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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의영고(義盈庫)
정의
고려말~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기름·꿀·과일·나물 등의 물품을 공급하던 호조(戶曹) 소속의 아문.
개설
의영고는 고려 및 조선시대 궁중에 필요한 기름과 꿀로 만든 과자인 유밀(油密), 꿀[黃蠟], 나물 등의 반찬거리를 뜻하는 소물(素物), 후추 등을 공급하던 관서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의영고는 1308년(고려 충렬왕 34)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처음 설치하였다. 조선왕조에서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건국 초기부터 의영고를 설치하였다. 1392년(태조 즉위) 당시의 관원은 종5품 사(使) 1명, 종6품 부사(副使) 2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종8품 주부(注簿) 2명이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연복궁(延福宮)을 의영고에 통합하여 기구가 확장되었다. 1405년 관제 정비에 따라 의영고는호조의 속아문으로 편제되었다. 1414년에는 주부를 부직장(副直長)으로 고쳤으며, 1433년(세종 15)에는 의영고 직장을 구임직(久任職)으로 정하였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사를 영(令)으로, 부직장을 봉사(奉事)로 개편하면서 의영고의 직제가 정비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으로는 종5품 영, 종6품 주부, 종7품 직장, 종8품 봉사 각 1인을 두었다. 주부 이하의 관원 중 1명은 업무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구임직이었다. 『속대전』에는 영이 감원되어 주부가 책임자인 종6품 아문으로 변하였다. 경아전으로 서리가 8명 있었지만, 『속대전』에는 서리를 서원(書員)으로 격을 낮추고, 정원도 4명으로 줄였다. 차비노(差備奴) 15명, 근수노(根隨奴) 2명이 배정되어 지방의 공노비가 양인 대신 역(役)을 담당[選上立役]하였다. 그러나 『속대전』에는 이것이 폐지되고, 서울 사람으로 뽑아 역을 담당하게 하고 대신 매달 임금을 지급하였다. 옹장(瓮匠) 4명, 촉장(燭匠) 4명의 경공장(京工匠)이 소속되어 그릇 제조와 촛불 공급에 동원되었다. 대부분의 관서에서 경공장이 혁파된 것과 달리 의영고에 소속된 경공장들은 『대전통편』 단계에도 존속하여 기능을 계속 유지했다.
조선전기에는 유밀, 황랍, 반찬거리, 후추 등의 공급을 담당했으나 조선후기에는 반찬의 재료와 초[燭]를 공급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의영고의 위치는 한양 서부 적선방(積善坊)이었다.
변천
1506년(연산군 12)에는 의영고의 관원 중 부봉사(副奉事)와 참봉(參奉) 1명을 증원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의영고는 폐지되었지만, 1608년(광해군 즉위) 의영고를 다시 설치하였다. 1800년(정조 24)에는 내섬시가 혁파되며 의영고에 합병되었다. 내섬시에서 바치는 물건과 의영고에서 바치는 물건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의영고는 1882년(고종 19) 관제 개혁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재정
조선전기 의영고에서 필요한 물품들은 공물(貢物)로 각 군현에 배정되어 현물로 징수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의영고에 납부하는 공물 과다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컨대 1425년(세종 7) 8월 의영고에서 필요한 참기름은 149석 남짓이었지만, 각 도에서 거두는 참기름은 346석에 달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조선후기 의영고의 공물들은 선혜청 57공(貢)에 편입되었다. 그 후 의영고는 선혜청에서 매년 쌀 3,601석을 공급받았고, 의영고에서는 이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공인을 통해 물품을 조달받았다. 공급받는 재정이 부족하여 물품 조달이 어려울 때 호조에서 추가로 배분하였는데, 이를 별무(別貿)라고 한다. 별무는 공물을 적어 둔 목록에 있는 물건이 부족할 때 받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와 목록에 없는 것이 필요할 때 받는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로 나뉜다. 의영고에 배정된 별무의 규모를 보면, 가장 규모가 컸던 해인 1778년 유원공별무 16,363냥, 무원공별무 134냥을 받았다. 중간 규모이던 해인 1785년 유원공별무는 7,572냥, 가장 적은 해인 1798년 유원공별무는 6,946냥이었다. 1785년과 1798년의 경우 무원공별무는 배정되지 않았다. 의영고의 회계는 호조 판적사(版籍司)의 계사 6명 중 1명이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이진창(梨津倉)
정의
조선시대 전라도 영암군 북평면에 있던 세곡 보관 창고.
