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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선미-임 제미-임 견미-조양군 임 세미
임선미(林先味, 1362년 ~ 1394년)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두문동 72현 중 하나이다. 호는 휴암(休庵)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 후, 뒤에 그들이 은거한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여 충절을 기렸다.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조양 임씨 조양군 임세미[林世味] 공
순창 임씨
杜門齊公 諱 先味 事蹟
공(公)의 자(字)는 양대(養大)요 호(號)는 휴암(休庵) 또는 두문제(杜門齊)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正公)이시다.
고려 인종때 대문호이신 서하공(西河公) 휘(諱) 춘(椿)의 육세손이며 찬성사(贊成事)며 순창군(淳昌君)이신 휘 중연(仲沇)의 아드님으로 고려 충숙왕 5년 정축에 낳으셨다.
일찍이 벼슬하여 랑관(郞官-正五品)을 엮임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는데 고례(古禮)를 참작 퇴폐한 세속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간성왕(杆城王) 4년(1392) 고려가 망하게 되자 오정문밖 두문동 산골짝이로 들어가 은거하며 충의를 지키고 마음을 고려에 두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니 마침내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이에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분사순절(焚死殉節)하였다.
익산 임씨
"평원부원군, 즉 ‘堅味’ 자손으로 생존한 사실이 탈로 나면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救命 圖生할 길은 오직 신분을 속이고 위장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관향을 속여 익산 임씨라고 한 것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말기(末期)에 최 영(崔 瑩), 이성계(李成桂)의 정적(政敵)들이 야망(野望)에 의하여 조부(祖父) 임맹양(林孟陽), 증조부(曾祖父) 개성판윤(開城判尹) 임제미(林齊味), 종증조부(從曾祖父) 문하시중(門下侍中), 령삼사사(令三司事),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임견미(林堅味) 등 친인척들이 1388년 戊辰年(고려 우왕 14) 1월 11일 崔 塋, 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살육(殺戮)당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이성계왕조(李成桂王朝)가 곱게 볼 리 없었을 것이다.
임천관 성균진사 사순공의 묘가 실전되어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유언하였다.
죽어서도 벼슬을 적을 비석을 세우지 않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하신 임천관 시조되시는 사순공의 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이란 전쟁을 겪으며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한 가림산[지금의 성흥산] 자락에 수풀에 덮여 묻히고 신선이 되셨다.
조양임씨 시조 세미공에서 분관된 7세손 사순공을 시조로 모시는 임천관입니다.
임천을 지위 격상하여 임주라고 제가 개명한 것입니다.
임천임씨의 시조 사순공께서는 성균진사를 지내셨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부여군 임천면 가림산[오늘의 성흥산]에 모셨던 묘가 소실되었으나 임천면을 집성촌으로 살아온 임천임씨는 원래 정계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가훈으로 초야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오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문과에는 나아가지 않고 지내오다 나라를 지키는 병역을 필해야 할 필요를 느껴 병자호란 후에 무과에 다음과 같이 응시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천[林州] 임가 무과 과거급제자 명단
인명 자 호 생몰년 본관 합격등급
임정만(林廷萬) 한경(漢慶) 1661 ~ ? 임천(林川) 병과(丙科) 73위
임봉서(林鳳棲)운서(雲瑞)1680 ~ ? 임천(林川) 병과(丙科) 39위
임영번(林英蕃) 덕수(德秀) 1694 ~ ? 임천(林川) 병과(丙科) 223위
임춘후(林春垕) 1735 ~ ? 임천(林川) 병과(丙科) 187위
임춘대(林春大) 1759 ~ ? 임천(林川) 병과(丙科) 419위
임시대(林時大) 1725 ~ ? 임천(林川) 병과(丙科) 437위
두문동 72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이라고도 불렀다.
내용
현재 72인현 성명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임선미(林先味)· 신규(申珪)·신혼(申琿)·신우(申祐)·이경(李瓊)·맹호성(孟好誠)·고천상(高天祥)·서중보(徐仲輔)·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구전(口傳)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명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학생 임선미(林先味) 등 72인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태조는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敬德宮)에서 친히 과장(科場)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뒤 이 고사가 임선미·조의생 자손의 가승(家乘)을 통하여 정조에게 알려져 1783년(정조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추모하였다.
