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누가복음 16:6-8까지의 내용을 볼 때, 예수의 말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https://blog.naver.com/truth-free/222669419296
A: 감독은 . . .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딤전 3:2)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회중(교회)의 감독자를 임명할 때의 자격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회중의 성원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부일처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이 말씀 때문이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성서 어디에도 한 아내만을 취해야 한다는 율법이나 조언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아내만을 취하는 것이 타의 모범이 되기 때문인데 이 모범이 되는 이유를 따져보면,아내를 둘 이상 취하면 가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내들은 서로의 이익을 앞세우다 보니 시기를 하고 싸우므로써 가정이 시끄러워지기 일쑤이다. 따라서 제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회중(교회)의 감독을 맡아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두명 이상의 아내를 가진 선례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창세기를 읽어보면,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하자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여종 하갈을 내 주었다. 이 사례를 일반화시키면 기존하는 아내가 허락할 때 그 다음의 아내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허락할 때는 자신이 불리하게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나 조건으로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하갈이 사라를 무시하자, 사라는 그들을 내어 쫓으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선례를 적용한 종교가 이슬람교이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택한 나라의 법은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기존 아내가 허락한다는 조건 아래서이다. 그러면 기존 아내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요구 조건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매달 생활비를 얼마 이상 줘야 한다든지 등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기독교가 우세해지고 디모데 전서의 이 말이 기준이 되어 일부 일처제로 국법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러한 법의 영향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미쳐 우리나라도 일부다처제(축첩제도)를 폐지하고 일부 일처제를 국법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성비는 1:1이고 출산에 있어서도 유전학적으로 1:1의 비율로 성이 결정되는 것만 보더라도 일부일처제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 사랑한다는 감정이 식어진 상황에서 경제력이 없는 아내는 마지 못해 가정을 억지로 끌고 가기에 무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남편 쪽에서도 더 이상 아내를 이성으로 바라보는 감정이 무디어지고 다른 여자를 쳐다 보게 된다면, 나라의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아내로 또 맞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소위 '애인'을 두게 되는 것이다.
잠시 결혼에 관한 율법을 담고 있는 신명기를 살펴보자:
신명기 제 24 장
이혼과 재혼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이미 다른 남자와 관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경우 경제력이 있는 남자는 반드시 여자를 내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내보낼 수 있음을 말하며
이에 대한 사례로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들 수 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마리아를 수치를 줘서 돌려 보내려 하지 않고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이제 문제의 요점이 되는 누가복음16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우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일 확률은 적고, 누가를 통하여 필터링(filtering)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예수의 말씀을 복음으로 보는 누가의 관점에서, 침례자 요한까지를 모세 율법이 적용된 시대라 본 것이다. 그러나 17절은 예수께서 여러차례 강조하신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율법의 정신을 비뚤게 적용한 것을 몹시 나무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율법에 담긴 정신을 재해석함으로써 원래의 율법의 취지로 되돌리고자 함이었다. 결혼과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새로운 여자를 얻기 위해서 신명기의 말씀을 적용한다고 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 아내의 처지를 고려함없이 버림으로써 이혼당한 아내는 여생을 어렵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함과 동시에 자신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상 이 문자에 얽매여 이혼의 사유가 오로지 성적 부도덕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계속 아내를 구타한다든지, 또는 아내가 노름에 미쳐 생활비를 지속적으로 노름판에 갖다 바친다면, 몇번 경고를 해서 듣지 않는다면 이혼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결혼과 이혼에 관한 워치타워의 입장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간음 외에 이혼하여 재혼을 하면 그 자체를 간음결혼이란 꼬리표를 붙여 전도인 카드를 5년간 따로 보관하였고, 이혼 당한 여자도 재혼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견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이혼당한 여자들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간음결혼이란 딱지도 붙지 않게 되었다.
요점은 예수의 말씀이 신명기를 부인하거나 모순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닌 인도주위 정신을 강조하여 재해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의 일점 일획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시킨 것이다.
참고 사항
반즈의 주석
한 아내의 남편 - 이것은 4세기 바르셀로나 교회의 장로 비질리오스가 일반적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목사는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정한 것처럼 주교가 유부남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해석은 명백히 오류로 제외되기는 하지만, 이 구절이 감독이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동시에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첫 번째 아내의 사후 두 번째 아내의 결혼을 금지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블룸필드, 도드리지, 맥나이트의 주석을 참조할 수 있다. 전자가 올바른 견해라는 것은 다음 사항을 고려하므로써 분명히 알 수 있다.
(1) 그것은 그 언어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말에 주의해야 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해될 것이다. 일부다처제가 드물지 않았던 시기에, 남자가 "아내를 한명만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2) 첫 번째 아내가 죽은 후 두 번째 아내의 결혼은 성경 어디에도 잘못된 것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과부와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은 분명히 고린도전 7장 39절의 정당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 허락을 통해 인간이 두 번째 결혼을 하는 것이 동등하게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것이 합법이라면, 복음의 비숍에게도 허락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이유로도 그는 그의 경우에 그러한 결혼에 반대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른 어떤 경우에서도 똑같이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복음의 목사로서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것이다(히브리서 13장 4절 참조). 그리고 도드리지가 잘 말했듯이, "상황이 조정되어 첫 번째 결혼과 같이 충분히 합당할 수 있고, 어떤 종류의 불편함도 없을 수 있다."
(3)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 금지에는 특별히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만연되었고, 불법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복음의 의도 중 하나는 결혼 관계를 원시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입교하는 모든 남성에게 그의 복수 아내와 이혼을 요구할 필요가 절대적으로 요구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가 한명 이상의 아내를 가질 때, 이 관행이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복음의 감독자는 오직 한 명의 아내만을 취하라는 말로써 일부다처제의 관행은 점차 불명예스럽고 부적절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감독의 모범과 영향력은 이러한 결혼 관계의 본질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도입하게 된 흐름이었다. 이 구절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직자들의 독신주의에 대한 교황들의 견해는 성서와 직접적으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 바울의 선언은 "결혼은 모든 사람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며, 여기서 감독자는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음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바울은 그것을 전혀 금지하지 않았겠는가? 감독이 한 명 이상의 아내를 갖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결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로마법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지금도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