개설
이진창(梨津倉)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곳은 영암군(靈巖郡) 북평면(北平面)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창고조(倉庫條)에 따르면 당시 영암군에는 사창(司倉)·진고(賑庫)·대동고(大同庫)·군기고(軍器庫)·해창(海倉)·서창(西倉)·옥천창(玉泉倉)·이진창 등의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이진창은 영암군 읍치에서 약 120리, 즉 47㎞ 가량 떨어진 바닷가 지역에 설치되어 인근 지역의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진창은 현재 해남 땅끝 마을과 완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진창이 해상 운송에 유리한 바닷가에 설치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기본적인 설치 목적은 전라도 남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세곡(稅穀)을 운송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38년(헌종 4) 『승정원일기』에서도 대동미(大同米)를 싣는 배 1척이 이진창에서 불에 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이진창이 전세(田稅)나 대동미를 보관하고 배로 운송하던 창고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진창이 위치한 곳은 당시 육지와 제주도를 잇는 주요 뱃길 중 하나였다. 제주를 오고가는 수령이나 사신들이 매번 이곳을 경유하면서 이진창은 이들이 숙식하는 중간 기착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정조실록』에 따르면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使臣)이 왕래할 적에 강진·해남·영암이 도회(都會)를 나누어 정해서 각각 1년씩 돌아가면서 이들을 응대하였다. 그런데 사신이 출입할 때에는 매번 영암의 고달도(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리기 때문에 영암에 소재한 이진창에 육방(六房)을 설치하여 접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접대 장소인 이진창이 영암에 위치하여 강진이나 해남에서 도회를 맡은 해에는 먼 길을 와서 접대를 해야 하므로 큰 폐단이 되고 있었다. 한편, 영암 고달도는 길목으로 늘 사신을 응대해야 했으므로 영암이 도회를 맡은 해가 아니더라도 섬 백성들이 받는 폐단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서영보(徐榮輔)가 별단(別單)을 올려 영암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종전대로 고달도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강진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남당포(南塘浦), 해남이 맡는 해에는 관두포(館頭浦)에서 바람을 기다리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볼 때 이진창은 제주로 가는 수령이나 사신들이 배를 타기 위하여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진창에는 일반 군현(郡縣)의 관아와 같이 육방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진창이 사신 접대나 세곡 운송뿐 아니라 다양한 행정적인 업무도 함께 처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여지도서(輿地圖書)』
『해동지도(海東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암읍지(靈巖邑誌)』
실록연계
『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포항창(浦項倉)
정의
조선후기 함경도의 진휼에 대비해 경상도에 설치한 곡물창고.
개설
1732년(영조 8) 경상감사조현명(趙顯命)의 주청에 따라 함경도의 진휼을 위하여 경상도 영일 지역에 설립한 진휼창을 일컬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함경도는 토질이 척박하여 곡물 생산량이 다른 도에 비하여 적었으며, 중앙에 상납해야 할 전세곡도 도내의 관창에 군자곡으로 비축해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 중앙에서 부세를 줄여 주더라도 함경도 도민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되지 못하였다. 함경도 도민에게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진휼방식은 다른 도에서 곡물을 이전해 오는 것이었다.
17세기 초까지는 보통 강원도에서 해로를 통해 진자(賑資)를 이송해 주었으며, 강원도의 작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강원도에 곡식을 보내 주면 이것을 다시 함경도에 옮겨 주었다. 그러나 강원도 역시 토질이나 작황면에서 불시에 진휼곡을 잇대기 어려웠기 때문에 17세기 후반부터는 전결수가 많고 작황이 좋은 경상도에서 주로 진휼곡을 이전해 주었다. 문제는 기근이 들었을 때 진휼곡을 갑자기 마련해 올리는 조치는 경상도 도민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도민의 민폐를 줄여 주면서 북관에 진휼곡을 안정적으로 이전해 주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고, 동해안에 진휼창고를 설립하는 안이 영조대 초반에 제기되었다. 이에 1732년에 설치된 포항창은 함경도 원산·고원·함흥 3곳에 설치했던 교제창과 더불어 함경도에 진휼곡을 이전하기 위하여 설치된 창고로 19세기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직 및 역할
포항창은 처음에는 조운의 요충지인 포항리에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설치되어 창과 진의 역할을 함께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포항창에는 별장 외에 군관 7명, 이서 3명, 지인(知人) 3명, 사령(使令) 3명, 창속 30명, 수졸(守卒) 3명을 두었다. 그러나 포항창진은 운영 과정에서 군사적 기능보다 진휼곡을 이전하는 경제적 기능이 강조되었다. 포항창진은 동해안 일대의 환곡을 비축하여 함경도 산간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필요에 따라 전라도와 강원도 등에도 진휼곡을 이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포항창에는 평소 20,000석가량의 곡식을 조적(糶糴)하였으며, 최대 50,000석까지 보관이 가능하였다. 포항창에 속한 조운선도 14척에 달하였다.
