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막바지에 이르렀다. 좀 전까지 머물던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기 전,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브런치를 하면서 여유를 부린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 속에 비즈니스 용어가 난무한다. 나는 이미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나처럼 한가한 여행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마시는 커피 한 잔에는 여유보다는 실리와 탐색이 담겨 있는 듯하다.
가족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한국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모국의 찬란한 봄꽃 사진도, 팽목항에서 울컥했던 사연도 카톡 프로필 사진이나 개인 블로그에 올릴 수 없었다. 혹시라도 가까운 이들이 알고 서운해할까 봐서이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의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번만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국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바람이 컸기 때문이리라.
여행 중에는 집 걱정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에 대한 그리움마저 멀리 떠나보낸다. 그 덕분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은 여행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치 딴 사람처럼 변신하는 모양새이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낯설고 새로울수록 이전의 나를 빠른 속도로 떨쳐 버릴 수 있다. 나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거리의 유리창에 비친 구부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 호기심과 열정에 가득 찬 어린아이가 되어 걷고 있는 감각 속에 빠져들게 된다. 길 위에서의 나는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구도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산티아고 순례길 대신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산수(山水)의 조화가 경이로웠다. 자연이 경이롭다는 걸 깨달았으나 오래전부터 훈련이 되지 않은 탓인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저 '너무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의 반복적 문장만 구사할 뿐 눈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뇌리에는 오로지 걷는다는 행위가 강하게 각인되었다. 발가락이 부르트지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걷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올레길은 특별했다. 낯선 곳을 자동차로 여행하는 벅참과는 또 다른 감동이 솟아났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경보다 인적이 드문 길을 걷는 데서 더한 편안함을 느꼈다. 괴나리봇짐처럼 생긴 백팩에 삼각김밥과 물을 챙겨 내딛던 그 길은, 장차 나 홀로 가야 할 길과 닮아 보였다.
나는 왜 쉼 없이 '자유'를 갈구하고 있을까? 나를 구속할 존재가 딱히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니... 아직도 나를 억누르고 있는 모종의 굴레가 있기라도 한 걸까?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에서, 주인공 '버드'는 아프리카 여행을 꿈꾼다. 대학 은사의 딸과 결혼한 그는, 그해 한 달 동안 술에 빠져 살다 황폐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대학원을 자퇴한다. 다행히 장인의 도움을 받아 학원 강사 자리를 얻지만, 몇 년 후 뇌탈출(Brain Herniation) 장애를 가진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가 꿈꾸던 삶은 또다시 엉망이 되고 만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탈출하고 싶은 자유 사이에서 심히 갈등하던 버드는, 결국 자유를 보류하고 책임 있는 가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소설에서 '아프리카 여행'은 버드가 갈망하는 자유를 대변한다. 그 속에는 현실 도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책임과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누구나 자유를 꼽으리라. 그러나 모순되게도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공짜로 얻어지는 자유란 없다.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하기 이를 데 없다. 현실 도피 일환으로 선택한 자유는 양심이란 녀석이 쫓아다니며 괴롭힐 터이니 결코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갈망하는 자유를 굳이 묘사한다면 소설 속 버드가 바라는 자유와 결이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누가 나를 옥죄는 것은 아니건만 나 스스로 규정한 책임과 의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 때문에 그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호시탐탐 도사리고 있다. 허나 이 모든 연결고리는 펼쳐 놓고 보면 지나친 불안과 염려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거의 습관적 강박관념에 가깝다. 겉으로는 초연한 척 행동하지만 속내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볶는 호흡으로 숨 가쁘다.
신기하게도 여행은 완전하지는 않으나 상당 부분 나를 자유롭게 한다. 여행 중 불안과 긴장감으로 예민한 순간도 적지 않지만, 일상에서와는 다른 건강한 감정이 싹트는 게 느껴진다. 사라진 줄 알았던 의욕이 되살아나고 생동감 넘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날이 그날 같기만 한 시간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이고 호흡이 편해지는 것만으로 내가 갈망하는 자유가 충족된 듯한 뿌듯함에 사로잡힌다. 일상에서 감지하지 못했던 나름의 자유를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인가.
집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시차 적응을 하자마자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는 내 모습을 그려 본다. 앞으로 자유로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남은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