을 것이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아들을 아들로 섬기는 것은 각자를 편안하게 하는지라,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을 만6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선사(돌아가신 현인)를 섬겼으며, 때때로 현(縣)에서는 학문의 제왕으로 네 분의 신위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며 극진히 받들었다. 세상에 처하여 어렵게 살아왔는데 서로가 가까이에서 크게 통하면서 절을 받는 곳이 없다면 어떠했을까?
본디, 서원에는 문공을 ‘강’으로 먼저 모시고, 후에 상재선생을 ‘바다’로 모시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으뜸이 되는 어른께서 그것을 아시고 크게 위임하셨는데 그 원류가 겉으로 표시 나게 저절로 되돌아오니, 그 위임이 양자 모두에게 크게 이득이 되었도다.
바야흐로 이러한 것들은, 조용한 날이 없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인근지방의 설계도가 되어 만7년 봄에 이르기까지 시행되었다. 그로인하여 관청에서는 본격적으로 이웃집을 변화시키고, 서원에도 받아들이게 하여 모든 서원에 확산시켰으며 그 후 갖춤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당1개소 당 3칸에, 흙으로 빗은 상재선생 흉상을 설치하니 헐뜯는 것이 중단되었다한다. 그 후에는 앉으신 모습의 옛 초상화를 걸었으며, 문공의 초상화는 사당을 올바르게 이끄는 규칙이 되었다고 한다.
오래된 사당의 중앙에 정좌한 문공의 토우(흙으로 만든 흉상)가 거듭 안치됨으로 말미암아 이에 대해 애를 쓰는 사당은 초상화로 대신했다. 옛것을 손질하여 새것으로 사당 좌우에 나란히 게재했다. 서무(문묘에 성현의 신위를 모신 건물)에는 토우가 계속 성행했으며 은혜로운 성(郕)나라, 기수의 물이 흐르는 추(鄒)나라 4곳이 문공의 근엄한 초상화를 게재했으며 염계(주돈이 또는 지명)에 이르기까지 노나라 사당 10개소에 걸쳐, 한 분 선생의 초상화를 영성문 좌측처마에 잘 보이도록 화려하게 설치하였다고 한다.
복건성 사람 중에는 “니산(공자출생지 산동성 니산)에 가보면 봄부터 여름까지 기예가 흥한데 공치사로 어버이를 어버이로 아들을 아들로 섬기는 인륜이 최선이고, 기존의 바른 것은 모두 도리에 위반된 행동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찌 그 단초를 뛰어나신 문공께서 열지 않았다 할 수 있으랴. 그 공적이 크고, 학문의 황제였으며 또한 학문을 완비하셨으니 경사스런 큰 사고로다.
서원 앞에 기존하는 표지판은 말한다. “기록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기록한 그것이 큰 의미가 있다.” 섬기는 것이 어찌 최선의 인륜에 크게 존재하였으랴. 학문을 구하니 서원과 향교가 말이 일치하고 기록이 그것을 포장하는 까닭에 기록 그것이 큰 것이다. 또한 말을 펼친다는 것은 사서(四書)에 도가 존재함을 뜻하며, 언어학이 왕성하면 한 분의 성인과 네 분의 현인이 서로에게 뜻이 전해지니 올바른 도에 인륜이 있도다. 어버이와 아들에 있어서, 먼저 어버이를 높이고 아들을 낮추면 오히려 나무다리의 가래나무가 그러하듯 제사 때에는 ‘높고 낮음’이 ‘높고 높음’으로 되니 그것이 큰 의미가 있다.
배식에서는 웃어른 자리를 따르되, 제사 때에 어버이와 아들이 상하로 다른 칸에 묘신다면 서로 긴밀히 통할 수 없어 오히려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이렇고 이런 어버이와 이렇고 이런 아들을 남계서원의 같은 방실에서 어깨를 나란히 견주게 하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깨가 예의라는 의미를 수반하기에 ‘부자간에 어찌 선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시각이 옳을지도 모르나, 뛰어나신 문공께서는 어깨를 견줄 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셨다. 어버이는 어버이로서, 아들은 아들로서 자애로움에 도달하고, 효에 이르니 모두가 편안함에 도달하도다. 도를 관통하고, 도를 체득하고, 도의 원류를 알고, 도의 위탁을 알고 있으니 모두가 온전하여라. 높은 것이 타협하면 같게 되고, 다른 것이 합쳐지면 다른 것이 되는데, 같은 것과 같은 것이 하나의 큰 시내가 되어 남쪽을 향해 만고토록 흘러가니 서원과 더불어 천하가 태평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