포항창이 이처럼 북관에 진휼곡을 이전하는 요충지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포항항이 전라도나 함경도를 이어 주는 중간 기착점이면서, 곡창지대가 많은 경상도의 농작물을 수집하는 데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변천
포항창은 다른 도에 비하여 전결수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 뛰어난 경상도의 곡식을 할애하여 유사시 함경도에 진휼곡을 이전할 수 있도록 동해안로에 설립된 진휼창고였다. 포항창이 설립된 이후 불시에 경상도 각 읍의 곡식을 갹출하여 연안까지 옮겨 와야 하는 폐단이 얼마간 해소되었다.
포항창은 이후 1766년(영조 42)에 영남의 좌제민창(左濟民倉)에 이속되었지만, 포항창의 설치와 운영은 동해안 일대의 물류 유통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포항창 설치를 전후로 영일현과 인근 지역에 부조장(扶助場) 등 다수의 장시가 개설되어 영일만을 중심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관창의 운영은 재정 물류의 집적과 이동을 유인하는 것이었기에, 지역 간 상업유통경제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정형지, 「조선후기 浦項倉의 設置와 運營」, 『오산전문대학산업기술연구소보』 3, 오산대학 산업기술연구소, 1997.
최주희, 「18세기 후반 官倉運營의 변화와 私設倉庫의 등장」, 『녹우연구논집』 41, 이화여자대학교, 2002.
김형수, 「조선후기 경상도 동해안 지역의 상품유통-浦項지역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풍저창(豐儲倉)
정의
국용을 위한 전곡의 수입과 지출을 담당하는 정4품아문.
내용
1. 풍저창의 직제
풍저창(豊儲倉)은 국가의 재용(財用)을 수입·지출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호조 소속의 아문(衙門)이었다. 1392년(태조 1) 7월 새로이 관제를 정비할 때 종5품인 사(使) 1명, 종6품인 부사(副使) 2명, 종7품인 승(丞) 2명, 종8품인 주부(注簿) 2명을 소속 관원으로 두었다. 그 뒤 풍저창의 권무(權務) 녹사(錄事) 2명을 설치하였으며, 1432년(세종 14)에는 형조 우참판을 풍저창 실안제조(實案提調)로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1일].
1451년(문종 1)에는 담당 관원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관리 부실 문제를 개선하고자 서강(西江)에 위치한 분풍저창(分豊儲倉)에 구임관(久任官) 1명을 임명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60년(세조 6)에는 전곡의 출납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권지직장(權知直長) 5명을 임명하여 풍저창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고찰하여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키는 도목(都目)을 적용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풍저창 사(使)를 수(守)로 고쳐서 정4품아문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부사(副使)를 주부로, 승(丞)을 직장으로, 부승(副丞)을 봉사로 고쳤으며, 부봉사 1명을 증원하였다. 또한 1469년(예종 1)에 풍저창에 주부 1명을 더 두었다.
한편 1465년(세조 11)에 성균관의 양현고(養賢庫)를 풍저창에 소속시켜 분풍저창(分豊儲倉)으로 바꾸었으나, 성균관의 계속된 반발로 다시 양현고로 환원시켰다.
2. 풍저창의 설치와 변천
풍저창전세(豊儲倉田稅)를 보관하는 본창(本倉)은 군자본감(軍資本監)·광흥창(廣興倉)과 함께 도성 안의 광통교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406년(태종 6) 무렵에 오면, 전세를 보관할 창고가 부족하여 바깥에다가 그대로 쌓아 두어야 할 지경에 이르자,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약 2개월 동안의 공사를 거쳐 1413년(태종 13) 4월에 서강(西江)에 70칸 규모의 분풍저창, 즉 강창(江倉)이 군자강창(軍資江倉)와 함께 건립되었다. 이후 용산에도 강창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470년(성종 1)이 되면 강창을 혁파하여 광흥창에 소속시켰다.