다른 한 속전(俗傳)에 따르면, 개성 부근 보봉산(寶鳳山)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도 두문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 유장(遺將) 48인이 들어와서 몸을 씻고서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한 골짜기라고 한다. 이들의 성명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신정(洗身井)·회맹대(會盟臺)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문동72현 [杜門洞七十二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문동칠십이인은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며, 또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산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후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문불출'이란 말 자체가 원래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며 같은 표현은 조선 시대 이전의 기록에도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1], 오히려 두문불출이라는 데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2]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호와 이름, 간략한 인물 소개를 함께 적었다. 이들은 이성계의 협박으로 출가한 황희를 빼고는 1397년 이성계가 불을 지르자 안 나오고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두문동 72현의 명단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 농은유집에 갑골문으로 된 천부경문을 남겼다.
방촌(厖村) 황희(黃喜) : 뒷날 두문동에서 나가 출사. 세종 대에 영의정을 지냄.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 좌정언. 하빈이씨 시조 사열부원군(沙熱府院君) 시중 이거(李琚)의 손자. 저서 이우당실기(二憂堂實紀)가 규장각 도서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 귀은제(歸隱第)에 은거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 정몽주(鄭夢周)의 제자.
김사렴(金士廉) :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평장사(平章事) 김방경(金方慶)의 손자이다.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구신이 고려와 함께 순국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죽어 선왕과 선인들을 대하리오.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유언하였다.
송은(松隱) 구홍(具鴻) : 창왕때 우정승 역임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 두문동에 든 다음해 평산(平山)의 다의현(多義峴)에 옮겨 집을 ‘다의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 조선 태조에게서 두문동에 들었다는 이유로 유배형 중의 본향안치(本鄕安置)의 벌을 받았다. 뒤에 풀려나자 다시 두문동에 들었다.
양대(養大) 임선미(林先味) : 양대(養大)는 호가 아닌 자이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 정도전(鄭道傳)과 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 첩의 후손)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록한 까닭에 그들에게서 원한을 사서 가족과 일당 8십여 명과 함께 암살당했다.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 딸(창왕의 정비)의 행실과 지위 탓에 모함을 자주 받았다.
이석지(李釋之)
박심(朴諶)
이맹운(李孟芸)
조의생(曺義生)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두문동에서 나온 후 남원 두동방에 두곡(杜谷)을 지어 들어갔다.
김주(金澍)
이존오(李存吾)
정추(鄭樞)
최양(崔瀁)
길재(吉再)
남을진(南乙珍)
원천석(元天錫)
맹유(孟裕)
도동명(陶東明)
도응(都膺)
이사지(李思之)
김자수(金自粹)
장안세(張安世)
국유(鞠襦)
정광(程廣)
한철충(韓哲沖)
나천서(羅天瑞)
조열(趙悅)
김약시(金若時)
정온(鄭溫)
맹희도(孟希道)
신덕(申德)
서견(徐甄)
최문한(崔文漢)
허징(許徵)
이사경(李思敬)
성박(成溥)
이명성(李明誠)
이색(李穡)
이고(李皐)
정지(鄭地)
하자종(河自宗)
이양중(李養中)
김진양(金震陽)
안성(安省)
김약항(金若恒)
배상지(裵尙志)
이행(李行)
변숙(邊肅)
김선치(金先致)
이연(李涓)
이종학(李種學)
이양소(李陽昭)
민유(閔愉)
문익점(文益漸)
임탁(林卓)
조희직(曺希直)
송인宋寅
곽추(郭樞)
조철(趙鐵)
윤충보(尹忠輔)
유순(柳洵)
채왕택(蔡王澤)
송교(宋皎)
최칠석(崔七夕)
김자진(金自進)
김승길(金承吉)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조유(趙瑜)
김제(金濟)
전조생(田祖生)
전귀생(田貴生)
오상덕(吳尙德)(황희의 자형으로 호는 두암공(杜庵公), 소부시소감 역임, 출처: 두산백과, 함양오씨 족보, 황희의 풍계서원 전북문화재자료)
[출처] 두문불출/두문동 72현 중에 순창 임씨 임선미[林先味] 公|작성자 kyuinlim
첫댓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있지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
그저 물 처럼,바람 처럼 살다 가면 되는 것이지요.
산속의 보물을 찿기 전에 먼저
네 두 팔에 있는 보물을 충분히 이용하라.
그대의 두손이 부지런하다면
그 곳에서 보물이 샘 솟듯 솟아날 것이다
오늘도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