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사춘기때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단짝 친구와 함께 일기장을 사러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갔었다.
주변에 문구점, 팬시, 아트박스, 이런 것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에 처음으로 사는 나만의 일기장은 대형 문구점에 가서 아주 신중하게 고르고 싶었다.
지금도 생각 난다
사춘기 소녀의 질투심이었을까?
그렇게 신중하게 고른 일기장인데 내 친구것이 왜 더 예뻐 보였는지...
내 기억이 맞았다
일기장 첫 페이지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런 질투심이 생기는 것인지?"
“ 미움. 시기 질투 안녕~~ 다 잊어 버리고 나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라고 적혀있다
나의 추억의 일기장을 몇 장 다시 읽어 보면서 사춘기 소녀였던 내 과거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냥..,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내 일기장을 읽다 보니.. 안네가 참 성숙하고 지혜로운 소녀로 다가 왔다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서운 전쟁 속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소녀의 마음
독일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으로 인해 은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밤낮 없이 끌려가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는 소녀의 마음
좁고 불편한 은신처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맞이 하게 되는 가족의 죽음...
모든 것이 두려움과 절망뿐.....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꾸준히 기록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
안네가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 잘 이겨 낼 수 있었던것은 아마도 자신만의 소중한 키티 일기장이 있었기 때문일것 같다
나의 사춘기 시절 또한 하나님을 믿었던 신앙이 있었기에 조금은 방황하고 갈등 했지만 바른 길로 가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 처럼..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국제 전쟁
19세기 말까지의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 분할에 대해 20세기 초 재분할을 둘러싸고 열강이 대립, 특히 후발국인 독일이 영국과 대립하였다. 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는 3국 동맹, 영국ㆍ프랑스ㆍ러시아는 3국 협상으로 양 진영이 대립했다. 발칸 민족 문제를 발단으로 1914년 6월 사라예보사건, 7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 8월에 연쇄적인 열강의 참전 등으로 서부 전선에서 대치했다.
이는 오스트리아ㆍ독일ㆍ불가리아 등의 동맹군과 세르비아ㆍ러시아ㆍ프랑스ㆍ영국ㆍ일본ㆍ미국ㆍ중국 등 연합군 간의 세계 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휴전되고, 1919년 베르사유조약 등으로 강화가 성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ㆍ일 동맹에 따라 연합국 측에 참전하여, 중국에 있던 독일 조차지 칭다오(靑島)와 태평양상의 독일 영토를 점령하였으며,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제시하여 산둥성과 만주, 몽고 등지의 이권을 얻어냈다.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에서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까지 유럽, 대서양,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을 전장으로 연합국과 추축국(樞軸國)이 전면적, 세계적으로 전개한 전쟁을 가리킨다.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미영소중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독이의 추축국간의 전투였지만 연합국의 내부에는 미영 등의 자본주의 대국과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국의 대립 외에 민족독립운동이나 레지스탕스 운동 등도 독자의 목적으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주체의 전쟁목적을 통합한 것으로서 미영 정상은 1941년 8월에 영토 불확대나 민족자결, 시 민적 자유의 옹호, 군축 등을 명기한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였다. 또한 이 헌장은 미일 개전 후에는 소련도 포함하여 연합국 전체의 공동선언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전쟁은 ‘반파시즘ㆍ민주주의 옹호’의 성격이 농후하였다.
전쟁의 전개과정은 우선 유럽에서는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영프 총리가 독일에 의한 체코 슬로바키아의 일부 할양의 요구를 용인하는 형태로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히틀러(Adolf Hitler)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음 해에는 폴란드 침공을 강행한 결과 유럽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 때 소련은 영프가 ‘유화정책’에 의해 독일군의 공격이 소련으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1939년 8월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돌연 체결한 결과 공산당 등의 반파시즘 운동에 큰 타격을 미쳤다. 또한 유럽대전 발발 후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를 점령하여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상실한 영토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한편, 폴란드 서부를 점령한 독일군에 대해 영프는 본격적인 공격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기묘한 전쟁’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0년 4월이 되자 독일군은 북유럽이나 서유럽 국가로의 침공을 시작하여 6월에는 프랑스가 항복, 서유럽 대륙은 추축국 측의 지배하에 들어가 영국만이 고립적인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융성에 자극을 받은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네시아에 침공함과 동시에 9월에는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하는 일독이 3국 동맹조약의 체결을 단행 하였기 때문에 유럽 전선과 아시아 전선의 결합 가능성이 나타났다. 또한 영국에 대한 상륙작전 에 실패한 독일은 1941년 6월에 계획을 바꾸어 대소전을 시작하였지만 일본은 남진에 집중하기 위해 그 직전인 4월에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추축국 측의 전쟁 수행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일본의 남진(南進)은 미국과의 대립을 심화하여 1941년 12월에는 미일전쟁이 시작되어 전쟁은 말 그대로 ‘세계전쟁’으로 확대되어 미국이 무기대여 등으로 연합국 측에 물자를 대량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연합국 측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소련군의 승리로 독일군은 철수하고, 동년 9월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였다. 또한 1944년 6월에 미영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독일군은 동서에서 협공 당하여 패색이 농후해진 결과 1945년 4월말 히틀러가 자살하여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도 8월 6일에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서 미국군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아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 제2차 세계대전은 양방을 합하여 약 1억 500만 명이나 동원되어 5,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그중 70% 정도는 민간인이었으며 홀로코스트와 전략폭격 등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추축국(樞軸國)측의 전쟁범죄를 재판하는 국제군사재판이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전쟁후 개정되었다. 한편, 연합국은 카이로(1943.11), 테헤란(1943.11~12), 브레턴우즈(1944.7), 얄타(1945.2), 포츠담(1945.7~8) 등에서 전후의 국제질서체계형성을 주도할 준비를 정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첫댓글 두 분의 일기가 모두 아름다워요. 그러고보니 두 분이 같은 성이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