참고문헌
오정섭, 「고려말·조선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 2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2.
이혜옥, 「조선시대의 풍저창」, 『난곡이은순교수정년기념사학론문집』, 2000.
군자/군자곡(軍資穀)
정의
조선시대 전란 및 국가의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정부의 관할 창고에 비축해 둔 곡식.
개설
본래 군자곡은 전란에 대비하는 비축곡의 성격을 띠지만, 흉년이 들었을 때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지급되는 진휼곡으로도 쓰였다. 조선전기부터 중앙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를 호조의 관할 창고에 수납한 후 남은 곡식을 군자감의 별창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지방관아에도 창고를 두어 군자곡을 비축해 두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에 소재한 읍창을 각관 읍창(各官邑倉) 혹은 군자의창(軍資義倉)으로도 불렀다.
한편 군자곡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萬戶) 등에게 제공하는 물자가 부족할 경우 이를 보충하는 재원으로도 활용되었다[『성종실록』 3년 12월 21일]. 이 때문에 조선전기부터 군자곡을 여타의 경비로 지출하는 문제점이 조정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는 전답에서 경작한 농산물과 토산현물을 수취하여 국가 재원으로 활용하는 현물 재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중앙에 상납된 세곡(稅穀)으로 왕실을 부양하고 국가의 행정을 유지하였으며, 지방관아의 부속 창고에 비축된 곡식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기근 시 진휼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중앙의 군자창과 지방의 읍창에 보관된 곡식은 명목상 군자곡이라 하더라도 농사의 작황에 따라 진휼곡으로 자주 전용되었다. 16세기 무렵부터 창고곡을 방출할 때 원곡의 손실분을 보충하기 위한 명목으로 회록법(會錄法)을 시행하면서 군자곡의 이자 수입은 재정 경비로 활용되었다.
변천
창고곡을 환수할 때, 원곡에 일정 비율의 이자를 적용하여 수취하는 회록법을 시행하면서, 군자곡은 호조를 비롯해 중앙의 재정아문에 경비를 보용해 주는 자원으로 이용되었다. 호조에서 지방에 보관해 둔 구관곡(句管穀)으로 진휼하고 나면 모자란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군자곡을 옮겨다 썼다. 두 차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보장처로 기능한 강화와 남한산성의 비축곡은 경기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경우 진휼곡으로 쓰이는 한편, 호조에 경비가 부족할 경우 서울로 옮겨졌다. 또 호조와 선혜청 등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세곡을 지방에 그대로 유치하여 진휼에 쓰고 난 다음 모자라는 중앙의 경비 역시 군자곡으로 해결하였다.
중앙으로 올라오는 세입이 한정된 상태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흉년이 들었을 경우, 중앙정부는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세를 줄이고 진대를 늘려야 했다. 이때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고, 진휼곡으로 손쉽게 전용할 수 있는 것이 군자곡이었다. 다만 기근 시 민간에 나눠 준 군자곡의 경우 환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도 군자곡이 탕갈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문용식, 『朝鮮後期 賑政과 還穀運營』, 경인문화사, 2001.
박소은, 「17세기 후반 호조의 재정수입 확보책」, 『조선시대사학보』 31, 조선시대사학회, 2004.
菅野修一, 「朝鮮初期 賑恤穀 운송 문제 : 朝鮮王朝의 國家的 再分配 기능에 대한 考察」, 『고문서연구』 22, 한국고문서학회, 2003.
군작미(軍作米)
정의
조선 영조대에 진휼용 환곡으로 삼기 위하여 병조와 각 군문에서 징수하는 군포를 쌀로 바꾼 것.
