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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전쟁 중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대량 학살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나 문서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정부의 문서 가운데 유대인 학살이나 인종말살을 언급하는 문서는 단 한 장도 없었다. 영국군과 미군이 점령한 서부의 강제수용소에서는 가스실이나 의도적인 학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말기에 발생한 기아와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관람객에게 가스실로 소개되는 시설은 실제로 화장장이었다. 대부분의 강제수용소에는 가스실이 아니라 화장장이 있었다. 화장장은 수감 중 자연사하거나 전염병 희생자의 시체를 소각하는데 이용되었으며 그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다하우 수용소의 소각로는 서너 개에 불과했다. 1946년 제막된 다하우 추모비에는 전쟁 중 이 수용소에서 23만 8천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새겨져 있었으나 현재는 3만 명으로 수정되어 있다. 사망자는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다하우의 유태인 수감자는 13%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했다. 그해 5월 12일 소련의 '나치 전쟁범죄 특별조사위원회' 는 아우슈비츠에서 최소한 400만 명의 수감자를 학살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왜 즉시 그 현장을 서방언론에 공개해 ‘나치 독일의 악마성’을 전 세계에 공개하지 않은 것일까?
소련과 폴란드 공산정권은 그후 10년 동안 서방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을 금지했다. 그동안 소련은 이 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수용소의 여러 시설들을 개조하거나 신축했다. 그리고는 추모 석판에 유대인 400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새겼다.
1945년에 설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추모 석판 : 희생자 400만
소련과 폴란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진 후 1990년에 교체된 추모 동판에는 희생자 숫자가 150만 명으로 수정되어있다. 250만이나 줄었지만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600만이라는 숫자는 요지부동이다.
1990년에 교체한 아우슈비츠 추모 동판 : 희생자 150만으로 수정
FOR EVER LET THIS PLACE BE
A CRY OF DESPAIR
AND A WARNING TO HUMANITY
WHERE THE NAZIS MUDERED
ABOUT ONE AND A HALF
MILLION
MEN, WOMEN AND CHILDREN
MAINLY JEWES
FROM VARIOUS COUNTRIES
OF EUROPE
AUSCHWITZ - BIRKENAU
1940 ~ 1945
소련은 아우슈비츠만 조작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 정권은 수백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하고 여러 곳에 암매장했는데 오늘날 여러 암매장지에는 2차 대전 중 독일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아우슈비츠는 강제수용소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수용소이자 산업공단이었다. 비엔나와 크라코프를 잇는 철도가 가운데를 지나가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주변에는 I. G. Farben의 대규모 합성연료 공장, Buna-Werke의 합성고무 공장, Krupps의 군수공장을 비롯해서 Bayer 등 여러 기업체의 공장이 30개나 있었고 농업연구소, 원예연구소, 가축교배연구소가 입주해 있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수감자들은 이들 시설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수용소 내 매점에서 쓸 수 있는 지폐로 매주 임금을 지급받았다. 1940년 5월에 개설된 이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우슈비츠에 등록되었던 수감자는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포함해서 모두 36만 3천명이었다.
아우슈비츠는 10만에 가까운 수감자로 구성된 하나의 도시였다. 당연히 그곳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죽었고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화장장이 있어야 했다. 도서관, 수영장, 축구장, 극장, 매춘업소 등의 위락 시설과 더불어 입원치료가 가능한 병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강제수용소 운영을 담당한 친위대(SS)의 경제행정국은 수감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적절한 영양 공급과 위생적 환경 유지에 많은 신경을 썼다. 수용소 규칙 위반자에 대한 처벌 외에 학대 행위는 없었다. 그러나 불법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헨발트 소장 칼 오토 코흐는 유대인 수감자 4명을 불법 처형한 죄목으로 1943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독일이 항복하기 전 수개월 동안 강제수용소들은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국제적십자사의 보고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44년 6월의 노르만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독일과 독일의 점령지는 총체적 혼란에 빠져있었다. 연합군의 지속적 폭격으로 인한 수송망 체계의 붕괴로 전쟁 말기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 정부는 1945년 2월 1일 국제적십자사에 원조를 요청해 왔다. 칼텐브루너 친위대 부총감과의 회의 끝에 국제적십자사는 강제수용소에 구호품을 직접 배포하고 대리인을 상주시킬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십자사의 보고서 어디에도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홀로코스트가 허구임을 말해 준다.
국제적십자사는 이미 1944년 3월 15일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민간인 시설에 대한 폭격중지를 요청한 바 있다. 독일의 수송망 붕괴로 전쟁의 마지막 3~4 개월 동안 식량과 의약품의 공급이 거의 중단되었다. 또한 소련군의 진격으로 동부 지역 수용소에서 이송된 수감자들로 서부의 수용소들이 과밀 수용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5년 3월 벨젠 수용소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 사태는 1월초 폐쇄된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이송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독일의 모든 수용소들이 벨젠수용소와 같이 극한상태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많은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건강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파간다 전문가들은 벨젠수용소의 전쟁 말기 상황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의 일반적 상황인 것처럼 사진과 영상을 조작했다.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망한 벨젠수용소의 시신 수백 구를 영국군이 불도저로 대형 구덩이에 밀어 넣는 영상은 독일이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증거로 가장 자주 제시되고 있다. 피골이 상접한 시신들의 상태는 이들이 학살된 것이 아니라 기아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유대인 프로파간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사망원인을 밝히지 않은 채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학살극의 희생자라고 선전했다.
