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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7:14-27절
제목 : 이런 세상 끝내야지
일시 : 2019년 7월 21일
1.
어쩌면 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악의 욕 중 하나는 너는 살 가치가 없다, 너는 어떤 희망도 없다, 가 아닐까? 사람이 스스로 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이유가 저것이니까. 과자 한 봉지 값도 못한 삶이라고, 내일에 대한 콩알 만한 희망도 가지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아니, 내버린다. 이것은 내가 「자살은 죄인가요?」를 쓸 때 알게 된 우리네 인생에 관한 쓸쓸한 진실이었다.
하나님의 시선은 저것일까? 너희 이스라엘 놈들은 이 땅에서 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너희가 이 땅을 더럽혔고, 역겨운 짓만 일삼았으니, 이 땅이 너희를 내동댕이치고, 내가 너희를 던져버리리라. 너희가 살아 있는 한, 이 땅에는 어떠한 소망도 없으리. 너희가 사라지는 것만이 비단 너만이랴. 모두에게 한 푼의 소망이 되리라.<흐름이 좀 이상하다. 나중에 수정할 것>
2.
‘더 이상 후반전도 없으니 연장전은 더 더욱 없으리라.’ 너희들이 왜 끝인지, 끝을 내야 하는지를 하나님은 그 절규에 찬 목소리 사이사이에 왜 끝장내야 하는지를 흩뿌려 놓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돈과 폭력이다. 무슨 말인가? 저 두 개로 인해 이스라엘이 망해야 한다면, 뒤집으면 저것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노릇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돈에 의지하였고, 폭력을 신뢰하였다. 그렇게 돈과 폭력으로 쌓은 삶과 신앙, 사회와 질서는 끝장내야 마땅하다.
아, 6장에서 우상 숭배를 심판의 이유로 지목했으니, 합하면 3개라고 할 수 있겠구나. 경제적으로는 돈, 사회적으로는 폭력,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한 예루살렘은, 그것이 어떤 곳이든 간에, 설사 하나님의 도성이라도 망하고 망하고 망해야 하리라. 나중에 보겠지만, 저절로 망하게 되어 있다.
일단, 저 세 개의 연관성을 짚어 보자. 저 셋은 삼위일체라 하겠다. 셋은 어느 것이 우선이고 최선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와 꼬리가 물고 물린, 고상한 언어를 여기에 사용하고 싶지 않는데, 끊김 없이 돌고 도는 원과 같다. 우상을 숭배한다 함은, 그러니까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다 함은, 그 종교적 언어를 걷어내고 그 속살을 드러내면, 돈과 폭력을 섬겼다는 말과 같다.
돈을 가졌다 함은 무엇인가? 권력이 아니던가. 일사천리로, 무소불위로 제 뜻을 남에게 시행할 수 있는 파워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돈이 아닌가. 하여, 나는 이곳저곳에서 돈은 신이다, 를 숱하게 말했다. 잘 까먹지 않도록 간명하게 말하자. 돈 = 신.
돈을 어떻게 가지는가? 지금 나는 성실한 직장인들의 수입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들, 한 사람이 한 달에 수억, 수십억을 번다는 것은, 제 노동의 가치를 너무나 상회하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는 벌이다. 그런 돈을 말한다. 그 돈은 누군가의 희생을 치른 것을 손쉽게 거머쥔 것들이다. 때문에 지금의 부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을 종교적으로 숭배하고, 사회적인 폭력을 행사한 결과이다. 그러기에 우상 = 돈 = 폭력이다.
3.
우상이 그냥 사람이 만든 것이듯, 돈도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신의 모양을 하고, 신의 권위를 흉내내는 허튼 우상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데, 돈이 죽음의 나락으로 치닫는 사람을 구원할 리 만무하다. 아니, 무력한 우상 보다야 돈이 며 배 더 강력할 거다. 그래도 돈은 돈일뿐. 돈 때문에 망할 뿐. 돈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19절과 20절을 보라. 은금을 내던진다고 했다. 내 추측으로는 돈 가진 자들이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는 최고의 사냥감이어서 그럴 것이다. 평상시는 돈 가졌다고 떵떵거리며 잘 살았는지 몰라도, 전쟁과 기근, 역병이 창궐하는 마당에, 인심은 수심이고, 도덕과 양심은 땅에 떨어진 마당에, 내 소유의 부는 내 소유의 죽음으로 치환되지 않겠는가. 모두들 아귀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다, 돈 많은 자들을.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죽음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돈이 말이다.