내용
흉년 대비 진휼용으로 조성된 환곡(還穀)이 18세기에 들어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였다. 풍년시에 흉년 대비용 곡물을 비축하자는 논의 속에서 1729년(영조 5)에 병조·금위영·어영청 재원 110,000석을 토대로 군작미(軍作米)가 처음 창설되었다. 군작미란 군보가(軍保價)를 포(布) 대신 미(米)로 거두어 비축용 환곡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풍년이 들었을 때 연해 지방은 곡가가 천하고 면포가 귀해졌으며, 또한 전황(錢荒)의 시기에 각 군문에 면포를 납부하는 군민(軍民)에게 면포 대신 쌀을 징수하여 손쉽게 비축 곡물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처음 창설 이후 모두 7차례 더 설치되었는데, 1734년(영조 10)에 33,000석, 1735년(영조 11)에 110,000석, 1748년(영조 24)에 30,000석, 1749년(영조 25)에 90,000석, 1750년(영조 26)에 100,000석, 1754년(영조 30)에 60,000석, 1770년(영조 46)에 40,000석이 각각 만들어져 진휼 외에 호조 지출 부족분, 대동 저치미 부족분 등에도 사용되었다.
용례
上引見大臣備堂 領議政金致仁 以近年年事屢登 此時儲穀 實爲先務 三南軍作米 請限四萬石措置 [『영조실록』 43년 8월 23일]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탁지지(度支志)』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문용식, 「18세기 軍作米의 설치와 운영」, 『全州史學』 4, 1996.
양향청(糧餉廳)
정의
조선후기 훈련도감의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재정 기관.
개설
양향청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에게 급료를 지급하고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나 정치·군사·경제 등의 권한 집중을 피하였던 조선의 국정 원리에 따라 양향청은 훈련도감에 속해 있으면서도 군사를 담당하던 훈련도감보다는 재정을 담당하던 호조(戶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0월 정부에서 급료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도감을 창설한 후, 훈련도감 군인들에 대한 급료와 각종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양향청을 설립하였다. 양향청은 처음에는 군향청(軍餉廳)이라고도 하였는데, 정확한 설립 날짜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만기요람(萬機要覽)』,『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서는 훈련도감의 설치와 동시에 설립되었다고 보고(기록하고) 있다.
조직 및 역할
양향청은 훈련도감의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기관이지만, 호조 판서가 제조(提調)가 되어 실제 운영을 담당하였다. ‘재상(宰相)은 군사(軍事)를 관장하고, 대장(大將)은 군병(軍兵)을 통솔하며, 호조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것[相臣領其事 大將治其兵 度支制其財]’이 조선시대 군사 운영의 원칙이었다. 정치·군사·경제 등의 권한이 한곳에 집중하면 지나치게 권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취한 조치였다. 이러한 권력 분립의 원칙에 따라 양향청은 비록 훈련도감의 재정을 전담하는 기관이지만 그 운영은 호조 판서가 관할하였다. 즉, 양향청에는 도제조(都提調) 1명, 제조 1명, 겸제조(兼提調) 2명, 낭청(郎廳) 1명의 관원을 두었다.
도제조는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하는 의정 1명이 겸임하였고, 제조는 호조 판서가 겸임하였으며, 겸제조는 훈련대장과 병조 판서가 당연직(當然職)으로 겸임하였다. 낭청은 처음에는 훈련도감에서 따로 임명하여 보고하였으나, 1672년(현종 13)에 호조 별영랑(別營郞)이 겸임으로 하는 것으로 정하였고, 1745년(영조 21)에 종사관(從事官)으로 개칭하였다. 양향청에 소속된 관리로는 호조에서 파견한 계사(計士) 1명, 서리(書吏) 4명, 고직(庫直) 1명, 사령(司令)·문서직(文書直)·군사(軍士) 8명을 두었다.
변천
임진왜란 중 정부는 급료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도감이 설립되자 군인에게 지급할 급료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1595년(선조 28)부터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이원화하여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훈련도감 군인 내에서 군공(軍功)이나 시재(試才) 등으로 금군(禁軍)에 제수되는 사람이 다수 생기자 금군의 급료는 호조에서 지급하고, 품계가 없는 한량의 급료는 군향청(양향청)에서 지급하였다[『선조실록』 35년 윤2월 1일].
급료는 금군이 1개월에 쌀 12말을 받았고, 한량은 6말을 받았다. 그러나 훈련도감 군인 중에서 군공이나 무과(武科) 등을 통하여 금군으로 승진하는 사람이 계속 증가하자 이들의 급료를 책임져야 할 호조의(에서는) 재정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조세를 설정하여 군인들의 급료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1602년(선조 35) 도감군의 급료를 지급할 목적으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 도의 전결(田結)에서 세금을 거두는 삼수미세(三手米稅)를 창설한 것이었다[『선조실록』 39년 9월 22일].