기아와 발진티푸스로 사망한 벨젠수용소의 시신들 - 유대인 대학살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이들은 1945년 2월 13일부터 시작된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 사진을 부헨발트 등 강제수용소의 모습으로 선전했다. 사흘 동안 계속된 미군과 영국군의 폭격으로 드레스덴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희생자들이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이 도시에 모여든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수백 구 단위로 몇 주간에 걸쳐 소각되었다. 희생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음에도 많은 기록영화는 이 장면들을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시신을 소각하는 모습으로 소개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진들이 합성과 변조를 통해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 사진으로 조작되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를 처리하는 장면 - -- 유대인 대학살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폐허로 변한 드레스덴
헐리우드의 영화에서는 현장보다 더욱 심한 조작이 자행되었다.
영화 '아우슈비츠 온 마이 마인드'에 등장하는 가스실과 소각장
현재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과 소각장이라고 소개하는 건물 - 이것은 종전 후 지어졌다
서방연합국과 유대인들은 독일이 모든 강제수용소에 가스실을 갖추고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선전하다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자 예전 폴란드 영토 내의 6개 수용소만을 집단학살 장소로 지목했다. 다음 그림의 붉은 색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폴 라시니에(Paul Lassinier)교수는 전쟁 중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67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저서들은 유대인의 영향력이 막강한 영어권 국가들에서 번역 출간된 일이 없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관해 책을 쓴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으나 실제로 가스실을 목격했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모두다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라시니에 교수는 이렇게 서술했다.
“이스라엘은 제3제국이 죽이지도 않은 유대인 600만 명에 대해 1인당 5천 마르크의 배상금을 매년 서독 정부로부터 받아냈다. 이와 별도로 서독 정부는 유럽 각국과 미국에 거주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수백만 명에게 개별적인 배상연금을 지급한다. 서독은 2차 대전 중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중의 배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그 어느 나라의 언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불의이며 사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를 종합하면 전쟁 중에 독일의 모든 강제수용소에서 발생한 총사망자는 국적과 사망원인을 불문하고 약 30만 명 정도로 계산된다. 강제수용소에 유대인만 수감되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바르샤바 게토 반란, 동부전선 등에서 사망한 유대인을 모두 추가하더라도 2차 대전 중에 죽은 유대인은 30~40만을 결코 넘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서독 정부로부터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배상금을 받는 유대인은 해마다 늘어 1965년에 3,375,000명이나 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사기성을 이만큼 명백하게 드러내는 증거도 없을 것이다.
나치 독일이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로 이스라엘과 국제 시온주의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이 사기극의 최대 피해자는 독일인과 팔레스타인인이다.
- Robert Paurisson ; 프랑스인, 전 리용대학 문학과 교수
가스실에서 굴뚝까지, 1948년에 개장한 아우슈비츠 국립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가짜다.
- 프랑스 유력 시사 주간지 L’Express 1995.1.19.~25
사흘간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죽은 독일인의 숫자가 5년 동안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인의 숫자보다 더 많다.
- 데이비드 어빙 ; 영국인, 역사가
홀로코스트 산업이 매일같이 만들어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예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 노만 핀켈슈타인 ; 미국 유대인, 정치학자 , 2000년 ‘홀로코스트 산업’ 저자
<참고서적>
정말 600만이 죽었나? Did Six Million Rearly Die? (1974)
저자 ; Richard E. Harwood - 영국인 , 런던대학교 사학과 졸업, 영국 보수우익 정치인
역자 ; 김현영 (2014)
첫댓글 드레스덴 폭격관련 기사 찾아보니 ..당시 이 도시는 소련 붉은군대를 피해나온 난민과 유태인 등 피난 행렬로 인산인해였다.연합군은 45.2.13~14 도시 전체를 화씨1800도 고열로 만드는 작열폭탄을 퍼부어 드레스덴을 파괴했다. 건물파괴열과 지상의 열이 급격 비약상태가 되고 온도 차이는 무서운 압력이 되어 모든 물체와 인명을 파괴했다. 살아있는 채 그대로 타들어가는 지옥상황이었고 열을 피해 지하로 숨었던 사람들도 산소가 타버려 질식해 숨졌다..2차대전 사망 추산자 6천만~8천5백만..무셔워;;앞으론 이런 전쟁 없겠지 설마..
이런 연구에 대한 독일과 이스라엘 그리고 영국등 기타 유럽국가의 반응은 여떤지,
위안부와 학살에대한 한국 중국 일본의 반응과 비교하면 재밋겠다.
나도 광헌이의 글에 동의한다.
유태인 사망자가 어떻게 600만명이 되었는지, 어느 일본 학자의 주장을 전해들은 바가 있다.
1, 2차 세계대전 전의 유태인 숫자(통계상)와 전쟁후의 숫자(통계상)를 계산해 보니 600만명이 모자란다는
계산이 나왔다는 것이다. 출생율, 사망율을 감안해서 계산해보니 그만큼 적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족한 숫자 모두가 독일 나치정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흔히 그렇게 믿고있다.
가공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