그리고 그 은금이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고려하면, 은금이 무슨 소용 있나. 그냥 내 손에 쥐어진 쌀 한 톨이 더 값진 것이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전하고 난 다음, 빵 한 덩이를 사기 위해 한 부대의 돈다발을 들고 가야 했듯이, 그래서 돈 가치가 똥값이 되었듯이, 예루살렘에는 은금으로 밥 한 사발을 구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 왕 이야기를 한 두 문단 쓸 것.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왜 돈이 무용지물이고, 오히려 내 명을 재촉하는가? 19절 끄트머리를 보면 답이 나온다. “오히려 은과 금은 그들을 걸어서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였을 뿐이다.” 그래, 그러고 보면, 돈이 무슨 죈가. 사람이 나쁘지. 돈은 그저 돈일뿐인데. 별 것 아닌 돈을 위해 제 목숨 걸고, 남의 목줄 잡고 가정을 파탄 내는 것, 그게 악한 거지.
돈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여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
그것이 죄다. 망할 이유다. 그것이 합법화되고, 벌을 받기는커녕 칭찬 받고 공공의 모범과 모델이 될 때, 그런 사회는 망해야 마땅하다. 끝내야 한다. 끝나지 않으면 착하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끝장 난다. 그래서 분노에 찬 하나님은 그런 사회가 끝장 보기를 원하신다. 돈이 신이 되는 세상은 종교적으로도 우상이고, 사회적으로도 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주범이다.
4.
다음은 폭력이다. 나는 폭력에 관해 관심이 많아서 나름 열심히 독서했다. 하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인 것은 폭력에 대한 개념이다.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논리적으로 꼬이거나, 현실적으로 들어맞지 않다. 그래서 잠정적인 동시에 아주 간단한 나의 정의는 이렇다. ‘나의 의지를 강제적으로/물리적으로 타인에게 실현하기’이다.(「복음과 상황」 원고를 살펴볼 것) 그래서 폭력이 무엇이냐는 형이상학적 정의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현실을 보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그런데 에스겔이 직면했던 예루살렘의 폭력에 대해서는 장차 다루어질 것이다. ??장에서 폭력의 실체가 소상히 밝혀진다. 지금은 10-11절과 21절부터 24절에 일관되게 흐르는 폭력은 폭력으로 징벌한다는 것을 조금만 탐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핵심 사안을 다섯 단어로 압축해서 질문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폭력으로 폭력을 심판한다? 하나님이 악인을 이용해서 죄인을 심판한다?” 저것이 하나님의 방법일 수 있을까?
사실, 저 물음은 에스겔만의 것은 아니다. 예언서들이 깊이 천착했던 절실한 질문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망국 직전의 남유다 상황이 저러했기 때문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이었다. 그것을 하박국서를 펼치면 첫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박국이 남유다를 고발하는 1장 2-4절의 핵심 키워드는 ‘폭력’이다. 안타깝게도 개역개정이 ‘강포’라고 번역해서 독자인 우리들은 ‘강포’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라며 어물쩍 넘어가버리곤 한다. 폭력에 의해 악인이 의인을 짓밟고 흥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요상하다.
1) 더 큰 폭력인 바벨론을 통해 작은 폭력인 남유다를 심판한다.
2) 아주 나쁜 악인을 통해 그보다 훨씬 덜한 악인 또는 그나마 나은 의인을 심판한다.
특히 2)는 내가 미치도록 힘들었던 문제이었는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써두었다. 하여간에, 하박국서를 읽으며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악인을 사용하신다. 악인을 통해 의인이 고통 받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그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스스로 망한다. 이것이 하박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묵시’이다(합 1:1). 그리고 내가 들었던 대답이었다. 저 ‘묵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짐, 부담(burden)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하박국이 들었던 대답은 하박국에게는, 그리고 내게는,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내내 수긍하기 쉽지 않은 무겁고 무거운 짐이다.
5.
우리 본문은 하박국서가 아니라 에스겔서이다. 본문으로 돌아오자.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내부가 폭력과 살육이 만연했다는 고발이 나온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방식은 뭘까? 7장 10-11절을 보면,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 응축되어 있다. 저 구절에서 몽둥이, 곧 이스라엘을 매질할 몽둥이는 누구, 무엇? 채찍은 또 뭔가? 그렇다. 바벨론이다. 하박국서의 그 바벨론 말이다. 11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보자. “폭력이 일어나서 죄악을 징벌하는 몽둥이가 되었다.” 저 폭력은 몽둥이와 다른 말이 아님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남유다를 몽둥이찜질을 한다.