삼수미세의 창설 이후 도감군의 급료는 호조와 양향청에서 나누어 지급하던 데에서 호조가 총괄적으로 담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종래 한량의 급료를 지급하던 양향청은 훈련도감의 둔전(屯田)을 접수하여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제외한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각종 재원을 마련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은 막대한 규모의 둔전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부 관료들은 시정을 촉구하였다. 1596년(선조 29) 6월 영사(領事)김응남(金應南)은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는 호조와 양향청에서 지급하고 있는데, 훈련도감 둔전의 소출은 무엇에 사용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것을 모두 양향청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부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훈련도감 둔전은 삼수미세가 창설되었을 때 양향청으로 귀속되었다. 훈련도감 둔전을 접수한 이후 양향청은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제외한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각종 군수 재원을 마련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양향청이 접수한 훈련도감 둔전의 총계는 4,496결(結) 30부(負) 7속(束)에 달하였다.
그런데 비록 양향청이 훈련도감에 군수를 조달하는 기관이라고는 하지만 양향청은 호조 판서가 제조(提調)를 예겸(例兼)하는 기관이어서 훈련도감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훈련도감과 양향청은 ‘양향청과 훈국은 다르다(糧餉廳與訓局有異)’ 하여 전혀 별개의 기관이라고까지 주장되었다[『영조실록』 9년 9월 5일]. 따라서 양향청으로 둔전을 모두 넘겨준 이후 훈련도감이 받은 경제적 타격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재정 궁핍으로 곤란을 겪던 훈련도감은 곧바로 양향청과는 별도로 둔전을 다시 확보하였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 변동』, 혜안, 2003.
역둔토(驛屯土)
정의
조선시대 역과 군·아문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둔토.
개설
역둔토(驛屯土)는 역토와 둔토(屯土)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역토는 조선초 역참제도가 정비되면서 각 역(驛)의 경비를 마련하고, 입마(立馬)와 역역(驛役) 동원의 대가로 지급된 토지를 일컬었다. 한편 둔토는 군량을 비축하고 정부관서의 경비를 보전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거칠어 버려둔 토지인 진황지나 주인 없는 무주지를 지급하여 경작하게 한 토지였다.
조선전기에는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국둔전과 지방관청의 경비를 보전하기 위하여 관둔전이 지급되는 정도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신설 군문과 영·아문에서 자체적으로 둔전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둔토는 갑오개혁기에 모두 세금을 부담하는 출세지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내장원(內藏院)에 귀속되었다. 이후 일제가 이를 조사하여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민간에 불하함으로써 둔전과 같은 전근대적 토지지배 방식은 소멸되었다.
내용 및 특징
역토는 공수전(公須田)·유역인전(長田, 副長田, 急走田)·마위전(馬位田)으로 구분되었다.
공수전은 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로서, 대로변의 역에는 20결, 중로변에는 15결, 소로변에는 5결이 지급되었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유역인전은 역역의 대가로 역장과 부역장 및 급주졸(急走卒)에게 지급된 토지였다. 공수전과 유역인전은 개인에게 조세 징수권을 준 각자수세지(各自收稅地)로서 일반 민유지에 수세권(收稅權)만 부여된 토지였다. 반면 마위전은 역마(驛馬)를 사육하는 대가로 역리·역졸·관군에게 지급된 토지로, 역토 가운데 비중이 가장 컸다. ‘삼정을 일호로 편제하여[三丁一戶]’ 호수(戶首)에게 토지를 분급하였으며[『성종실록』 15년 5월 18일], 역호가 마위전을 직접 경작하는 자경무세전(自耕無稅田)으로 운영되었다. 즉, 마위전에서 나는 소출은 중앙에 상납하지 않고 해당 역에서 말을 사육하고 입마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둔토는 정부관서와 군사기구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로서, 국둔전(國屯田)과 관둔전(官屯田)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세조실록』 4년 8월 22일][『세조실록』 7년 1월 11일]. 국둔전은 군자(軍資)를 확보할 목적으로 설치한 국가 소유지로서 각 도 관찰사가 관리하였다. 관둔전은 재정 보용을 목표로 지방관아와 영(營)·진(鎭) 등 군사기구에 설치된 토지로, 해당 관서에서 관리하였다. 둔전은 개간 가능한 황무지나 무주지를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양란(兩亂)을 거치면서 신설 군문에서 둔전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민유지를 불법으로 탈점하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변천
역토 중 각자수세지인 공수전과 유역인전은 역참에서 일반 민전에 세를 거두는 권한만 부여된 토지였다. 반면 자경무세지인 마위전은 역에 복무하는 자들이 토지에서 나는 소출로 말을 먹이고 입마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토지였다. 자경무세지의 경우 역민들이 고된 역역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토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후기 들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주는 병작제 방식이 자주 활용되었다. 역토를 경작하는 자들 역시 점차 비역역인(非驛役人)인 양반 지주층으로 바뀌어 갔다. 역에서 복무하는 자들은 고된 역역(驛役)에 종사해야 하는 한편, 마위전을 경작하여 입마비(立馬費)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양반 토호에게 역토를 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궁방에서도 마위전 등 역토를 침탈하는 사례가 나타났다[『숙종실록』 30년 7월 20일]. 이처럼 역전이 양반 토호와 궁가에 잠식당하는 상황에서 일부 지주들은 역전을 작인에게 경작케 하여 영·아문에 지대를 납부하고 남은 중간의 차익을 꾀하는 중답주(中畓主)로 변하여 갔으며, 이로써 역토 내부에는 중층적인 소유·경영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편 둔토는 세조대 이래 국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국둔전·관둔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양반 토호층의 사적 점유로 쇠퇴 일로에 놓였다. 양란을 거치면서 신설군문과 영·아문 그리고 궁방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의 둔전이 설치되었다. 둔토의 설치는 17세기에는 주로 왕이 하사하는 사여와 황무지나 묵정밭에 대한 소유권을 주는 절수를 통해서, 18세기에는 왕실이 민전을 사들이는 급가매토(給價買土)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급가매토는 더 이상 절수할 무주진황지가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둔토의 소유·경영 형태는 둔전이 실질적인 토지에 근거한 것인지[有土屯土] 수조권만을 부여받은 것인지[無土屯土]에 따라 다시 분화되었다. 유토 둔토는 그 소유권이 일차적으로 영·아문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영·아문에서는 이 토지를 가지고 지주경영을 할 수 있었다. 유토 둔토의 경영 방식은 18세기 초엽까지는 임대해 준 토지의 수확량을 절반으로 나눠 갖는 병작제가 우세하였으나 19세기에는 일정한 지대를 정해 놓고 작황 상황에 관계없이 일정한 소작료를 내는 도지제(賭地制)가 확대되었다. 무토 둔토는 애초에 민전에 설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민전지주는 국가에 납부할 토지세를 해당 영·아문에 둔전세로 납부하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유토 둔토는 또다시 1종 유토와 2종 유토로 구분되어, 2종 유토는 민유지로 인정되었다. 1종 유토는 영·아문이 매득하거나 직접 개간하여 설치한 둔토로 영·아문과 농민이 직접적인 수취-지배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2종 유토는 민유지를 둔토로 편입시킨 것으로서, 이 둔토는 ‘영·아문-지주-소작농민’이라는 중층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토지였다. 2종 유토와 무토 둔토가 증가함에 따라 영·아문이 종전과 같이 직접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둔토는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는 민의 사적 토지 소유권이 성장하고 기존의 둔토 경영 방식이 유명무실해졌음을 뜻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김용섭, 『朝鮮後期農業史硏究1』, 지식산업사, 1995.
이경식, 『朝鮮前記 土地制度 硏究 : 農業經營과 地主制』, 지식산업사, 1998.
이영훈, 『朝鮮後期 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김양식, 「대한제국·일제하 역둔토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영둔토(營屯土)
정의
조선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기 위하여 군·영문에 지급한 토지나, 개간 및 절수를 통해 군·영문에서 자체적으로 확보한 둔전.