폭력으로 폭력을 물리친다?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칼로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는 법(마 ?:?)이다. 이것을 문화인류학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해 낸 것은 르네 지라르이다. 그는 사탄의 본성 중 하나가 폭력이고, 그 사탄은 너무나 영리해서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 정점으로 치달으면,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폭력에 의해 파멸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해서, 사탄은 폭력을 또 다른 폭력인 희생양을 통해서 해소한다. 그러니까 폭력이 폭력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나는 지라르의 논리에도 감탄했지만, 사탄의 영악함, 또는 사악함에 얼얼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헌데, 지라르의 논리가 그럴 듯 하다고 해도, 폭력으로 폭력을 잠재우기는 사탄의 방식일 뿐, 하나님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시 한번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난처했던 본문을 이 곳으로 갖고 와야 겠다. 욥기 1장과 2장의 사탄이라는 존재 말이다. 그 사탄의 실체에 대한 무수한 설명이 있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주도한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허용한다는 것, 여기까지만 말하자. 그것은 욥기에서 부닥칠 테니까.
사실, 이것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한 예언자들의 ‘해석’이다. 신명기에 대한 해석, 역사에 대한 해석. 축복과 저주를 기록한 신명기 28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에게 저주를 행사하고 있으며, 그런 하나님이 ‘공연히’(6:10) 그리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 멋대로, 임의가 아닌 하나님의 도저한 윤리성과 약속에 기초한 섭리이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이건 나와 아들만의 것이 아닌 에스겔을 비롯한 하박국 등의 것이기도 하다. 하여튼, 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해서 폭력적인 사회를 심판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또 다시 자신의 폭력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의 논리를 조금 갖다 대면,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지 않는다. 이 단언적 진술에 화들짝 놀랄 이들이 너무 많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를 잠시 들어 봐주기를 부탁한다. 악인은 그 악인의 죄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망한다. 바로 그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세계를 설계하셨다. 물론, 그 악인을 징벌하는 변증법적 모순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악인이 제 무덤을 파고 들어가는 것 또한 하나님의 심판 방식이라는 것, 그것은 부인 못할 진실이다.
6.
폭력에 의해 폭력이, 더 나쁜 악인에 의해 덜 나쁜 죄인들이 고통 받는 참람한 세상을 에스겔은 평화가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25절). 평화를 저버린 삶의 양식으로 살아온 자들이 평화를 갈구하지만 평화는 없다. 폭력과 거짓으로 살아온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는 없다. 그런데 평화를 찾기 위해 그들이 하는 일이 뭘까? 예언자, 제사장, 장로가 왜 등장하는 걸까?
예언자가 본 것이 없고, 제사장은 가르쳐 줄 율법이 없다 함은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적 상황을 가리키고, 지혜로운 장로들은 자신의 삶의 경륜으로도 풀지도, 헤쳐나갈 방도가 도무지 떠올지 못할 현실이다. 이 총체적 난국을 돌파해야 할 왕도 사면초가에 빠져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한다. 각급 지도자라고 다를 수 없다. 무언가 희망을 말하고,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고 외쳐야 하는데, 그 자신이 무서운 절망에 빠져 어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더 말해 무엇 하리.
우상을 숭배하고, 돈을 사랑하고, 폭력을 저지르며 살았던 삶의 필연적 결과다. 그렇게 살았으니, 결국 저 파국에 다다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살아온 자들의 자업자득이다.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희망과 내일도 찾기 어려웠다. 그것은 본문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려는 수작이기도 하고. 그냥 그 칼날을 받아내는 것, 마지막 순간에서야 드라마의 악역이 본래의 자기로 돌아와 무연히 칼을 받고, 쓸쓸하고도 슬픈 죽음을 죽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죽어야 끝나는 드라마인가?
나는 7장의 맨 마지막 구절,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에서 희망의 기미를 보기는 보았다. 우리를 그저 용서하고 사랑하고 한 없이, 끝 없이 자애로울 줄 알았던 하나님의 또 다른 얼굴,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두렵고도 무서운,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저분은 참으로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길들일 수 없는, 순치되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간과했던 하나님의 이면을 보았다면, 정면으로 보아왔던 그 하나님이 거짓 하나님의 모습도 아니고, 영영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심판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내면, 그래서 야훼가 참 하나님인 줄 알게 되면,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닌 심판하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러기에 저 말에 슬쩍 은폐된 진실이 있고, 희망이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도 어서 끝장 나야하지만, 그런 하나님 이야기가 끝나고, 회복의 하나님을 속히 만나고 싶다는 얄팍한 생각을 하게 된다. 허나, 아직 때가 아니다. 돌아온 궤를 함부로 열었다가 몰살당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삼상 6:19)처럼 6, 7장을 읽으면서, 분노하는 하나님이 무섭다고 얼른 회복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자들은 아직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한 것이리라.
7.
아무튼, 폭력으로 폭력을 심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아무튼, 악인으로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아,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다.
아, 그리고 이런 세상은 끝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