개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할뿐더러 새로 군영(軍營)을 창설하게 되면서 군사 재원을 확충해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를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군·영문으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둔전(屯田)을 확보하여 재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군·영문은 우세한 물력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개간과 절수를 통하여 둔전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둔전을 경작하는 민인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수취 체제를 집권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둔전의 지배-수취 구조가 변동하는 가운데 군·영문의 직접적인 둔전 경영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내용 및 특징
군·영문에서는 감관(監官)을 파견하여 둔전을 관리·경영하였다. 감관은 일반적으로 각 기관에 속한 직원·장교들로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3년 7월 25일]. 한편 둔전을 직접 경작하는 이들을 둔민(屯民)·둔군(屯軍)이라 불렀다. 둔군은 군영의 예속 노동력으로서 영(營)에 소속된 각종 직역자였다. 반면 둔민은 일반 민인으로서 부역 징발이나 유민(流民)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확보된 노동력이었다. 그 밖에 민간에 병작(竝作)의 방식으로 둔전을 경작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둔전의 소유 구조는 군·영문이 소유권을 가진 ‘유토둔전(有土屯田)’과, 민전지주에게 수조권을 행사하는 ‘민결면세지(民結免稅地)’로 구성되었다. 둔전의 수취액은 유토둔전의 경우 결당(結當) 조(租) 200두(斗) 혹은 조 100두였다. 한편 민결면세지의 경우는 결당 미(米) 23두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 구조 및 수취 방식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변화되었다.
연원 및 변천
둔전은 원래 교통·운송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사회에서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군사로 하여금 황무지(荒蕪地)나 진전(陳田) 등을 개간·경작케 하여 군수(軍需)에 충당하는 이른바 차전차경(且田且耕)의 군사목적용 특수지목이었다. 조선전기에는 고려말의 여러 둔전 문제를 정리하고 국둔전(國屯田)과 관둔전(官屯田)을 통하여 점차 둔전제가 정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국둔전·관둔전은 누차에 걸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그 경작은 대부분 군인 등의 부역 징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16세기에 들어서면 양반 토호층의 사적 점탈로 둔전제는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다.
조선왕조의 둔전제는 양란(兩亂)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정부는 전란을 맞아 군량 조달을 위하여 둔전을 장려하였다. 이때 주가 되었던 것은 영둔토(營屯土), 즉 군영문 둔전(軍營門 屯田)이었다. 각 지역의 여러 군영에서는 정부의 재정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개간과 기경(起耕)에 적극적이었다.
1629년(인조 7)의 기사를 보면, 통영(統營)의 둔전은 부족한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인조실록』 7년 9월 26일]. 이때의 둔전 경영 형태는 군영에 예속된 직역자를 통한 부역제적 경영과, 유민(流民)의 모집을 통한 모민설둔(募民設屯)의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인구 증가 및 개간의 진전에 따라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의 확보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점차 이전까지는 무주진황지를 대상으로 시행되던 둔전 절수(折受)는 사실상 농민의 실제 소유지인 개간지를 침탈하는 한편, 면세·면역의 특권으로 투탁(投託)을 유도하는 방법이 증가하게 되었다. 숙종대는 이미 여러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이러한 방식을 통한 둔전의 설치가 활발해졌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각종 신역을 노동력이 아닌 현물로 지급하는 물납화(物納化)가 진행됨에 따라 부역제에 입각한 둔전 운영은 일반 민인에게 병작을 주어 경영하는 병작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부역제적 둔전이 해체되면서 지방의 토호나 재력가들의 불법 점유 행위가 증가하였다. 이에 각 영(營)은 군졸·유민에 의한 불안정한 경영 대신 토지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을 유지하면서 이들 토호·지주에게 둔전의 경영을 맡긴 채 효율적인 수취를 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동시에 숙종대부터 시작된 양역변통논의(良役變通論議)가 진전됨에 따라 둔군(屯軍)의 정액이 결정되었고, 각 군영의 둔전에 대해서도 면세 결수를 확정하여 더 이상의 확장을 막으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둔전에서의 수취를 수령이 담당하게 하여 군·영문의 둔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배제하려 하였다. 이에 각 군문은 군문 장교를 별장에 임명하여 수령의 침탈을 막고 둔전·둔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이 되면 향촌 사회의 내부에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한 둔민들이 오랜 기간 경작하면서 형성된 사실상의 소유권을 근거로 지대 인하를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군·영문은 수취 총액을 정하고 농사의 풍흉에 관계없이 그 액수를 거두는 정총제(定摠制)를 채택하였다. 이후 군·영문의 주된 관심사는 정총의 확보에 그치게 되었고 실제 운영은 사실상 각 읍에 위임되었다. 결국 19세기 둔전의 수취는 면리조직(面里組織)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군·영문의 직접적인 둔전 경영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송양섭, 「17세기 軍營門屯田의 擴大와 경영형태의 변화」,『역사와 현실』 36, 한국사연구회, 2000.
이경식, 「조선초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한국사연구』 21·22, 서울대학교, 1978.
